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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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1 마음 밖에 불성 따로 없다
[원문]
三界混起 同歸一心 前佛後佛 以心傳心 不立文字.
삼계가 혼돈으로 일어나나 모두가 한마음(一心)으로 돌아가느니라. 앞서 깨달은 부처님이나 뒤에 깨달은 부처님이 서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시니, 본 바탕자리에는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지 못하느니라.

[해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후 깨달은 우주의 실상에 대해 법문하셨지만 하근기 중생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법문을 계속 설해야 할 것인가 망설이다가 제석천왕의 세 번이나 간청하므로 <아함경>을 통해서 인간이 살아가는 도리를 말씀하셨고, <반야부>에서 진리의 실상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이은 ‘28대 조사’인 달마 스님도 성불해 스승 반야다라 존자로부터 ‘동쪽으로 가 법을 전하라’는 부촉을 받고 중국으로 오셔서 처음에 선을 전하고자 했지만, 교학이 성한 터라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양 무제를 통해서 선을 이해시키려고 했지만 양 무제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문무백관을 상대로 <금강경>을 강의했지만 그 참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달마 스님께서는 ‘아직 때가 아니구나, 인연이 아니구나!’하고 느껴서 소림굴로 들어가 9년 동안 면벽을 하시고 제자 혜가를 만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법을 전하게 되었는데 부처님으로부터 28대 조사가 되고 중국에서는 초조(初祖)가 됩니다.
달마 스님은 혈맥론(血脈論)에서 심외무불성(心外無佛性) 즉, ‘마음 밖에는 불성이 없다’ 하는 법문을 하셨습니다. 이 우주는 크게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로 나뉩니다. 욕계는 우리가 사는 지옥으로부터 육욕천까지 욕심을 끊지 못하는 중생들이 사는 세계를 말합니다. 알다시피, 불교의 수행목적은 깨달음에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을 얻고자 해야지,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불교를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에요.
달마 스님은 ‘우주의 실상인 진여당체는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이는 무슨 얘기냐 하면 지금 우리 의식 가운데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고 우리가 속아서 살고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꿈을 꾸고 있는 겁니다. 꿈속에서 꿈을 꿀 때 사실이 아닌 것임에도 꿈속에서 우리가 끄달려 가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잠이 깨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현실에서 느끼는 경계 대상도 분명히 사실이 아닌 것인데 사실인 것처럼 끄달려 가고 있다 이겁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이것은 아니다 하고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환경에 끄달려가는 경우가 많이 있잖아요. 그처럼 집착이라는 게 무서운 겁니다. 수행을 통해서 그동안 무수히 익혀온 습을 녹이는 것이 수행인 것입니다.
설탕도 분석해 들어가면 본래는 맛이 없는 겁니다. 모든 물질의 본질은 모양이 없는 것이거든요. 모양이 없기 때문에 어떤 표현도 불가능한 겁니다. ‘이것이 진리다, 저것이 진리다’ 이야기 하는데 진리라고 생각을 하면 이미 진리가 아닌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법문하시고는 한 마디도 하시지 않았다’는 얘기는 진리 실상 자리는 설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 어떤 표현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는 겁니다.
불교 핵심인 선 법문은 다 이 ‘모양 없는 바탕’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요. 달마 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집착하면서 사는 세계가 바로 욕계라고 이야기 해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사실은 욕심이 내재돼 있습니다. 욕심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거예요. 지옥 중생으로부터 인간세계, 천상세계, 육욕천까지 이렇게 욕심으로써 존재하는 세계를 욕계(欲界)라고 표현합니다.
색계(色界)는 수행을 통해서 욕심은 다 끊은 경계입니다. 식욕, 수면, 명예욕이나 재물욕, 음욕까지도 다 끊어졌지만 아직도 물질에 대한 집착만은 끊지를 못한 거예요. 나다, 너다 하는 생각을 아직 끊지 못하고 중생들이 사는 세계가 색계 18천입니다.
무색계(無色界)는 욕심도 다 끊어졌고 물질에 대한 집착도 다 끊어졌지만, 아직도 마음이다 하는 생각이 남아 있다 하면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무색계는 한두 생의 수행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닙니다. 선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즉 견성하면 성불했다고 이야기 하는데, 어떻게 보면은 착각일 수 있습니다. 부처님처럼 육신통을 자재하게 쓸 때 참다운 성불이라 하겠지요. 아직도 물질에 끄달려 가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성불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욕계, 색계, 무색계를 윤회하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달마 스님은 ‘삼계가 혼돈으로 일어나나 모두가 한마음으로 돌아간다’고 설했습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도 본래는 하나의 마음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마음이니, 부처님이니, 법이니, 불성이니, 법성이니, 진여니, 진공이니, 반야니, 이런 표현들은 그 모양 없는 실상의 자리를 부득이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우주는 그대로 하나의 마음으로 돼 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다’하는 말입니다.
■ 청주 혜은사 주지
2009-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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