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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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모든 거를 닥치는 대로 멸해버리고 사세요!
자기 주인공에다가 모든 것을 포기해서 일임시켜라!

어떠한 문제가 있는 거를
앞세우지 마시고
내 마음의
그 주인공으로부터 밝음을,
그 빛으로 인해서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을

과거의 업보나 가환이나
그런 모든 것을
녹여 버리게끔 해줄 수 있다면
여러분 스스로 밝아짐으로써
스스로서 생활이
곤궁해지지지도 않게 됩니다

굳이 촛불을 켜는 이유
문 : 올해 처음으로 선원에서 거행하는 촛불재에 참석했습니다. 나름대로 굉장히 신선하고 잘 알지는 못하지만 왠지 모르게 생전 처음으로 느껴지는 장엄함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자꾸 흘렀습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뭔가 좋은 일만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촛불을 켜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답: 우리는 올해다 내년이다 하지만 본래 이 진리의 자리에서는 올해도 없고 내년도 없고 과거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이 찰나찰나 과거로 돌아가고 찰나찰나 미래로 돌아갈 뿐인 것입니다. 현실에 우리가 지금 촛불을 켜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현실에 사는 것이 모든 거를, 닥치는 대로 과거를 멸해 버리고 미래도 현재에서 자꾸 융성시키고 증장시키면서 꽃피고 열매가 맺도록 하는 거라 이겁니다, 영원토록. 그렇기 때문에 이게 촛불 하나를 들어도 이건 범연한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촛불 하나가 과거도 비출 뿐 아니라 미래도 비춰 줍니다. 그런데다가 과거와 미래를 한데 합쳐서 현실에 놓고선 두루 비추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우리가 여기서 촛불 하나라고 해서, 사람이 하나를 들었다고 해서 이거 촛불을 업신여겨서는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영원한 밝음이니까. 방편으로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잖으면 배우질 못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난하고 가난치 않고 그거를 떠나서 우리 마음의 밝음을 찾음으로써 바로 마음이 가난치 않게 되고 아주 안정되고 언제나 방황하지 않게 되고 진득해지고 점잖아지고 말수가 적어지고 편안해지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전자에 내가 지었던 것도 전부 녹아져 버리는 까닭에 우리 현실에도 살기가 무난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환이 있고 병고가 있고 그런 어떠한 문제가 있는 거를 앞세우지 마시고 내 마음의 그 주인공으로부터 밝음을, 그 빛으로 인해서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을, 과거의 업보나 가환이나 그런 모든 것을 녹여 버리게끔 해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밝아짐으로써 스스로서 생활이 곤궁해지지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에게 공부인연 심어주고 싶어
문 : 누구나 느끼는 거겠지만 이 마음공부를 하다 보면 환희심이 나서 가까이 있는 남편과 자식들에게도 공부 인연을 심어 주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안됩니다. 괜히 더 삐죽거리는 것 같아요. 오히려 바깥 인연들은 더 쉬운데 말이에요. 그런 것도 이유가 있을까요?
답 : 이 공부하는 데는 가까운 사람 공부시키기가 정말 어렵구나! 참 어렵구나! 하는 걸 누구나 느끼실 겁니다. 먼 데 사람을 시킬 수는 있어도 가깝게 있는 사람을 공부시키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걸 정말 아주 절실히 느끼실 거예요, 아주! 내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오히려 전부 날탱이예요, 날탱이! 외려 남들은 먼 데서도 오는데, 이 사람들은 자꾸 달아나가요! 그러니 글쎄 그걸 어떻게 하겠어요? 그걸 일일이 “야, 저 먼 데 사람도 이렇게 오는데, 너는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이 왜 참석을 안 하느냐?” 이래도 그게 욕심질이라. 그러니 그걸 어떡하겠소? 오히려 가깝게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옛날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있지마는 조사들이 말씀하신 것이 이런 게 있거든요. 아주 가깝다고 하는 사람을 제도 못하는 이유가 그 집안에서 하나가 만약에 삐죽 나왔다면 그 아래 것들은 다 그냥 아주 망가뜨린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가 삐죽 나온 거를 증오하고 안 받아들이기 때문에 망가지는 거지, 받아들인다면 같이 올라갈 수 있죠. 그런데 안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게. ‘너는 그렇게 살면서, 너는 그렇게 하면서 왜 나를 갖다가 이렇게 안 해 주느냐.’ 이건 도대체 이유가 닿지 않는 거예요. 자기가 해서 올라와야 할 텐데, 그걸 길을 인도하고 이렇게 올라오라고 아무리 그렇게 일러 줘도 그걸 못하는 거예요. 그냥 덤벙 ‘내 대신 좀 먹어 주면 내가 배가 부를 텐데….’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이 더 외려 안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재에 모였을 때는, 이 바다로 물이 모였을 때는 바다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한 장소에 있어요. 그러나 이 물이 흘러갔을 때는 다 각각 헤어지고 또 모였다 흩어지고 그러는데, 우리가 부모다 자식이다 하는 거는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육으로 볼 때는 부모와 자식이지만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는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집착하지 마시고 자기 앞만 보고 열심히 정진해 보세요. 그러다 보면 내가 밝아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내 가족도 더불어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몸과 마음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문 : 얼마 전 교통사고로 다리를 많이 다쳐 병원에 입원 중에 있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불교에 관심이 많아 불법의 이치에 대해서 어느 정도 터득을 했다고 여겼는데 막상 내 몸이 불편하게 되니 괜히 짜증도 나고 신경질적이 되면서 내 몸과 마음을 스스로 제어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이제는 정말 내 몸과 마음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스님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답 : 우리 수행자들은 그런 이치를 알아도 실질적으로 내가 그렇게 해 보지 않고는 그 도리를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애기가 되라. 아는 거와 모르는 거를 다 그 주인공에 일임시키면서 자기는 자기대로 거길 믿고 거기에 감사하고, 들이고 내는 것도 거기다 들이고 내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는 동시에 내 이 육의 기능은 모든 것을 거기에서, 즉 말하자면 감독이 되는 거죠, 모든 게. 기능의 감독자로서 전부 응용하듯이. 그러니까 내가 인체 안에서 모든 생리적인 작용을 하는 거를 다 관리인으로서 하다가 보면 바로 참 제작자가 되는 거죠. 배우가 되는 게 아니라. 그 배역은 이 안에서 생리적인 작용을 하는, 즉 말하자면 곤충이 다 나한테는 호법신장들이 되는 거죠. 그래서 팔만 사천 털구멍도 업보가 되려면 그 털구멍 하나에 한 생의 업보가 된다 하지마는, 그것이 호법신이 된다면 일분일초도 안 돼서 자기는 항상 다니면서 자길 보호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자기 마음이 그렇게 그 주인공에 모든 걸 몰락 일임시켜 버리고 잠재해 있는 자기 실상이 지금 현재 의식과 계합이 된다면 그렇게 좋은 보물을 얻을 수가 없는 거죠. 그럼으로써 일체 만법을 자기 응용대로 참, 하늘과 땅을 상응하면서, 모든 일체 유생무생을 다 상응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둘로 보질 않고 하나로서 다 작용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 몸 안에 들어 있는 곤충의 생명이나 내 큰 생명이나 둘이 아니죠, 하나하나가. 그러니까 겁낼 것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겁을 내기 때문에 일임해도 진짜 되질 않지, 겁을 내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믿는 게 되거든요. 진짜 자기 이 육신마저도 주인공에다가 내버리는 격이니까. 그러니까 거기다 던져라 던져라 하는 거죠. 몰락 던져라. 던지면 건져진다.
그러니 업보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자와 부가 둘이 아니고, 즉 말하자면 악과 선이 둘이 아니고 이게 전부 해말갛게 이렇게, 연기가 같이 돌아가는 것처럼, 에너지가 같이 돌아가는 것처럼, 구름이 같이 돌아가는 것처럼 이렇게 돌아가고 있거든요, 사람의 마음들이. 생각 내기 이전 마음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그거를 조절을 하는 거는, 빼 쓰고 잠그고 하는 거는 마음, 바로 지금 내는 마음, 이거죠. 그것을 조절하려면 나도 물질이기 때문에, 작용하는 그림자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참나에게 모든 걸 일임하는 거죠. ‘네가 형성시켰고 네가 움죽거리게 했고 네가 생각나게 하는 거니까 너 알아서 해라!’ 하고 탁 맡겨 버리세요. 그리고 요구하는 것도 거기다 요구를 하고요. 감사하는 것도 전체니까, 전체가 돌아가는 거니까 감사해도 거기 하나만 감사하면 전체가 다 감사를 주고받고 하는 것도 없이 우주간 법계에서도 다 상응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이론적으로 이것이 이렇다 이것이 이렇다 이런 거를 할 필요가 없는 거죠. 팔만대장경이 이 세상 돌아가는 진리인데, 어디서 또 찾겠습니까? 항상 날마다 보고 있는데. 불교가 따로 있고 생활이 따로 있어서는 절대 안 되죠. 불교가 생활이고 생활이 불교고 종교가 생활이니까. 내가 근본이고 내가 원인이 되고 내가 바로 화두고 나라는 존재가 있기에 모든 존재가 있는 거지,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모든 존재가 어딨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나 자신의 모두를 갖다가 포기하고, 포기하되 그냥 포기하는 게 아니라 자기 주인공에다가 모든 걸 포기해서 일임시켜라 이겁니다. 그러면 당신께서 형성시킨 거니까 기계를 하나 만들어 놨다면 기계 만든 사람이 더 잘 고치지 기계 안 만든 사람이 더 잘 고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 육신이 기계라면 기계 만든 사람한테 모든 걸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린 재밌는 공부 하는 겁니다, 이거.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병 증세라든가 이런 걸 가지고도 벌써 ‘아이쿠, 이건 고치지 못하는 병이라는데….’ 하면 벌써 그건 그렇게 빠른 게 아닙니다. 딱 벌써 이거 그냥…. 병원에서도 전체 10%라면 3% 밖에는 자기가 책정을 할 수 없답니다. 그러니깐 7%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고개를 꺄우뚱꺄우뚱하다가 자기가 의사로서의, 박사로서의 체면도 있죠. 그러니까 무슨 병이다 이러곤 내놓는다는 얘깁니다. 그런다면 우리같이 이렇게 공부한 사람이라면 그 무슨 병이다 그러더라도 ‘아이, 그까짓 거….’ 이렇게 하지만 딴 사람이 어디 그럽니까? ‘아이구, 이 병 걸렸으니 인제 큰일났구나! 시한부 인생이로구나!’ 하고선 낙담을 하고 마음으로써 그렇게 될 때 그 병이 그냥 그대로 되는 겁니다, 그 병이. 막바로 그 병이 그냥 되는 거예요. 이게 악성이다 이러더라도 ‘이거는 주인공이 다 해 놓은 거니까 악성이고 뭐고 나발이고 없다! 당신만이 할 수 있는 거다!’ 한다면 그냥 악성이고 뭐고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게 다 공부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공부 좀 할만한 사람들은요, 그냥 공부시키느라고 몸도 일부러 그냥 아프게도 허고 일부러 집안을 발칵 뒤집어도 놓고 이런다고요. 그러니 그 재료를 갖고 열심히 공부해 보세요.

과연 그게 기적이라 할 수 있을까요?
문 : 사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제 친구 하나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상대는 친구 맘 같지 않아나 봅니다. 글쎄 자기를 돌아보지도 않더랍니다. 근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더니 기적이 일어나서 그 사람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하는데 과연 그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답 : 기적이 아닙니다. 기적이라는 것도 자기가 해서 기적을 일으키는 거죠. 그럼 기적이 아니라 누구든지 다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남들이, 모르는 사람이 볼 땐 “참 너, 기적이구나!” 이러겠지만 내가 볼 때는 전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적이 아니다 이겁니다.
되는 것만 주인공이 한 거고, 되지 않는 거는 ‘아이구, 주인공이 이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러는 게 아니에요. 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다 그 근본을 믿고, 현재의 내 몸뚱이 ‘자(子)’는 내 근본 ‘부(父)’를 항상 믿으면, 그 부는 ‘항상 잘되는 거 안되는 것도 다 부가 하신 일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한다면 안됐다가도 다시 이렇게 돌아와서 잘되게끔 길을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르치기 위해서, 즉 말하자면 실험이라고 하기보다도 숙제입니다, 그게. 잘되는 것만 하나님이 해 주고 잘 안되는 것은 하나님이 안 해준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거는 오산이고 상당히 그건 빗나가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안되는 것도 그 주인공이 하는 거고, 되는 것도 주인공이 하는 거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없는 거는 ‘당신이 해 달라’고 고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는 또 ‘당신이 이렇게 하게 해서 감사하다’고 감사함을 청하고 이렇게 해서 항상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부와 자가 둘이 아니게끔 융합이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선 그걸 자기를 깨달아서 찾았다고 하는 거고, 찾아 가지고도 수없이 실험을 해서 그것을 자기가 포착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자기를 믿으라는데 자기는 안 믿고 만날 딴 데를 쳐다보고 믿고 딴 데를 생각하고 있고 그저 이름을 생각하고 있고, 말을 생각하고 있고…. 허공에다 그냥 그 이름만 가지고선 나를 구원해 달라고 백천 날 해 보세요, 그게 되나. 신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게 신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을 두고선 남의 신을 청하느라고, 남의 신이 대답하나요?
보세요. 생활들 하면서 남더러 나를 어떻게 해 달라고 하기 이전에 내 부모, 내 동기, 내 집안에서 상의를 해 가지고 도와주지, 바깥의 사람들이 자기를 도와줍디까? 무슨 큰 일이 나면 안에 들어와서 부모와 형제와 자식과 이렇게 통과를 해 가지고, 토의를 해 가지고 이거 돈이 들 거면 돈이 들고 잘되게 할 거면 잘되게 하고 이러지 아니, 저 바깥의 사람들하고 상의를 하고 합디까? 안으로 해요, 안으로! 조금 널리 생각하면 한 가정이지만 더 좁힌다면 나예요, 나! 나 속에 다 있는 거예요. 신이 제가끔 다 바로 어머니의 신, 여러분의 신 각각 있지만, 신은 체가 없는 거기 때문에 한데 돌아가고 있으니까 마음은 마음대로 통하게 돼 있어요.
내가 지극하게 어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람도 사랑 안 해요. 내가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도,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게 되는 거죠. 한쪽이 기울어지는데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게 바로 마음이에요. 마음내기 이전 그 무한의 포괄된 부의 마음, 그 부의 마음과 지금 현재 내 의식 자체의 마음과 둘이 아니게끔 하기 위해서 그 마음의 중요함을 아셔야 돼요.

마음의 여의주를 얻으려면
문 : 스님, 이 마음도리 알게 해 주셔서 너무도 감사드립니다. 저도 출가를 해서 공부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허락하질 않아 그냥 이렇게 스님 법문을 통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욕심이 많은 건가요? 반드시 금생에 이 마음의 여의주를 얻어 자유자재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 마음의 여의주를 얻을 수 있겠는지요?
답 : 자주 했던 얘깁니다만 예전에 내가 상원사에 있을 당시에 천도를 시키면 항상 시식을 지냈습니다. 큰 돌이 이렇게 쭉 놓여 있는데 거기다가 그 밥이나 시식음식을 놓으면 까치나 새나 뱀이나 두꺼비나 올라오기 어려운데도 다 올라와서 고개를 쳐들고 다 먹었습니다, 염불소리를 듣고. 그럴 때에 그냥 머리들을 이렇게 들고 모두 먹었는데 그 뱀 종류가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그 이듬해 이듬해에, 삼 년이 지나고 보니까 고개를 들고 먹으러 나오질 않아요. 그래서 가만히 돌 밑을 보니까 전부 허물을 벗은 겁니다. 전부 껍데기를 벗은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게, 하다못해 벌레들, 날아다니는 짐승들도 이 마음의 공부를 하는 짐승들이 있다 이 소립니다. 독사도 여러 질입니다. 독사가 새끼를 낳아 놓고 새끼한테 자기의 몸을 바치면서 새끼들이 클 때까지 그 몸을 먹고 자라게 하는가 하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새끼들을 뚝뚝 떨어뜨려 낳습니다, 잡아먹힐까 봐. 그러면서 내가 잡아먹히면 이 무명도 벗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그런 독사들처럼, 공부하는 독사들도 있다 이겁니다.
이것을 무심히 들어 넘길 게 아닙니다. 우린 살아생전에 무명을 벗길 수도 있고 무명을 씌울 수 있는 그런 원력도 있어야 벗길 수 있는 원력이 있는 거지, 무명을 씌울 수 있는 원력이 없다면 벗길 수 있는 원력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자유자재권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이 여의주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그렇게 모든 것을, 나를 죽이고 다 그 평등공법을 알고, 이 자비를 알고, 조건 없는 사랑을 줄 줄 알고, 나라는 것을 세우지 않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열쇠가 주어지지, 그리고 여의주가 주어지지, 아무나 주어져서 그냥 톡톡 때려서 모두 잘못되게 하거나 나쁘게 하거나 이런다면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할 수 없게끔 하기 위해서 여의주도 방편의 이름이지마는 여의주 아닌 여의주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을 표현할 때 열쇠라고 해도 됩니다. 아무나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또 그거는 못 얻는다 하더라도 선덕을 쌓아서 선업을 짓는다면, 그저 착하게 생각하고 그저 남과 나를 위해서 모두 선하게 착한 마음을 갖고 자꾸 착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하고 이런다면 그냥 선덕이 돼서 공덕이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스스로서 잘 이렇게 세세생생에 잘 나갈 수가 있다. 그래서 결국 끝내는 여의주를 얻을 수 있는 그런 결과가 된다 이런 말입니다.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문 : 얼마 전부터 절에 인연이 되어 다니고 있습니다. 근데 저의 아버지가 술만 마시고 들어오면 저의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합니다. 그런 모습을 어려서부터 봐 오면서 아버지에 대한 혐오감만 늘어 갔습니다. 대체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인연에 얽히게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답 : 죄가 있다고 생각하면 죄가 있다고 의식을 하고 ‘내가 죄가 있으니까 이렇게 살지.’ 하고 ‘이렇게 되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지없이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 자동적인 컴퓨터에 입력이 됩니다. 한 찰나죠!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을 가졌다면 그대로 그냥 될 것이고, 죄가 없으니깐 모두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한다면 그대로, 그대로 될 겁니다. 이 마음 하나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왜 하필이면 죄가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죄가 없다고 생각하시면 어떻습니까? 죄가 있다고 누가 말을 해 놨는진 모르겠지만 우리 스스로서 인간이기 때문에 그 죄를 안 지으려 하면 안 지을 수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자기가 지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공했단 말입니다. 자기가 한 사이가 없어요, 죄를 지은 사이가 없어요. 왜냐? 자동차가 말입니다, 부딪쳐서 찌그러졌는데 그 차가 잘못해서 사고가 났습니까? 어때요? 기름이 없으면 차가 안 간다고 그랬는데 안 가면 차가 잘못해서 안 가는 겁니까? 어디가 고장 났으면 차가 잘못해서 고장 났습니까? 이 모습은 차와 같아서 자기가 한 사이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를 들어서 나쁜 일을 하고도 내가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 그건 나쁜 일 한 게 그대로 입력이 되기 때문에 자기한테 어떤 시련이 오겠죠. 그러니까 그런 시련이 오지 않도록 그저 편안하게 요량 있게, 좀 현명하고 어디든지 대치할 수 있는 그런 자유스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죄가 있다 없다 하지 마시고요, 그냥 사는 대로 관하시면서 ‘너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꾸 관하세요.
어떠한 부당한 일이 있다. 예를 들면 엊그저께 회사를 잃고 어떤 남자가 울고 있는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더군요. 취직을 하려 해도 취직을 할 수가 없다고요. 그래서 가서 그렇게 관하고 살면 다 되는 수가 있다고 그냥 그렇게 보냈지 뭐를 어떡합니까? 뭐 이 도리를 금방 알려 줄 수도 없는 거고…. 그랬더니 편지로 전후사를 써서 보냈더군요. 난데없이 어느 친구를 오다가다 길에서 만나서 그 친구로 인해서 취직을 했다고요. 이것이 모두가 조그만 일 같지만 어떤 집들은 자손들이 서너 명씩 몸이 아프고 그런 사람들이 한 가정에 있으면 그 가정이 사는 겁니까, 그게?
하여간에 그런 도리 저런 도리 다 자기만이 할 수 있으며 또 구원을 청하는 것도 사람이 하기에 달렸죠. 마음을 같이 이렇게 내 주면 빠르고 혼자 하면 아직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어려울 테죠. 그러니깐 될 수 있으면 스님들한테 관하는 걸 요량 있게 배우고 또 가정 얘기도 이렇게 이렇게 이게 어려워서 그런다고 얘기도 하고, 이렇게 해 나가면서 서로 도우면서 사는 거죠, 뭐. 제가 가만히 생각할 때는 인생 살아나가는 것이 물 흘러 내려가듯 하니까 그냥 찰나찰나 화해서 자꾸 나투어서 그냥 그냥 돌아가요. 그러니까 내가 어느 때에 죄를 지었다, 어느 때에 잘못했다 이런 것도 없이 그냥 가게 되는 것은, ‘과거 나’와 ‘현재 나’가 둘 아니게 통해서 해 나간다면 정신계로나 물질계로나 외려 남을 사랑하고, 음으로나 양으로나 남을 이익하게 보시하고 이렇게 나가지, 그렇게 나쁜 일을 안 하게 돼 있죠. 저절로 안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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