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강 렬
극작가·한국문인협회 상임이사
모두들 희망찬 새해가 밝았다고 인사하기보다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를 걱정하며 새해를 맞는다. 문화예술 전공자들 역시 취업한파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실 지금껏 이 분야는 겉보기와는 달리 손꼽는 소수 사람만이 먹고 살 수 있을 뿐, 번번한 수입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매년 4년제 대학 문을 나서는 연극, 무용, 음악, 미술 등 순수예술 전공자만 해도 1만3000여 명이나 되고 인근 계열분야까지 포함하면 3만명이 넘는 졸업생이 한 해에 배출된다. 아무리 따져도 문화예술계에 1년에 3만명의 일자리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사정이 이런데도 대학들은 제각기 몸집 불리기 경쟁을 하느라고 신입생을 자꾸만 늘려 간다.
현실은 이런데도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문화예술을 중시하는 분위기는 점점 더 고조된다. 새뮤얼 헌팅턴이란 세계적인 석학의 <문화가 중요하다>란 책에는 “경제와 문화는 동반자적 관계에 있으므로 나라가 풍요로워지려면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 60억 인구에서 선진국을 비롯한 10억명 정도가 잘 사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문화적으로 앞섰기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경제와 문화가 밀월시대를 맞고 있는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이 점을 들어 취임사에서 “전통문화와 현대문화와 문화예술의 선진화가 함께 가야 경제적 풍요로 빛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문화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문화국가를 만들어야 하는 절대적인 의지의 표명이기에 우리는 이 말을 굳게 믿고 싶다. 문화예술이 경제발전과 함께 성취된다면 더 이상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꿈은 우리가 문화강국이 되는 것이다. 과거 정부 때마다 많은 정치가들이 문화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지금껏 원론에 머물고 있음은 무엇 때문일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작금의 경제 난국에서도 우선순위는 경제다. 맞는 말이다. 잘 살아야 문화도 발전하며 예술작품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잘사는 기준이 무엇인가? 그것은 돈으로 따질 수도 있고, 좋은 집 넉넉한 환경을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의 질이 그것으로만 기준이 될 수 있을까. 허기져도 정신적으로는 풍요롭고 아름답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도 많다. 한편으로 우리가 살던 힘겨운 시대에 창작된 작품들이 훌륭한 예술품으로 역사에 오래 기억되기도 한다. 잘 살아야 예술을 향수할 수 있고, 못 살면 예술도 즐길 수 없다면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황폐할까. 이치가 이런데도 지금의 정부까지 경제가 잘 풀려야 예술정책도 잘 될 것이란 말을 공공연히 한다.
밥을 굶는 창작예술인들을 도와야 한다고 여러 가지 제안을 내놓아도 누구하나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는 세상, 국회의사당 출입문을 망치로 부수고 전기톱으로 잘라내도 벌 받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다. 부서진 것들을 수리하려면 또 얼마나 많은 돈을 허비할 것이며, 그런 예산은 펑펑 써도 괜찮은 나라에 살면서 창작예술의 환경을 고쳐달라고 애원해도 누구하나 귀담아 들어주는 이가 없다. 생계를 걱정해야하는 많은 가난한 예술인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실타래처럼 엉킨 것이 우리네 삶이라 하지만 모든 질서에는 원칙과 기준이 있다. 그럼에도 작금의 민의의 전당은 고깃덩어리를 문 사냥개가 으르렁거리듯이 격한 소통부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옹다옹한다. 이 모든 것이 초발심을 잊어버린, 근본에 충실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120만 명이 넘는다는 우리나라의 예술인들은 모두 점잖아서 남부끄러운 일에는 고개를 돌리는지 모르지만 정말 딱한 것은 우리 예술인들이다. 고통스럽고 험난한 길을 가면서도 입을 다무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어려운 예술인에 대한 지원정책도 하루빨리 선행됐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