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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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무조건 자기 불성인 주인공을 믿고 거기다 놓으세요!
놓으라고 한 이유는 직결 들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춥든 덥든
구름 지나가듯
하는 것이
한 철 인생입니다

그런데 한 철을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생각을 하고
행동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오늘은 날이 따뜻해서 같이 한자리 하는 마음이 좀 편안합니다. 날이 추울 때는 마음이 상당히 안됐었는데요. 그러나 춥든 덥든 구름 지나가듯 하는 것이 한 철 인생살이입니다. 그런데 한 철을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지내느냐, 어떻게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을 하느냐가 큰 문제입니다.
지난번에, 옛날에는 선지식들이 소에다 비유를 하고 코끼리에다 비유를 해서 ‘첫 번째는 입에다 재갈을 물리고, 두 번째는 밥을 굶기고, 세 번째는 몽둥이질을 한다’고 얘기를 했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 보세요. 처음에 왔을 때는 소고삐를 쥘 양으로 거선을 하다가, 나중에는 소고삐를 쥐고, 그렇게 해서 자기가 말을 삼가서 하고 말을 걸러서 하고, 항상 남을 섭섭지 않게 하고 남을 아프게 하지 않으면서, 일체를 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안으로 항상 내면의 자불(自佛)을 쥐고서 가는 거와 같은 겁니다. 소고삐라는 건 자기의 그 인연줄, 즉 말하자면 바로 자기의 근본자리의 줄이라고 할 수 있죠. 그것이 고삐로도 비유가 되고 그럽니다.
또 ‘두 번째, 배가 고파도 밥을 주지 않는다.’ 이런 뜻은 자기가 자기를, 아무거나 집어 먹지 못하게 다스리는 겁니다. 먹는 걸로 말하는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일체를 그저 되나 안 되나, 먹을 건지 안 먹을 건지 모르고 그냥 먹는 사람은 걸리게 마련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밥을 아무거나 먹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밥을 굶긴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채찍질을 한다.’ 이러는 건 예를 들어서, 내 마음의 길이 잘못 들어지면 사기도 치고 도둑질도 하고 또 남을 아프게도 하고 그러죠. 그래서 소로 비유를 해서, 옛날에는 소가 남의 밭에 들어가서 짓이겨 놓으면 남에게 여간 해를 주지 않는다 해서 다스리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세상이 이렇게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지금은 소로 비유한다면 너무 거리가 멀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그렇게 자기를 다스리면서 남한테 해롭지 않게 하고 남한테 아프지 않게 하는 모두가 다 계율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이 보시입니다. 그리고 잘못하지 말라고 하는 것만이 계가 아니라 잘하라는 것도 계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체가 모든 것을 해 나가는 데는, 그렇게 자기를 자기가 완성시키기 위해서 길을 걷는 데는…, 예를 들어서 과거를 모르면 현실을 보고, 미래를 모르걸랑은 또 바로 현실을 보라고 그랬습니다. 그거와 마찬가지로 이 공부라는 것이 상당히 밀접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안 하고는 안 됩니다. 이것은 내가 그냥 개별적으로, 내 마음으로 그냥 말하는 게 아니라 진리인 것입니다.
어떨 때에는 여러분한테 할 말이 아주 많은데 와서 앉으면 할 말이 없어요. 왜 그렇죠? 여러분이 공부가 좀 되신 것 같아요. 우리가 둘이 아닌 도리를 여직껏 공부를 하면서 걸어왔죠. 둘이 아닌 도리만 알면 그 뜻도 아실 거예요. 옛날 남전 스님이 고양이 죽인 일입니다. 서당 동당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가지고 싸움을 하니까 남전 스님이 그것을 딱 쥐고선 “말대답을 해라. 무슨 연고로다가 그렇게 싸우는 건지, 또 무슨 이유로다가 고양이 하나를 놓고 싸우는지. 만약에 너희가 대답을 할 것 같으면 이 고양이를 살리고 대답을 못할 것 같으면 고양이는 죽는다.” 이랬더래요. 여러분이 아마 다 잘 아실 거예요. 그런데 아시긴 하는데, 그게 왜 그렇게…. 그래 말대답을 못하니까 죽였죠! 죽였는데 나중에 조주 스님이 들어와서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냥 얼른 신발을 벗어서 머리 위에 이고 팽등같이 달아나가거든요. 무슨 까닭에 신발을 벗어서 한 짝을 머리에다가 이고서 나갔는가 하는 겁니다.
둘이 아닌 도리를 여러 해 동안 공부하신 분들은 그 둘이 아닌 도리만 알면 그것은 알 수 있는 거죠. 물론 말로 해서도 아니 되지만 뜻으로 다 알고 말 없이도 대답할 수 있죠. 조주 스님이 왜 짚신 한 짝을 벗어서 머리에다 이고 나갔겠습니까? 힌트는 말입니다, 죽인 남전 스님도 죽인 사이가 없고, 고양이도 죽은 사이가 없고…. 왜 짚신을 벗어서 이고 나갔을까? 지금 이 공부는 자기 자완성입니다. 수없이 말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건 말로 듣는다면 말로 떨어지고 말아 버립니다. 그 말이 말이 아닌 바로 자기의…, 모두 각자에게 다 들어 있습니다. 자기와 나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내가 말한 것도 둘이 아니게 들을 수가 있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 여러분 다 아시죠? ‘달마 대사는 왜 수염이 없는가?’ 하는 도리요. 여기서 마음공부 하신 분들은 대충 헤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수염이 없다고 왜 그랬을까요? 무슨 까닭에 그랬을까요? 그건 입으로 말을 안 하고도 대답을 할 수 있을 텐데요. 또 입으로 말을 해서 대답을 하면 어폐가 되고 도루묵이 되죠. 이 공부를 할 때에도 그렇지만 이 말을 하는 것도 말장난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한 학인이 어느 스님한테 물었더랍니다. “어떡하면 깨칠 수 있겠습니까?” 하고요. 그러니까 그 스님 대답이 “본래 귀신 방귀씨는 너한테 심어져 있느니라. 그러니 기르기만 잘 기르면 되지 않겠니?” 했단 말입니다. “어떻게 기르면 잘 기르겠습니까?” 하니까, “귀신 방귀씨니까 귀신 방귀털을 더 먹이지도 말고 덜 먹이지도 말고 그 가운데서 먹이면 되느니라.”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있고 못 알아듣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못 알아듣는 사람은 허탕을 하고 알아듣는 사람은 알아들어서 이루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체가 없어서 귀신 방귀털이라고 해도 되고 귀신 방귀라고 해도 되죠. 그건 말 붙이기에 달려 있으니까요. 말을 해서 오히려 잘못될까 봐 말씀들을 안 하셔서 그렇지, 말대답 하실 분이 그득한데 어째 말대답이 없습니까? 오히려 그르칠까 봐 안 하시겠죠.
‘조주 스님이 짚신 한 짝을 머리 위에 이고 삥하니 나갔다.’ 우리가 항상 공부하는 소리가 거기 깃들어져 있습니다. 우리 공부하는 이치가 거기에 다 있습니다.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분다.’ 이런 소리 다들 아시죠? 내 이 내면세계에는 수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자기를 형성시키고 자기를 진화시킨 장본인이 있거든요. 그런데 쥐려야 쥘 것도 없고 보려야 볼 수도 없고 또는 꿰려야 꿸 수도 없는 거죠. 단지 그거는 자기만이 아는 거죠. 그래서 그것이 상봉이 된다면 이 몸속에 있는 의식들을 다 조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 여러분의 몸속에는 생명체들이 많아서 그걸 중생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비유를 할 때도, 중생들이 배를 타고 가는데 그랬다는 얘기 많이 하죠. 선장한테다 맡기지 않고 항상 자기가 ‘관세음보살’ 이름만 들입다 부르고 온통 난리가 나니까 배가 뒤집히더라는 얘기요.
‘그런 거와 같이 우리 몸뚱이 속에는 생명체들이 많은데, 우리 몸은 집과 같고 배와 같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 마음에 의해서 꼭 같이 닮아 주느냐는 얘기죠. 같이 흡수가 되느냐, 같이 공심으로 되느냐 이런 문제예요. 그게 공심이 되지 않는다면 조복을 받을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 현실로 봐서도 이게 딴 데서 들어온 세균이면 싸움이 납니다. 또 안에서도 분쟁이 일어나면 싸움이 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선 화합을 제일로 쳤습니다. 화합! 그래서 내 몸뚱이 안에서 화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조복을 받지 못한다는 얘기죠.
‘내 몸뚱이 속에 있는 그 의식들은 인연의 줄로 인해서, 인연으로 인해서 만난 인연들이거든요. 과거로부터 인연 지은 것을 반연이라고 그러죠. 그렇게 인연을 지어서 왔는데 본래 근본은 말이 없죠.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본래 근본은 그렇게 작당을 하지도 않고 말이 없고 남한테 억울하게도 안 하는 그런 겁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의식들이 자기가 지은 인연대로 자꾸 말을 하게 하고, 속에서 분쟁이 일어나게 하고, 싸우게 만들고 이러거든요. 이 몸속에서 생명의 의식들이 그 마음을 통해서 그렇게 못살게 한단 말입니다. 물론 좋게 이끌어서 말하게 할 수도 있지만 나쁘게도 많이 이끌죠. 반 이상이요. 그러니까 그것을 둘로 보지 않았을 때에 조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여러분한테 이끌어 주는 것은, 뭐 ‘달마 대사의 수염이 왜 없느냐?’ ‘돌장승이 왜 눈물을 흘리느냐?’ 하는 얘기들은 통 하지 않고, 그냥 무조건 그대로 자기 불성인 주인공을 믿고 모든 걸 거기다 놓아라 이랬습니다. 그렇게 놓으라고 한 이유는 직결 들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스님네들이 화두, 화두 하시는데,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온 게 화두입니다. 다른 게 없어요. 내가 나온 게 화두인데 남한테 화두를 또 받아요? 내가 나온 게 화두이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상대가 있고 세상이 벌어졌고 모두가 있는 거지, 내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항상 그 소리는 하고 있죠. 그런데 내 마음 이 자체를 다스린다 하는 것은 일체를 주인공에 놓는 거죠. 다 그렇게 놓고 가다 보면 그냥 그대로 저절로…. 그렇게 하다가 보면 언젠가는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일은 일대로 하게 됩니다. 일을 안 하면서도 해요. 함이 없이 일을 해요.
지금 과학이 발전이 되고 그래서 전화도 있고 뭐니 뭐니 하면서 편리하게 다 쓰죠. 그러니까 아쉬운 게 없죠. 그런데 난리가 나서 전기도 없어지고 다 없어졌을 때,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때는 그거 들고 다닐 수도 없어요. 들고 다녀 봤자고요. 또 아닌 밤중에 자기라든가 자기 식구가 어떻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어디를 찾아다니면서 누구한테 구원해 달라고 하겠습니까? 시급한 문제죠.
이 나 하나의 마음이, 즉 말하자면 ‘이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끔 말씀드리죠.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둘로 보지 않는 분들은 그것을 퍼뜩 알아낼 수 있죠, 그냥 자연스럽게. 내가 있으니까 일체 만법이 다 갖추어졌다는 겁니다. 내가 없으면 무효예요.
그래서 내 몸속에 들어 있는 이 중생들을 조복을 받게 되면 이게 보살의 역할을 합니다. 전부 보살 역할을 하고 또 그 보살의 개수가 모자란다 하면 똑같은 보살을 수없이 만들 수도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 그 마음이 그렇게 커서 이 허공에 꽉 차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마음이라는 건 한계가 없는 거죠. 그래서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나가면서 닥쳐오는 대로 해결을 하지 어떻게 ‘요거는 닥쳐올 테니까 요걸 요렇게 하고, 저거는 안 닥쳐올 테니까, 기쁜 일이니까 저렇게 하고….’ 그러면서 삽니까? 시시각각 닥쳐오는 대로 우리가 해결하고 나가죠. 그런데 부처님 법이기 이전에 우리들의 법은 닥쳐오는 대로 우리가 해결사가 돼야 됩니다.
잘되는 것만 잘되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자기가 길을 걷다가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고 합시다. 그런데 ‘부처님이 계시다면 왜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가게 해서 나가질 못하게 만들어 놓을까?’ 이렇게 생각하시겠지만 그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 보지 않았으면 사람이 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 몇천만 원을 들여서 공부한 것보다도 더 많은 지혜를 얻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안 되고 되는 거를 공부시키는 게 아니라, 안 되고 되고 하는 것을 자기가 해 나가다가, 즉 말하자면 자기가 구렁텅이에 빠질 때 잠깐 붙들어 주는 겁니다. 이래야 공부를 할 때 부딪침과 감각, 촉각, 시각, 미각이나 이런 여섯 가지 모두를 다 자기가 동시에 느끼면서 해결을 하죠.
이 몸속에 있는 모습들을 본다면 조그마하니까 하등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들 하시겠지만, 그게 만약에 이렇게 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를 꺼내 놓았는데 크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징그럽고 무섭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거를 다 거쳐 나왔단 말입니다. 그게 거친 인연들이에요. 우리가 한때는 그 모습을 가지고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다 보면 자꾸자꾸 지혜가 생기고 회개를 하게 되고 또 건너뛰게 되고 이렇게 하죠. 그런데 저 아래 축생들은 그냥 먹고 살기 급해서, 그렇게 먹고 사는 것만 알지 한 번쯤 그런 것을 생각해 볼 여유가 없다는 얘기죠. 그래도 사람은 고등 동물이기 때문에 부처 될 가능성이 99%다, 이런 말을 하죠. 그럼 똑같이 부처가 있는데 왜 그러면 이렇게 사단이 많으냐? 똑같이 부처라 하더라도, 뿌리는 같으나 모습이 다르고, 하는 차원이 모두 다르고, 살아나온 기술이 다르고, 모든 게 자기의 습대로 하고들 산단 말입니다. 과거로부터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서 현실에 가지고 나왔으니까요. 모습도, 삶도, 또 권세도 다 가지고 나오거든요. 가지고 나와서 살고 있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내가 벗어날 수가 없죠. 그러나 벗어난다는 말조차 없이 그대로 내 몸에서 이 모든 생명들을 둘 아니게 조복을 받는다면, 내가 마음대로 마음을 내는 대로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라도 이 보살이 응신(應身)으로 화(化)해서 모든 걸 이익하게 해 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거를 생각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완성을 하면 이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생명들이 자기가 스스로 벌써, 모두 부하가 되는 거나 마찬가지죠.
여래의 마음은 공심(共心)이다. 여래의 몸은, 즉 말하자면 공체(共體)다. 공체기 때문에 크죠. 여러분이 볼 때는 사람 하나지만 공체이기 때문에 크단 말입니다. 그리고 공용(共用)을 한단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안에서도 공용이요, 바깥에서도 공용입니다. 이런 얘기 곧잘 하죠. 우리가 물을 한 그릇 먹었다고 하면, 이것을 내가 먹은 겁니까? 이건 내가 먹은 게 아니라 여기서 목마르다고 달라고 그래서 준 거예요. 줬는데, 준 사람만 먹는 게 아니라 전부 다 같이 나눠 먹죠. 이 공부하는 사람들의 의식들이 이렇게 나눠 먹게 된 동기를 알게 되면 동시에 그냥 한마음이 돼 주죠. 지나가다 보면 하다못해 소나무도 말을 하고 돌도 말을 하는데, 이 속에 의식들이 얼마나 빠릅니까.
그러니까 이 물을 남이 볼 때는 나 혼자 먹었어요. 그런데 먹은 사이가 없다. 이 물은 내가 먹은 사이가 없이 더불어 같이 공식(共食)을 했다 이런 뜻이 나오죠. 공식을 하고 있다. 그런데 먹는 것만 공식이 아니라 이 모든 거, 돈 벌고 이렇게 하는 것이 모두 공식입니다, 그게. 같이 움죽거리죠, 이 몸도. 지금 자기가 그냥 보고 듣고 이렇게 움죽거렸다 하시는 분들도 있겠죠. 그러나 아닙니다. 그건 모든 부서에서 작용을 해 주기 때문에 움죽거리는 겁니다. 어느 한 부서에서만 움죽거려 주지 않아도 그냥 폐인이 돼 버리고 말죠. 모두가 그렇게 움죽거려 주는 걸, 본래 그렇게 움죽거려 주고 같이 해 주고 있는데,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얍삽해서 이거를 죄다 가르는 거죠. 자기 자불이 그렇게 있고 자불로 하여금 마음이 의식하고 통해서 같이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이 그렇게 해 주질 않으니까 같이 조복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냥 자기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인연 받은 대로 그냥 하는 거죠.
그러니까 운명이나 팔자나 이런 거를 면할 수가 없다 이러는데, 이 공부는 팔자 운명도 없고 고(苦)도 없다, 이렇게 나오죠. 고라는 건 집착만 없으면 모든 게 없어요. 집착! 집착을 하려고 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이거는 물을 먹었으니까, 내가 물을 줬으니까 저 물 대신 뭐가 오겠지.’ 하는 이런 집착, 또 ‘내가 해 줬으니까 좋게 되겠지.’ 하는 집착, ‘부처님한테 뭐를 놓았으니까 뭐가 오겠지.’ 하는 이런 집착, 이런 집착들이 모두 자기를 멸(滅)하게 못해 주는 겁니다. 어차피 물을 한 그릇 떠다가 부처님한테 놓았으면,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부처님한테 놓았다 하면, 뭐 몇 억을 갖다 놓았다 하더라도 한 사이 없이 했다면 그것이 그냥 그대로죠, 그냥. 그러니 돈보다도 수없는 이 허공을 다 준대도 가볍게 받을 수 있는 그런 조건이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준 거 생각을 하거든요.
그리고 어떠한 일이 생기더라도 왜 집착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몇 알갱이나 산다고 집착을 합니까. 그리고 미워하고, ‘너로 인해서 망했다’ 이러고…. 간혹 ‘너로 인해서 흥했다’ 이럴 수도 있죠. 그것도 집착입니다. 모두가 집착이에요. 그래서 고·집·멸·도 아닙니까? 고라는 거는 이름이에요. 고라는 것은 집착이 없다면 멸한다 이런 뜻이에요. 멸하면 도다 이거예요. 간편하죠, 아주. 우리가 이렇게 해도 여기 걸어서 들어올 때 내 발자국을 짊어지고 들어오지 않았다는 얘기죠.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지는데 왜 없어진 그 발자국에 집착하느냐. 없어진 발자국에 집착을 하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 살면서 그냥 ‘요거는 요게 잘못됐는데’ ‘이런 게 잘못됐다’ ‘이건 정말 날 무시하고 이렇게 이렇게 됐다’ 이런 생각이 들면 그게 영 없어지지 않죠. 없어지질 않는 그것이 집착이에요. 무상하게 살면 안 되나요? 우리가 ‘이것도 한 발자국 떼어 놓는 거와 같구나. 이것도 그런 거지, 뭐. 살다 보면 그런 거지.’ 그러면서 그저 이해해 주는 그런 마음…. 내 마음으로 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남의 마음을 살펴 주는 그런 마음이라야만 되죠. 나쁘다 좋다를 떠나서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 미생물에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불쌍하지 않은 게 없어요. 어디를 들여다봐도 다 불쌍해요. 측은하고 불쌍하고 그건 말로 할 수가 없어요. 잘 먹고 잘산다 하는 집을 들여다봐도 불쌍해요. 그 속에는 가난한 사람이 가난해서 가지고 있는 아픔보다도 더 아픈 게 들어 있더라고요. 그러니 어느 사람치고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죠. 그래서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불쌍하게 살지 말라 이거죠. 한 철이라는 얘기죠. 발자국을 잘 떼어 놓는다 해도 한 철, 못 떼어 놓는다 해도 한 철이고 한 찰나죠. 그래서 남하고 속으로 말다툼을 해서 마음이 아프다 하더라도 ‘야,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은 무슨 연고가 있기에 그랬겠지.’ 하고 지혜롭게 마음을 써 주고 지혜롭게 내 주는 그 마음을 갖는다면 풀잎 하나도 나를 옹호하지 않는 풀잎이 없을 거예요, 아마. 모두가 친구고 모두가 벗이죠.
생명들을 내 생명같이 생각하고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내 모습같이 생각하고 내 부모같이 생각하고, 내 자식같이 생각하고 내 형제같이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수억겁을 거치면서 이렇게 굴러온 거니까요. 그렇게 왔으니까요. 줄창 그런 말을 하지만, 따지고 본다면 우리가 한 철을 이 몸속에 들어 있는 그 모습들처럼 살 때도 바로 부모가 있었고 자식이 있었어요. 그 아픈 것은 똑같아요. 사람이 아파하는 거나 짐승이 아파하는 거나 미생물이 아파하는 거나….
그래서 구르고 구르면서 진화하고 형성되고 한 그 자체가 바로 근본이에요. 그 근본이 바로 지금 자기를 리드해 가고 이끌어 주고 가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모르는 척 그냥 자기가 한다고 하니까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거죠. 예를 들어서, 자식이 자기가 산다고 하고, 자기가 제일 잘한다고 하고 날뛰고 그런다면 부모도 어쩔 수가 없는 거죠. 그냥 내버려 두는 거죠, 철날 때까지. 그와 같습니다, 이 마음 도리도. 얼마나 묘한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저는 옛날에 밤중에 많이 다녔어요, 산에. 그런데 그때 다닐 때도 산이든 들이든 물이든 뭐 그런 거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여러분처럼 학식이 충분하다면 그렇게 돌아다니지 않고도 알았을는지 모르죠. 그런데 모르니까 실질적으로 그냥 행동으로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스승이 처음에는 나한테 있다가, 둘이 아니게 되면 그냥 하나가 되죠, 둘이 됐다가. 그래서 둘이 됐다가 하나가 됐다가, 둘이 됐다가 하나가 됐다 이렇게 하는 것은 혼자 있다가 누구를 만나면 둘이 되는데, 순간에 하나로 이어져 버리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악한 거든지 선한 거든지 이어지는 반면에 문제가 생기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마음공부 하는 사람은 악하게 인연을 잇지 말라고 하는 거죠. 그건 왜냐하면 전자에 미생물에서부터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왔는데, 지금 와서 턱 보니까 내 부모 안됐던 분이 하나도 없고 내 자식 안됐던 게 하나도 없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나와 보니까 이 세상에 일체 만물만생이 내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더라는 거죠. 만물이 다 스승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내가 ‘너 때문에 내가 망했다. 또 네가 속이 좁게 나를 이렇게 무시하니까 너에게 맛 좀 보이겠다. 그걸 꼭 갚겠다. 악의로 갚겠다.’ 이런 마음을 갖겠습니까? 그게 모두가 내 부모 내 자식 내 형제라면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돌아가면서…, 그래서 육도윤회라는 것도 있죠.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인, 즉 하늘 사람, 이렇게 치는데 지옥은, 지금 현재 갇혀 있는 사람들 보세요. 감옥소에 갇혀 있죠? 그런데 지옥이 없습니까, 어디 지금? 여기 이 시대에 있지. 그리고 아귀는요, 땅속에서 사는 지렁이도 보면 입은 요만한데 몸은 커서 먹기는 먹어야 할 텐데 하루 종일 먹어도 양이 차질 않는 거예요. 땅 속에서 사는 그런 것들이 전부 아귀예요, 그게. 우리가 말로 아귀 축생 뭐, 귀신 이런다고 해서 말로만 있는 게 아니죠. 그리고 영령들도 사람들처럼 저렇게 갇혀서 지옥고를 겪죠. 그래서 ‘국내 밥내도 못 맡는다’ 이런 말이 있죠. 국 냄새 밥 냄새도 못 맡는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개같이 살았으면 개로 떨어진다고 하죠. 그런데 축생들도 보세요. 사람하고 축생하고 같이 살면서 자꾸 윤회하면서 돌아가죠.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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