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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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내면에다 몽땅 놓으세요! 몽땅 맡기고 사세요!
여러분을 버리지 않는다면 얻을 바가 없습니다

하나하나를
거기서 하고 거기서 들고
나고 들고 한다는 걸 알게 되면
그냥 그대로
자기 내면에 놔버리게 됩니다!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어

인터넷을 통해 큰스님 법문을 접하게 됐습니다. 요즘 경제가 어렵다 보니 저의 집안 형편도 어려운데다 회사에서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아이들까지 저를 힘들게 합니다.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요. 이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요?

사람이 좀 너그럽게 사세요. 모든 게 다 네 거 내 거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 마음먹기에 달려 있고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는 거고 나눠 먹을 수 있는 것도 무에서 유로 나오는 거지, 유에서 무로 들어가는 거는 우리가 없어지는 걸 말하는 거죠. 그래서 무에서 유로 창조를 해낸다 이런 뜻이죠. 이런 공부는 정말이지 하기 쉬우면서도 만나기가 어렵다 이런 뜻이에요. 하다가 또 ‘이거 안 되는데 뭘 그렇게까지….’ ‘아무리 해도 안 되는데, 뭐.’ 하고선 자기가 자기를 무시해요. 절대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죽는 것도 네가 죽게 한다면 죽는 거고, 네가 형성 시켰으니까 살리는 것도 너고 죽이는 것도 너니까 너 알아서 해.’ 그러면 책임이 있죠. 책임을 져야죠. 자기가 책임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다 이름만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것을 공부하는 계기로 삼아서 자기한테 물어보세요. 하나하나 작은 거든지 큰 거든지, 앞에 닥친 거는 뭐든지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또 아픈 사람은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어.’ 그러면 금방 보살이 응신으로 화해요. 응해 주는 화신으로 화해요. 화해서 응해 준단 말입니다. 그 마음에서 나가는 이름이 보살이거든요, 마음에서 나가는 게. 그래서 법당에 부처님 한 분을 모셔 놓고 양 옆에 문수보살 모셔 놓고 보현보살 모셔 놨죠, 세 분. 이렇게 모셔 놓은 데가 많이 있어요.
근데 그것이 왜 그렇게 했느냐. 여러분 한 분이 말이에요, 아무 생각을 안 하면 부처고 생각을 냈다 하면 문수고 법신이에요. 그리고 움죽거렸다 하면 보현이거든요. 그러면 여러분 중에 제각기 한 분이 다 부처 문수 보현 다 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삼보에 귀의해라.’ 이러는 거는 자삼보에 귀의해라. 자삼보에, 각자. 부처님의 이름을 따라다니거나 부처님의 형상을 따라다닌다면 그것은 무모한 짓이에요. 백년 천년 만년이 가도 그 부처님의 진의를 모르고 자기의 진의를 모를 거예요. 애들이 좀 괴팍하고 안됐다 하더라도 걔한테 관해라, 뭐 어쩌라 이러면 오히려 더 안 듣게 되죠. 여기다 놓고 ‘그렇지 않게 너만이 할 수 있어. 주인공은 둘이 아닌 까닭에 너만이 할 수 있잖아.’ 그러면 거기 주인공이 듣는단 말이에요. 알아듣겠어요?
그렇게 해서 차차로 착해지고 성숙해지고 아주 좋은 사람으로 뒤바뀌죠. 사람을 고정되게 너는 요렇다 하고 못박질 마세요. 할 수도 있고 잘하던 사람이 잘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돈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있는 것도 아니에요. 돈이 없는 사람도 항상 없는 게 아니고요. 항상 바꿔서 돌아가죠. 그러니까 억울하게 생각지 마세요, 가난하다고. 우리가 가난해 보지 않는다면 너그러워질 수가 없죠. 가난을 모르니까, 예를 들어서 가난해 보지 않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진의를 모르거든요. 그리고 다리가 아파 보지 않는 사람은 남의 다리 아픈 것도 아픈가 보다 그렇게 하지 진실하게 그렇게 마음이 돌아가지 않아요. 저 마음이 얼마나 귀찮고 괴로울까 이런 생각 안 해요. 자기가 아파 보지 않아서도 그렇고 살아 보지 않아서도 그렇고 모두 해 보지 않던 거는 우리가 다 그렇죠.
저는요, 돌 하나를 봐도 스승으로 여기지 않았던 예가 없어요. 그리고 물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다가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응, 이게 평등이구나. 어떤 파도가 치고 어떤 똥물, 구정물이 들어와도 바다는 바다로구나. 그런데 바람이 불어 파도를 일으키면 우리의 마음이 일어나는 거지 그게 물이 바다가 아닐 수는 없거든요. 파도를 쳐도 바다지. 그러니까 여러분이 자신으로서 한번 실천해 보시고 경험해 보시고 그 진의를 하나하나 이렇게 체험해 보세요.
어떤 분들은 그러죠. 많이 체험을 해서 아주 슬기롭게 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안되는 거예요, 그게. 근데 안되는 원인이, 중학교 다녔으니까 이제 고등학교로 올라가라 이런 뜻인데, 이게 되는 것만 진리가 아니라 안되는 것도 진리다 이겁니다. 안되는 것도 알아야 되는 것을 잘 이끌어 나갈 수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그 안되는 걸 ‘안되는 것도 너가 하는 거니까 알아서 되게 하는 것도 너다.’ 그러고 그냥 태평하게, 안되면 ‘안되는 것도 너가 하는 거니까 알아서 해!’ 하고 ‘그걸 가르치려고 하니깐 고마워.’ 이러고 하면 그냥 알았으니깐 단박 돌아가는데, 이걸 모르면 그냥 오래 갑니다. 빨리 알아채면 그냥 빨리 확 돌아가 버리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벗어나야 우리를 마음대로 굴릴 수가 있고 우리 생명체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조복을 받아야 내 마음대로 어디가 아프면 ‘아프게 해서 되니? 안되잖아!’ 이러면 금방 그냥 돌아가고 이러죠. 그뿐이 아니에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저거를 어떡하면 좋지?’ 할 때 이 안의 의식들이요, 얼른 쉽게 말하자면 원자에서 입자가 다 나가서 해결하듯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경우는 어떻다 어떻다 말로는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아시길 바랍니다. 내가 여러분 하소연을 다 들어 드렸으면 참 좋겠지만 그것이 도의 길을 이루는 데는 오히려 더딘 거죠.
그러니까 편안하게 마음을 가지고 못사는 거 억울하다 생각을 가지지 마시고, 잘못돼도 ‘딴 사람으로 인해서 우리가 망했다.’ 이런 생각 마시고 그냥 그저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그냥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이렇게 하세요. 그거 명심하세요. 모두가 여러분의 마음으로서 개척을 해 나갈 수 있는 거니까 말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게 고인가요?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게 고인가요? 한동안은 두통이 심해서 스님 말씀 믿고 관하였더니 통증이 점점 사라졌습니다. 근데 얼마 전서부터는 또 온 몸 이곳 저곳에서 통증이 느껴지는데 병원에서는 뚜렷한 병명 없이 신경성이라고만 하니 그저 답답할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병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예전에 “부처님은 한 부처님이지만 절에 사람이 없으면 부처가 없느니라.” 하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이 뭐냐 하면 그 마음과 마음을 전달하고 둘이 아니게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갈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병도 놔 버릴 수 있다고 그랬습니다.
병이란 것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 몸뚱이에는 이 부분 부분을 다 맡아서 하는 공장장이 있습니다. 아시죠? 오장 육부에 전부 공장장이 있다고요. 그런데 내 마음이 모든 걸, 공에서 나오는 거,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는 다 주인공에다가 맡겨 놨을 때 그 공장장들은 자기한테다 열쇠를 맡기니까 자기네들이 도둑 안 맞고 공장이 잘 돌아가게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다 맡긴단 말입니다. 다 맡겨 놓으니까 술술 잘 돌아가거든요.
그런데 여러분은 ‘야, 이게 이렇게 병이 심하니까 오래 가겠지. 이게 한 달이 걸리겠지. 또는 두 달이 걸리겠지. 많이 좀 좋아지면 차차 낫겠지.’ 이렇게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왜 거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갑니까? ‘어, 그냥 나을 거다.’ 이렇게 믿어 버린다면 시간도 정망할 것도 없고 날짜도 정망할 것도 없고 달수도 정망할 것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그 또한 여러분을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 여러분 자체가 여러분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거지 그게 정말 아파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 그 주인공에다 ‘내가 당신이 그런 거 알았어. 당신이 나 공부시키려고 이랬지?’ 하고선 당신 주인공에다가 그냥 깊숙이 ‘아! 당신이 나 공부시키려고 그런 거 내가 알고 있으니까 이제 낫겠다.’ 이런 생각을 하시면서 감사하게 생각하시고 처음에 머리 아팠을 때 그랬던 것처럼 계속 물러서지 말고 공부해 보세요. 아시겠죠?

대상을 정해 놓고 기도해도 되는지

없는 마음을 찾으라고 하시는데 없는 마음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감이 오지를 않습니다. 차라리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어느 대상을 정해 놓고 기도를 한다면 더 집중도 되고 성취감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우리는 누구나 에너지통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깥으로 관세음보살이니 문수보살이니 모두 각자 이렇게 추구하고 구원을 받으려고 애쓰고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안에서 그 에너지통, 삼각형으로 된 에너지통을 내가 확신하면서 거기에서 모든 것을 들이고 낼 줄 안다면 이게 스스로서 둥그러진단 말입니다, 전체가. 소공에서 대공으로 가는 거죠.
그러면 우리가 삼보에 귀의한다 이러는 것도 그 삼각형의 그 에너지통에 귀의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이 실상 자체와 더불어 내 마음, 이 분별하는 마음과 이 육신과 삼합이 한데 합쳐진 삼각형이거든요, 이게. 그러니까 여러분이 다 그 삼각형의 에너지통입니다, 지금. 그런데도 바깥에서 구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으냐 이겁니다. 안에다가 코드를 꽂고 안에서 구원을 받게끔 하고, 감사함도 거기다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에너지통이 자기 나오기 이전 참자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다가 구원을 받게 해야 구원이 받아지지, 그렇지 않으면 구원이 받아질 수가 없어요.
만약에 어저께 먹은 컵의 물이 부처님이라면, 어저께 먹은 컵의 물이 있었기 때문에 먹고 그것이 바탕이 됐다 이겁니다. 오늘의 물이 또 있게 됐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뒷생각이 끊어져야 될 거 아니오? 왜? 이 컵의 물은 바로 앞의 물이 돼 버렸으니까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깐 이것이 없어진 게 아니라 앞으로 왔다 이겁니다. 이걸 끊는 게 아니라 이렇게 이것이 다시 바꿔져서 여기 또 왔다는 걸 모르는 거죠. 그러니깐 이거는 앞의 물은 방치해 두고 자꾸 자기가 먹고 돌아선 이 뒤의 물만 생각을 하니까 이것은 앞의 물이 생기질 않고 받아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계발을 하는 데는 어디까지나 내가 현시점에서 그 모두를 바탕으로 삼아서, 주춧돌로 삼고 길잡이로 삼고 그렇게 하는 반면에 그 길잡이가 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시점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계발을 또 해야 되지 않느냐. 어저께 계산한 거를 오늘에 가서 계산을 한다면 되느냐? 어저께 계산한 건 계산한 것대로 어저께 계산한 거지 오늘 계산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계산을 하는 거는 오늘의 나로부터 계산을 해야 된다 이겁니다.
그럼으로써 전자에 계산한 거와 미래의 계산이 여기 오늘의 계산으로 합쳐지는 것이 삼각형이다. 그러면 삼각형이 법이라면 둥근 것은 대공의 열반의 나툼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열반이란 거는 뭘 열반이라고 하나? 나툼을 열반이라고 한다. 없어서 무(無)자로 돌린 게 아니다. 너무 꽉 차 있기 때문에 이것도 됐다 저것도 됐다 이것도 됐다 저것도 됐다 하니깐 이건 평등 공(空)이다 이겁니다. 그러니 꽉 찬 공이다. 그래서 ‘무’ 했던 거다. 그러니까 이 무 하나에서 수만 가지가 거기서 소생되는 겁니다. 나고 죽고 나고, 생사가 여기에서 나오는 거라고요. 공을 모르고는 대답 한마디 할 것도 없고 질문할 것도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씨를 심었는데 그 씨가 되기 전까지 전자에 싹이 살았죠? 그런데 씨가 거기서 여물어서 껍데기는 없어지고 씨가 나왔다 이겁니다. 그 씨를 또 되심어서 여기 지금 싹이 나와 있는데 왜 전자의 싹을 찾느냐 이거예요. 싹이 나와 있는데, 그 씨의 싹이 여기 와 있는데 말입니다. 지금 전자의 이 씨가 지금 여기 나와 있어요, 싹이. 뿌리가 박혀 있고. 아, 그런데 이걸 전자의 씨를 찾으니, 여기 벌써 있는데…. 그러니깐 그게 모순이라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의 씨를 찾지 말라. 전자의 씨는 이미 심어서 싹이 났다. 그러니까 이 씨가 여기 와서 또 싹이 된 겁니다. 뭐든지 내버리는 게 아니라 모든 게 인연에 따라서 한데 합쳐져서 하나로 뭉치면서 이것이 모든 게 나투게 되니까.
예를 들어서 한 사람이 24시간 고정적으로 한 가지 일만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것도 하고…, 한 사람이. 그럴 때 한 사람이 고정적인 거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게 나툼이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 인체에서 24시간 살아 보면서 그걸 이해해 보시라 이거예요. 그러면 대공의 이치가 모두 나툼이지 하나도, 물질적인 이 색채는 보지 말고 이 근본적인 참나를 봤을 때 이 일체 만물의 색채는 스스로서 본래 죽을 것도 없고 살 것도 없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깐 이건 아무것도 쓸모가 없다 이러는 게 아닙니다. 쓸모가 있으면서도 쓸모가 없고 쓸모가 없으면서도 써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뭘 내가 강조하느냐 하면 좌선한다고 해서, 이 육신이 달구지라면 달구지를 쳐서 달구지를 망가뜨리지 마라. 왜냐? 달구지는 나중에 써먹을 건데, 공부가 다 됐다면 써먹을 거란 말입니다. 근데 공부할 때 그 써먹기도 전에 달구지를 쳐 가지고 달구지를 다 망가뜨리고 소를 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고삐를 잡고선 소를 다스리면서 갈 때는 가고 설 때는 서고, 방문을 열면 방문을 닫고, 닫았으면 열고 나갈 줄 알고 이러면서 소고삐를 잡고 소를 쳐야 될 텐데 달구지를 치고 있어요.
즉, 몸을 망가뜨린다 이 소립니다. 그러면 공부를 다 하고 보면 벌써 달구지는 다 망가졌으니 이걸 어쩌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달구지를 치지 마십시오. 소는 자기 나오기 이전 자기를 말하는 겁니다. 전자의 아버지나 조상들이 아무리 잘했다 하고 아무리 도를 통해서 깨쳤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 씨앗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씨앗은 나와 더불어 같이 지금 싹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의 그 아버지 이름을 부르고 아무리 뭐를 해 달라고 바깥의 산소에 가서 빌어 봤던들 그건 아버지가 해 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자기가 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자기 내면으로 귀의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면

순간순간 놓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데도 어느덧 저도 모르게 나라는 것을 붙들고 있는 저를 보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근본과 하나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일상생활에 우리가 본래는 놓고 가는 건데 놓고 가는 걸 모르기 때문에, 간다 온다도 없이 놓고 돌아가는 걸 모르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업과 고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하나를 거기서 하고 거기서 들고 나고 들고 한다는 걸 알게 되면 그냥 그대로 자기 내면에 놔 버리게 되는데 왜 그렇게 놓질 못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믿어야 놔지지, 믿지 않으면 놔지질 않아요.
생각에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그냥 이성계가 아무 뜻도 없이 떡을 파는 노인네 앞에 가서, 떡그릇에 가서 그냥 엎드러진 거와 같이 그렇게 순수하게 해 보세요. 안다 모른다를 떠나서 내가 모두를 얻으려면, 이 우주 천하의 모든 것을 얻으려면 말입니다.
여러분을 버리지 않는다면 얻을 바가 없습니다. 하나라도 버리지 않는다면 하나가 찌꺼기가 남아서 다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도 가질 게 없다면 하나도 버릴 게 없이 이 주먹 안에 꼭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몽땅 놓으십시오. 몽땅 맡기고 사십시오. 그저 여러분이 ‘들이고 내고 살고 있는 자체 자기까지 더불어 같이 이끌어 가는 주인공 자체가, 운전수가 차는 끌고 가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다면 어느 땐가는 자기의 마음속에서 스스로 빛이 나고 스스로 참으로 지혜가 생기고 물리가 터져서 하늘을 보고 한 번 울고 땅을 치고 한 번 울어야 하는 그런 인간의 삶의 그 뜻을 알게 될 겁니다.

팔자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요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지 사는 게 무척 힘듭니다.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주어진 업이나 팔자운명이 있다는데 거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지요? 좀더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나는 죄가 많다, 나는 업이 많다, 이렇게 수많은 이름으로 업이니, 팔자운명이니 이런 언어도 붙이지 마시고 내가 죄가 얼마나 많기에 이런가 하는 생각도 마시고, 그런 생각이 나거든 그냥 자기 주인공에 맡겨 놓으세요. ‘모든 게 당신 속에서 나온 거니까 당신이 알아서 할 수 밖에 없지.’ 하고 놓고 또, 모든 게 좋게 되면 ‘아, 감사하구나.’ 하고 또 놓고 말입니다. 이 업이라든가 이런 거는 모든 게 과거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이건 어떠한 물질이 아니에요. 그런데 자꾸 물질에 다가오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것이 내 몸에, 내 가정에 다가오니까 그것을 녹이면 일차적으로 내 마음을, 내 참나를 발견하는 데도 이익이고 내 자식들을 이끄는 데도 이익이고 부부지간에도 이익입니다. 모든 게 ‘나’라는 자가발전소에서 불 하나를 켜면 아들이다 딸이다, 부부다 부모 형제다 하는 데 가설이 다 되어 있거든요, 본래. 그러니까 여기만 누르면, 발전소에서 스위치만 넣으면 다 불이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그렇듯이 다 녹아진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 이것이 생활 불교며 생활 참선이며 바로 이것이 좌선도 되고 참선도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안하면 좌선이죠. 그러니까 내 마음으로 그 창살 없는 감옥에다 내 몸을 옴쳐 놓고 꼼짝 못하게 하는 좁은 마음을 갖지 말고 그런 걸 탁 털어 버리세요.
마음은 저 벽도 없고 지붕도 없고 우주도 갈 수 있고, 내가 지금 여기에 앉아 있어도 내 집에도 갈 수 있고 볼 수도 있다 하는 것을 좀 생각해 보시면서, 앞으로 내 가정과 내 몸과 내 자식을 튼튼하게 하고 부모님께 은혜를 갚기 위해서도 여러 가지로 남을 원망하지 말고 증오하지 말고 욕심내지 말고 나라는 아집 내지 말고 모든 것은 내 탓으로 돌리면서 모든 걸 주인공에다 놓으세요. 그리고 부지런히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그러한 발전적인 여러분이 된다면 아마 여러분이 자유인이 될 겁니다. 자유인이라는 것은 삶의 보람을 느끼면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그러한 여여함을 말합니다.
200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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