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무조건 믿어라! 무조건 믿고 잘라서 먹어 봐라!
언제나 내 생각으로써 나의 기준으로써 잣대를 삼지 말고
한번 내가 상대방으로 들어가서 상대방이 돼 봐라
그러면 그 습성이 차차차차 없어진다
순간순간이 정진이 되려면
질문: 정진에 대해서 좀 여쭙겠습니다. 예전에 스님께서, 잠들기 전에 하루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어떻게,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는 것이 공부의 끈을 놓치지 않는 정진으로 항상 이어질 수 있을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변: 그냥 생활선법(生活禪法)이 아닐까요? 그냥 우리가 생활하면서 하되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모든 것을 그냥 내 주인이 그렇게 시키고 있고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그 주인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해라. 이런 것이 참선입니다, 그냥. 그대로 참선이에요. 그런데 그게 두 가지 여건에서 세 가지 단계로 내가 얘기한 겁니다. 왜냐하면 나를 발견을 못했으면 진짜 공부를 못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면 저녁에 남이 다 자고 조용한 틈을 타서 한 30분이라도 앉아서 ‘이놈아, 네가 너 있다는 증명을 할 수 있는 거지 누가 증명을 해 주느냐?’ 이거죠. ‘당신이 있다는 것을 당신만이 증명을 해 줄 수 있는 거지 누가 증명해 주느냐?’ 이겁니다. 그것이 똑바로, 직속 들어가는 관법이거든요. 그게 바로 좌선도 되지만 그게 관법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발견 못했을 때 지극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이죠. 그리고 살림하면서 살아가는 분들에 한해선 특히 더하고, 스님네들도 역시 그렇고요. 우리가 이 도리를 발견하려면요, 첫째는 다섯 가지 요소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그것이 다 거기서 나오고 빚어지는 거거든요. 뭐, 관습이라든가 습성이라든가 이런 것도 한번 굴려서 놓아야 떨어지죠. 거기에서 예전에 살던 그 습성이 나오면, 그냥 나오는 대로 생각하게 돼 있거든요. 나오는 대로 말하고 나오는 대로 하거든요. 그걸 한번 굴리지 못하고 그러니까 그 습성이 다 떨어지지 못하면 인정을 못해요, 하늘에서. 한울 중심에서 인정을 못한단 말입니다. 열쇠를 받지 못해요. 그걸 해인(海印)이라고도 하고 그러지만요.
그러니까 그 다섯 가지 요소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내가 나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통 속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모든 인과의 습성, 인연들과 살던 그 습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그대로 자꾸 하지 말고 한번 굴려서 놓되, 그 마음이 분기해서 탁 나오더라도 안으로 상대방을 생각해라 이겁니다. 내 생각만 하지 말고, 언제나 내 생각으로써 나의 기준으로써 잣대를 삼지 말고, 한번 내가 상대방으로 들어가서 상대방이 돼 봐라 이거죠. 그러면 그 습성이 차차차차 없어지죠. 그리고 둥글어지고 둘로 보지 않게 되고, 그래야 빨리 그 몸통 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천도재상에 음식을 놓지 않는지?
질문: 다른 절에서도 그렇고 민간에서도 보면 돌아가신 이를 위해서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서 제사를 지내는데 왜 선원에서는 음식을 차리지 않고 초와 향, 꽃과 과일에 둥근 떡만 놓는 것인지요?
답변: 천도재를 지내는 데 왜 반찬도 밥도 안 해 놓고 그러느냐? 이거를 말씀하신다면 이 떡은 그냥 사람이 먹는 떡이 아니라 우주를 삼키는 떡입니다. 그 떡 하나에는 모든 일체 생물이 다 들어 있는 떡입니다. 그것은 모든 걸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또 밥상을 놓고 반찬을 차려 놓는다면 앞서 살던 습이 도로 성한단 말입니다. 먹는 거 입는 거 집을 원하는 거, 자기 몸뚱이 아끼고 이러는 것이 그냥 다 합쳐져서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의식이 감동해서. 그러니까 그 의식을 벗기기 위해서 안 보이는 데서는 설법을 하고 보이는 데서는 그런 뜻으로써 상을 차려서 그렇게 해서 그 의식이 다, 모든 것이 멸하라고, 그렇게 해서 이 안팎에서 지내 주는 거죠. 안과 밖을 다 그렇게 해 드리고 또 자손들도 이 공부를 하니깐 자손들을 통해서 들고 나면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재사를 지낼 때 그렇게 안 차려 놓는 원인은 영령들이나 산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니 여러 가지로 좋지 않습니까? 둘이 같이 일을 나갔다 하더라도 떡 가게에다가 전화해서 맞춰서 놓고 저녁에 일하고 퇴근하고 오다가 그거 찾아 가지고 와서 지내면 아,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그 떡은 전체가 먹는 떡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향이나 초나 뚱그런 떡이나, 사람이 식구가 많으면 셋을 놓고 지내고 나눠 먹고 또, 적으면 하나만 놓고 하고. 하나가 삼백 개도 될 수 있고 백 개도 될 수 있고, 백 개가 하나도 될 수 있는 겁니다.
영령들은 체가 없기 때문에 위패를 해 놓는 원인이 거기 있죠. 거기에 응접을 해야만이 아시니깐요. 그래서 이 우주떡이라는 것이 말로만 우주떡이 아니라 우주의 삼세가 다 들어 있는 우주떡입니다. 과거나 미래나 현실이나 모두가 현실의 한 떡에 들어 있다는 뜻을 보이지 않는 데서 설합니다. 그냥 목탁이나 치고 염불이나 한다고 생각지 마세요. 그렇게 해서 스님네들이나 여러분이나 다 그렇게 인식을 하고 그 영령들을, 조상님네들을 다 이렇게 리드해 보세요. 집안이 편안해지고 이렇게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조상님네들도 마음이 흥락해서 좋으니까 가정이 좋아지는 겁니다. 이 마음 하나가 천지를 건지는가 하면 마음 하나가 천지를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법이라는 것은 공법(空法)이라야지 그냥 법이라고 한다면 잘되고 잘못된 걸 딱 따져서 이거는 지옥으로 보내고 이거는 천당으로 보낸다 이런다면 부처 될 자격이 없죠. 왜냐? 그 잘못된 사람도 본래 잘못된 게 아니라 몰라서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방망이 때린다 하더라도 일깨워서 사람 되라고 해 줘야지 그 말과 뜻이 어긋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래도 건지는 거고 저래도 건지는 거죠. 그러니까 누구나가 다 평등하게 그렇게 합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도 그렇습니다. 살아 있을 때에 너무 뱀을 많이 잡아서 먹었다, 개구리를 많이 잡아 먹었다, 이런 사람들 가끔 내가 봅니다. 그런데 죽을 때도 뱀이 꼴리듯이 그렇게 죽는가 하면 그 뱀에 자기 모습을 수없이 또 만들어 놓습니다, 새끼들을 낳아서. 그렇게 한다면 그 모습을 언제나 벗겠습니까, 또. 생략해서 뱀으로만 얘길 했는데 전후사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첫째 살생하지 말라. 깨치지 못한 사람은 살생하지 말라. 깨친 사람은 살생을 해도 살생이 아니고 건지는 거다. 만약에 깨친 사람이 소를 건질 때에 소고기가 들어온다고 그것을 안 먹겠습니까? 닥치는 대로 한 점 먹어서 만약에 소가 환토가 된다면 그건 의당 먹어야 됩니다. 그래서 가는 거 잡지 않고 오는 거 막지 않는다는 뜻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재사지내고 천도시키고 하는 데에 문제가 너무 많이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람들은 한 번 한다고 해서 뱀의 허물을 그냥 벗는 게 아닙니다. 남편이든지 자식이든지 통해서 많이 들고 나면서 공부를 해야, 많이 들고 나면서 이런 거를 알아서 차차차차 그것이 벗어나게끔 되는 겁니다. 부처님이 계시다 하더라도 단박에 부처님도 건져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 건져 주기만 하면 뭘 합니까? 뱀의 습이 있어서 자꾸 글로 들어가는데. 그러니까 뱀의 습을 벗어 주기 위해서 그 차차가 되는 거죠. 그래서 여기다 놓고 해라. 꼭 안 죽이면 안 될 때는, 닭이나 뭐라도 안 죽이면 안 될 때 그때는 주인공에다 맡기고 해라. 그러면 자기는 죽인 사이가 없고 안에서도 죽인 사이가 없다. 왜? 자기가 없으니까.
‘자기가 없다’ 는 뜻을 아십니까? 반야심경(般若心經)에도 있듯이 하나도 보는 것도 고정된 게 없어요.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만나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모두가 고정된 게 없어서 함이 없이 하는 겁니다. 어떤 거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공했다고 하죠. ‘우주 삼세가 그대로 공해서 문이 없도다.’ 하는 셈이나 같죠. 그러니 여러분도 이유를 따지지 마시고, 배우는 것은 배우려고 무조건 무심으로 그냥 묻고 질문하고 이러는 거는 참 좋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이걸 따지고 이걸 따지고, 이게 좋으니 저게 좋으니 내 탓이니 네 탓이니 하는 거는 공부하는 데 아예 지름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잘 보이고 싶고 시기하는 마음이 있는데
질문: 저는 항상 좀 잘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 그리고 남이 잘되면 같이 기뻐하지 않고 알게 모르게 시기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런 부분은 알면서도 좀 고치기 힘듭니다. 어떻게 해야 고쳐질까요?
답변: 내가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걸랑 ‘시기 안 하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놓으세요. 또 즐거운 마음이 생기걸랑 ‘즐거운 마음을 내게 해서 감사해!’ 하고요. 그러니까 양면을 다 거기다가 놓으세요. 이게 바로 똑 부러지는 진리인 것입니다. 스스로 거길 믿으면 스스로 잘되게 이끌어 갑니다. 댁은 그냥 어느 한 개체의 물건과 같은 겁니다. 로봇 있죠? 로봇에게 어떠한 물건을 움직이게 할 때는 시키는 누군가가 단추를 눌러서 그 몸뚱이가 움죽거리듯, 지금 우리 전체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어이, 잘 가게 해서 감사해!’ 또, 어디가 고장이 났다 이런다면 ‘고장이 나게 한 것도 너니까 고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놔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꾸자꾸 해 보면 나중엔 힘이 생기게 돼요. 힘이 생기게 돼서 ‘허허, 내가 괜히 그랬구나. 그렇게 한들 저쪽에 해로울 것도 없고, 잘될 것도 없는데 괜히 내 생각으로 해서 나만 괜히 그렇게 됐구나.’ 하고 아마 뉘우쳐질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거를, 좋아도 거기에 감사하게, 또 나빠도 거기에 ‘네가 한 거니까.’ 하고 놓으라는 겁니다.
내가 항상 그랬죠.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모두 자동적으로 입력이 되는데, 오신통이라는 그 작자가 바로 컴퓨터와 같다. 그러니까 다섯 가지의 그 능력을 한데 합해서 그냥 컴퓨터라고 이름 해도 좋다. 그래서 입력이 돼서 현실에 나오는 것을 다시 거기다 입력을 하니까 그릇이 비더라. 자꾸자꾸 그릇이 비고 또 비고 또 비고, 그러는 대로 자꾸 입력을 하니까 완전히 해말갛게 그릇이 비더라. 그래서 아주 밝게 자기라는 놈이 등장을 하더라.’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돼서 현실에 나오는 거를 팔자 운명이라고 하고, 현실에 나오는 거를 되집어 넣을 수 있는 사람은 팔자 운명이 붙지 않는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화나고 그러는 것도 이게 알고 보면요, 몸속에 들어 있는 거예요. 그게 인과성·업보성·세균성·영계성·유전성입니다. 그것이 다섯 가지가 포함돼서 많으냐 적으냐일 뿐이지 다 가지고 있는 겁니다. 다 가지고 있어서 그것들이 괴롭히기 위해서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괴롭게 하고 망하게 하고 그냥 병들어서 죽게 하고. 그렇게 해야 원수를 갚죠.
그러니까 자꾸 그렇게 나오는 거기에 속아서 자꾸 그 마음을 나오는 그대로 쓰니까 힘들게 죽는 사람도 있고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고, 힘들어서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도 있고 이런 거죠. 그러니까 그 팔자 운명에 매달리지 말고 그냥 거기다가 놓으면 그대로 만사가 태평입니다. 팔자 운명이 자꾸 없어지니까요. 팔자 운명이 없어지고 새 물로다가 그냥 출현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입력하는 대로 현실에 나오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꼭 하셔야 할 겁니다. 겁내지 마시고요. 무조건 믿고. ‘화내는 것도 너 아니야? 화 안 나게 해!’ 해도 좋습니다.
보시를 하려다 다른 데 쓴다면
질문: 스님께서 대중법회 중에 스스로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발원하면서 마음으로 얼마를 해야겠다고 정한 보시금을 우선 급하니까 급한 데 먼저 쓰고 나서 다음에 형편이 나아지면 그때 보시하겠다고 하는 것은, 물건은 받고 물건값을 주려다가 다시 받아오는 경우와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저는 이를 대통령도 자기가 만든 법은 지켜야 되는 것과 같은 도리로 비유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경우가 생겼을 때 되돌려 놓는 방법을 알고자 합니다.
답변: 물론 둘이 아닌 까닭을 알 수 있고 관찰할 수 있고 무명에서 벗어나서 여여하게 다스리고 구족(具足)한 사람들은 그것을 따질 필요도 없죠. 그러나 지금 배우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꼭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얘깁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는 때에 따라서 어려워도 우리가 이건 참 감사하니깐 시주를 해야겠다 이러고 떼 놓지 않습니까? 떼 놓고 있다가 그 이튿날이고 언제고 이거 돈이 급해서 쩔쩔매다가 아이구, 어디 가서 꿀 데도 없고 그러니까 부처님한테서 꾸어 쓴다 이런 생각으로 쓸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됩니다.
그래서 생각을 잘하라 이겁니다. 왜냐하면 전에도 얘기했듯이 물건을 산 값입니다. 이 돈을 시주를 하면 누구를 위해서 한 게 아니라 자기 물건을 산 겁니다. 그럼 물건은 가져오고 물건 값은 도로 빼앗아 온다면 그건 그 물건 사 왔던 걸 도로 뺏깁니다. 그러니까 이건 안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내 가정이나 내 삶, 부처님, 이 모든 것을 생각해서 잘 알아서 정성껏 새 돈으로 바꿔서, 이건 정성이니까 미리 아예 이렇게 떼어 놔라 이래야지 무턱대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막 집어서 이렇게 해 놓고 도로 갖다 쓰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그건.
그것을 왜 그렇게 내가 일러 주느냐 하면 십 몇 해 전에 영등포에 사는 사람이 공업을 새로 시작을 한 사람인데 그저 요만한 하꼬방처럼 해 놓고서 사글세를 들어서 있으면서 먹고 살 양으로 무슨 물건을 만들려고 그러는데 아, 물건이 영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에이그, 그냥 시주를 부처님 앞에 해 봐야겠다.’ 그러곤 시주를 그때에 오만 원인가? 잊어버려서 모르겠어요, 얼만지. 그래서 시주를 하려고 그거를 이불 갈피 속에다 넣어 놓고는 턱 나왔는데 아, 그 물건을 하는 데 돈이 모자라서 쩔쩔매다 보니까 그걸 도로 갖다 썼다 이겁니다. 그런데 이튿날 그 물건을 되찾아가더라는 얘기예요. 그 물건을 그냥 다 가져가더라는 거예요. 돈 낸 것 그냥 다 줘 버리고요. 그렇게 되더라는 얘기죠.
그래서 와 가지고는 울고불고 야단났어요.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왜 시주는 했다 도로 빼앗아 갔어?” 이랬더니 “아이고, 애들 학교에 뭘 내는데 그걸 낼 게 없어서 그냥 쩔쩔매고 물건도 하는 데 모자라서 그랬습니다. 그거 되면 바로 또 넣어 놓으려고 그랬습니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이겁니다, 절대로. 이거는 부처님 법 이 자체가 그대로, 그대로 법이지 절대로 이거는 이렇다 저렇다 이유가 거기 붙지 않는다 그런 말을 했어요. 그래서 그때에 그런 경험을 나도 했거든요. 그래서 일러 드리는 겁니다. 그런 분들이 많이 있죠.
그런데 둘 아닌 관찰을 할 수 있고 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라면 혜향(慧香), 즉, 마음의 혜향이라면 해탈향(解脫香)도 할 수 있고,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이게 마음 그대로인데 이거 해 가지고 사는 것만 알았지 그 사람들이 뭘 압니까? 그러니깐 알지 못하는 사람 앞에 또 앞으로 그런 일이 생기면 큰일나거든요, 어려운 사람들이. 그러니까 그렇게 일러 줬던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그 둘이 아닌 도리를 알고 그 무명 속에서 벗어날 줄 안다면 결국은 한 것도 없고 안 한 것도 없고 그 도리를 아주 완벽하게 알 수 있다면 아무 지장이 없을 테죠? 또 그렇게도 하지 않을 거고요.
문 아닌 문을 찾으려면
질문: 문 아닌 문을 찾되 문 아닌 문은 어디에 있는 것이고, 또 어떻게 찾는 것이며 그 문 아닌 문 안에서 내가 도대체 무엇을 찾아야 되는지 스님께 질문드립니다.
답변: 몸뚱이로서는 문을 꼭 찾아서 들어가야 들어갈 수가 있죠? 그런데 마음은 말이에요, 지금 이 자리에서 나가려면 어떻게 나가야 합니까? 마음이 나가죠? 지금 이 자리에서 집에 갔다 와 보세요. 어디로 나가야죠? 마음이 문을 찾아나가야 될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나가야 될까요? 난 여기서 저 건너 내 방이 있는 데를 가려면 그냥 벽도 봇장도 없이,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나가지는데 말입니다. 저 건넌방 가는 것이나 지구 전체를 도는 사이가 같은 사이에요. 다른 우주나, 태양에, 또 다른 혹성에 간다 하더라도 차이가 나지 않아요. 한생각 딱 하는 거하고 차이가 나지 않거든요. 그러면 내 몸속에서 수없는 입자가 만약에 벽도 없고 봇장도 없이 그냥 나간다면, 문도 없이 나간다면 어떻게 생각해요? 그거를 두고 ‘천백억화신이 나툰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됐다는 것만 해도 아주 최상의 첨단이죠. 그래서 인간이 마음으로 자기 속에 있는 그 모든 의식을 입자로 내보낼 때 그렇게 한계가 없죠. 그런데 무슨 문이 필요합니까? 문은 이 몸뚱이, 모습이 있는 걸로 족하지 진짜 무슨 일을 하려고 한다면 문을 찾아다니면서 무슨 일을 합니까, 한계가 있는데. 그래서 옛날에는 창과 칼과 활을 썼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됐습니까? 총, 대포, 뭐 심지어는 로켓까지 올라가고 말이에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또 그것보다 더 광대한 문제를 어디서 가져와요? 그리고 빛보다도 더 빠르고 한계에 부딪치지 않고 가고 올 수 있는 거,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는 거는 마음밖에 없거든요.
그러니 문을 찾으며 배우려고 하지 마라. 문을 찾으며 공부하는 자는 학으로 지식으로 이론으로 찾는 거고, 우리가 이 마음공부를 하는 건 문이 없는 문을 찾기 위해서 지금 공부하는 것이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한번 그렇게, 마음은 문을 찾지 않아도 아무 데고 문이 된다는 거, 은산철벽도 문이 된다는 거, 깊은 물도 문이 된다는 거, 허공도 문이 된다는 거, 그냥 어디고 문 안 되는 게 없어요. 그리고 나 아니 되는 게 하나도 없고요, 하다못해 미생물까지도. 그렇게 나 아니 되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걸 부처라고 이름했고, 공덕이라고 이름을 했죠. 공덕! ‘일산(日傘)의 공덕은 크고 작음도 없이 그렇게 크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죠. 열심히 하세요. 자기 주인공만이 할 수 있다고 하는 반면에 그 주인공이 문이 되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문이라야 되는 거지 딴 구멍은 없어요. 과거, 미래를 둘 아니게 마음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문은 그 문밖에 없어요.
진리를 부르는 이름이 다른 이유?
질문: 화두는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교라고 생각됩니다. 큰스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주인공을 잡아라.’ 하십니다. 그리고 선방에서는 ‘이뭣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도의 어떤 선지식은 ‘내가 누구인가?’ 했고 또 어떤 이는 ‘내가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깨치신 분들마다 화두의 표현이 다른 것을 볼 때 이는 무슨 도리가 숨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리는 하나인 것 같은데 표어가 다른 것은 시대나 법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 이 점에 대하여 여쭈고자 합니다.
답변: ‘이게 뭣고?’ 하고 그 이름만 생각하고 직설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수박을 놓고 ‘이게 뭣고?’ 하고 굴리는 거나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가르치는 건 ‘그대로 수박을 잘라서 먹어라.’ 이겁니다. 그대로 수박을 잘라서 먹는다면 바로 영원히 먹일 씨도 나오고 또한 맛도 알고 그럴 테니까 ‘잘라서 먹어라’ 이런 겁니다.
그 많은 이름을, 그 많은 공안을 다 놓고, 못 믿지 말고 무조건 믿어라. 무조건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깐 상대성도 생겼고 세상도 벌어졌고 부처가 있는 줄도 알았지 내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없는 거 아닙니까? 무효니까. 내가 있으니까 나를 무조건 믿어라, 무조건 믿고 잘라 먹어 봐라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주인공’ 하면 전체 한데 합쳐진 주인공입니다. 개별적인 주인공이 아닙니다. 내면으로나 외부로나 모든 게 한마음으로 뭉쳐진 자체가 바로 주인공입니다. 공(空)해서 돌아가니까.
그러니까 그 주인공은 틀림없이 ‘너만이 할 수 있다.’ 하고 그냥 ‘나무는 전체 뿌리를 믿어라. 네 나무는 전체 뿌리에서만이 너 나무가 살 수 있다.’ 이런 겁니다. ‘그래 살 수 있다. 너가 있으니까 내가 지금 형성돼서 심부름꾼으로 있지 않은가.’ 이런 걸 믿고 무조건 놓아라. 무조건 믿고 거기에 맡겨 놓아라 이런 겁니다. 맡겨 굴려라 이러기도 하고. 그러니까 지금 이름이 있기 이전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 이름을 가지고서 굴리다 보면 십 년이 가도 그만, 이십 년이 가도 그만, 삼십 년이 가도 그만입니다. 먹어 봐야 맛을 알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저런 이름의 말이 다 필요 없습니다. 그 이름은 이름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름을 벗어나서 그대로 믿고 들어가야 된다 이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