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잘못 내 모습으로 보세요”
출가하겠느냐
결혼 생활 33년째가 되는 이씨 부부는 금슬이 좋기로 소문 나 있다. 비결을 묻자 “우리도 남들 겪을 일 다 겪고 살았어요. 그런데 의지할 것이 있었거든요. 살면서 어려울 때마다 견디게 해주는 단단한 버팀목이 있었어요”라고 답했다.
이씨는 어려서부터 불자인 어머니를 따라 항상 절에 다니며 컸다고 한다. 산중의 그 절에 한 큰스님이 계셨다. 아기 때부터 보아온 스님은 이씨를 딸처럼 자상하게 가르치고 이끌어주었다. 이씨는 어머니와 함께 절에 갈 때마다 봉사했고 경전과 참선공부를 열심히 했다. “고등학생이 되던 어느 날이었어요. 스님께서 조용히 부르시더니 ‘너 출가할 생각은 없느냐’고 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이씨는 깜짝 놀랐다. 절에는 열심히 다녔지만 한 번도 자신이 스님이 되겠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던 것이다. “스님, 전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어떤 모습으로 있든 열심히 부처님 법에 따라 살 거예요.” 스님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와서 대학을 다니게 됐다. 이제 그 절에는 방학 때만 가게 됐다. 대학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게 됐고 그러다 성실한 사람을 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스님의 선물
부모님에게 결혼 허락을 받던 날 스님에게 그 사람과 함께 갔다. “스님, 결혼할 사람이에요.” 스님은 반가와 하며 청년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래, 참 좋은 인연이구나” 그리고는 “내가 줄 것이 있으니 두 사람 좀 기다리시게” 하더니 다른 방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스님은 오지 않았다. 이씨는 좀 걱정이 돼 ‘무얼 주신다고 할 때 사양할 것을, 괜히 어른께 누를 끼쳤나’ 싶었다. 염주나 경전을 주시겠지 싶었는데 아닌 것 같았다. 왜 이리 오래 걸리시는지 걱정이 됐다. 한 시간도 훨씬 지났을 때 방문이 열렸다. “여기 있네, 결혼 선물” 하며 스님이 내놓은 것은 커다란 한지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이씨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온통 글씨였다. 종이 위에 참을 인(忍)자가 가득한 것이 아닌가. “인(忍)자만 108번을 썼네. 뜻을 아시겠나.” 이씨가 입을 열려는 순간 스님은 “보통 인(忍)자를 참는다는 뜻으로만 알고 있지. 그러나 이 글자에는 ‘용서하다’라는 뜻이 있어. 상대의 허물을 용서하는 자비심이 없으면 어떻게 참을 수 있겠나. 용서하지 않고는 진정한 인내가 되지 않는 법이야. 꼭 명심하게. 하루 108번이라도 상대의 잘못을 용서하게. 그럼 행복하게 잘 살 걸세.” 이씨는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스님이 직접 써 주신 108번의 용서, 인내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 스님은 “결혼 축하하네. 이제 출가하는구먼” 하고 미소지었다. 그 말씀이 가슴에 깊이 박혔다. 출가하는군. 그래, 출가해 수행하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살라는 말씀이었다. 그 마음이라면 무엇을 못하랴 싶었다.
용서하고 또 용서하며
그 108개의 인(忍)은 가보처럼 거실에 걸어두었다. “정말 수 없이 보게 됐어요, 아침 저녁으로. 애들이 속 썩이고 남편이 늦게 들어올 때면 가만히 정좌하고 앉아서 인자를 떠올렸어요. 그럼 속상한 마음이 신기하게 가라앉더군요.” 그래도 화가 나고 용서하기 어려울 때는 “부처님, 그 사람을 용서하기 어려워하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고 나면 가벼워졌다. 해마다 정초에는 부부가 스님에게 인사드리러갔다. 스님의 신년인사 말씀은 언제나 “인자 하나만 생각하면 다 잘 될 거야”였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이씨는 그 액자 안에, 글씨 안에 스님과 부처님이 계신다고 느끼게 됐다.
결혼 25주년이 되던 은혼식 때 스님에게 찾아갔다. 뜻밖에도 스님은 축하한다는 말 대신 “그래, 출가한지 25년이 됐구먼. 그동안 잘 정진해왔네”했다. 이씨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버렸다.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저리면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얼마나 많이 용서해왔는지 몰라요. 스님 말씀처럼 용서가 안 되면 어떻게 참을 수 있겠어요? 무엇보다 저 자신을 용서하고 또 용서해왔고, 처사와 시댁식구들, 아이들, 정말 용서, 용서, 인내, 인내의 세월이었어요.”
용서하고 인내하는 자비로 이루어진 이씨의 결혼생활은 아름다운 수행정진의 시간이었다. 부처님께서 “남의 잘못을 보면 예전 몰랐을 때의 내 모습으로 둘 아니게 보고 자비심을 내라”고 하신 것처럼, 서로 잘못을 감싸주고 용서해주는 인(忍)자가 우리 가정에 절실히 필요한 시대인 것 같다. 황수경(동국대 선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