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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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하게 한생각을 잘해서 잘 말을 하고 잘 행하라!
무(無)의 세계의 문 아닌 문은 논리가 붙지 않습니다

잘되는 게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잘되고 못되고 이 양 갈래길을 다 자기 한손에 쥐어야만이
그걸 부처님 공법이라 합니다!

오늘 비가 오는데도 이렇게 한자리를 해 주셔서 정말 반갑습니다. (합장하시며) 더불어 같이 감사하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말은 안 하죠. 하여간에 전 여러분을 뵐 때마다 너무나 마음이 기쁩니다. 여러분과 더불어 모두 한마음이 돼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 어떠한 혼란이 오는 것도 막아 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공법(空法)의 연기법을 그대로 응용하고 계신 겁니다. 납득이 안 되세요? 허허허….
천차만별의 그 광대한 법은 누가 죽는다 안 죽는다, 굶어 죽는다 잘 먹고 산다 이런 걸 떠나서, 우리 한 지구를 집을 삼아서 살고 있는 생명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리를 웬만큼 납득하고 이해하기 이전이라도 ‘진짜로 내가 나를 움죽거리게 하는구나. 그리고 살리는구나. 그리고 형성시켰구나.’ 하는 걸 아신다면 어떤 것도 부럽지 않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그렇게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내가 그토록 알고 믿고 당당하니까 어떤 게 온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죠. 잘되는 게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잘되고 못되고 이 양 갈래길을 다 자기 한손에 쥐어야만이 그걸 부처님 공법이라 합니다.
우리가 그냥 아무렇게나 사는 거 같지만, 우연히 사는 거 같지만, 팔자 운명으로 사는 거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아까 말을 잘못했다면 그 잘못한 게 지금 나한테 돌아올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침착하게 한생각을 잘해서 잘 말을 하고 잘 행해라, 이런 뜻입니다. 그 도리를 모르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해서 내 앞에 닥쳐오는 거는, 팔자 운명의 탓이 아니라 자신의 탓입니다. 팔자 운명이 어디 붙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돌 하나도 나무 한 그루도 우리 인생들도 다 쉴 사이 없이 돌아가고 있는데, 거기 뭐가 팔자니 운명이니 하고 붙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살아가면서 내가 생각을 잘 못하고, 행동을 잘 못하고, 계산을 잘 못해서 그런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계산을 하라는 게 아니라, 눈 뜨고 있지 않습니까, 귀 뜨고 있죠, 발 움죽거리죠, 냄새 잘 맡죠. 다 이렇게 뚫어 놨단 말입니다. 그래서 앞뒤를 다 보고, 그냥 스쳐 가는 대로 앞뒤를 보고 행해라, 이런 뜻이죠. 그것이 그대로 연기법이며, 그대로 공법이며, 그대로 세상 법이에요.
우리는 살아오던 습이 있어서 마음으로 그 습을 놓질 못해요. 그 습을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게,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또 예전부터 살아오고 이랬으니까, ‘못한다, 한다’가 너무나 많고, 또 알면서도 습 그대로 그냥 행하고 말이에요. 자기가 실천을 해 볼 생각도 안 하고 말이에요. 난 지금 인생살이에 극치적으로 들어가서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공부함으로써 지구라는 집 하나가 달라집니다. 옛날에는 물에 죽고 불에 죽고 이렇게 세계가 극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사람들 마음에 의해서, 심상에 의해서 모든 것을 전멸시킬 수도 있고 전부 살릴 수도 있어요. 또 그렇게 하는 한편 세세생생을 얻게 돼서 불국토를 만들 수도 있다 이런 문제죠. 그러니 예를 들어서 진짜로 나를 믿는다면, 각자 나를 믿는다면 거기에서 힘이 배출돼 나오기 때문에 육체적인 나로서는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 걱정할 게 요만큼도 없어요. 나라 걱정도 없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고, 지구의 오존층이 터져서 다 죽는다 하더라도 아무 걱정이 없어요. 그런 힘이 있어야 아무 걱정이 없죠. 아무 걱정이 없으면서도 그것은 다 대치가 되죠.
그저 누가 요만큼만 얘기하면 그것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아가고 그러죠? 그런데 나로서는 어떠한 일이 닥쳐도 이 마음이 움죽거리는 법은 없어요. 그냥 봐서 체계를 세우고 그대로 봐서 그냥 하지 마음이 움죽거리는 법은 없거든요. 왜냐? 진짜로 알기 때문에 그렇고, 그렇게 알기 때문에 ‘우주’ ‘삼천(三千)’ 이렇게 됩니다. 우주 삼천! ‘우주’ 하는 건 평등공법(平等空法)에 의하는 거지만, 이 ‘삼천’ 하는 거는 과거, 미래, 현재를 한데 합친 ‘천(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한데 합쳐 가지고 ‘대천(大千)’ 이렇게 한단 말이에요. 대천세계(大千世界)! 이러니까 그 대천세계로 말하자면 여러분의 근본, 그 무전기에 다 입력이 돼 있는 거예요, 다. 반야줄이라고 하지만 무전기 줄이라고 합시다, 우리. 허허허….
(머리를 짚으시며) 자동적으로 이 정수에 입력이 되면 입력되는 대로 현실에 나오는 거니까, 거기다 되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입력은 연방 없어지면서 그릇이 비고, 새 입력이 들어가면 금방 나오고 이러거든요. 그러니 그릇이 항상 들어갔다 나갔다 하면서 비어 있으니까, 어떤 거라도 이 우주 삼라대천세계를 다 모아서 거기 넣어도 그릇이 작지 않죠.
지금 내가 한 말 이해가 갑니까? 삼천대천세계를 다 내 그 주인공 안에 넣어도 그릇이 작지 않다, 두드러지지 않고. 작으면 작은 대로 담아지는 그릇이 맞고, 크면 큰 대로 맞고 그래서 꺼내 쓰더라도 또 줄지 않는 겁니다. 이 평등공법이 이렇게 광대한 것을 잘 알고,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한 철 살면서 잘 해야 위 조상들이나 아래 모든 자손들이나 다 양쪽으로 건질 수 있는 바로 그런 자유인이 된다는 얘깁니다.
우주 삼천!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이 세상 이 우주도 한계가 없습니다. 우주도 많고 은하계도 많은데 각각 도시냐 시골이냐 이런 차원의 차이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요 지구가 소속된 은하계나 우주만 있는 게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아요. 헤아릴 수 없는 그 자체를 이름 해서 부르는 게 바로 ‘대천’이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 이름은 이름이지마는 그게 이름이 아니면 이름을 써먹을 수가 없으니까 이름을 짓는 겁니다. 방편이자 현실입니다, 그게.
이 공부를 하는데 ‘여러분의 몸은 생각지 마라’ 이러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기도 해요. 아주 실질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한번 미치지 않고는 못 하는 공부거든요, 이게.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이 넓은 길만이 길이 아니라 저 갈대가 많고 온통 그냥 돌사닥다리로 된 산이 길이다’고 그러는 겁니다. 내 이 속의 스승이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두말도 안 했어요. 왜냐하면 여러분 같으면 대로가 있는데 길이 아닌 데를 길이라고 그러니 그거 믿겠어요? 그러나 믿든 안 믿든 그대로 나를 내버렸다면, 죽은 것이 무슨 말이 있겠느냐 이겁니다, 네? 진짜로 내버렸다면 이리로 가든 저리로 가든 무슨 탈이냐 이겁니다.
그래서 나는 갔죠. 그러니까 온 몸뚱이가 다 찢어지고 벗겨지고 피가 나고 그러는데도 생각이 하나도 움죽거려지지 않아요. 날 버렸기 때문이죠. 버리려면 아예 그렇게 버리고, 그렇지 않으면 안 버리고도 지금 현재에 여러분이 ‘고정됨이 없다’ 하는 거를 알고 ‘나는 내가 아니고 내 주인이 나를 이끌어 간다’는 생각을 하고 그대로 거기 다 놓으면은 그것도 죽는 거예요. 내가 처음에는 모르고 그랬지만, 나중엔 ‘그럭해도 죽는 거고 저럭해도 죽는 거구나.’ 하는 걸 알았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그 길 아닌 길로 갔지만 얼마나 그 밤에 뜨듯하게 잤는지 몰라요. 그렇게 가다가 길이 막혔는데, 천야만야한 데를 내리뛰라는 거예요. 나를 버렸으니 뭐 죽고 사는 거 가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발짝 턱 내디뎠더니만 빙글빙글 돌아서 떨어진다는 게 나뭇단, 왜 예전에는 나뭇단 묶어서 산 밑에다가 쌓아 놓는 데 있죠? 그게 쌓여져 있는 데로 펑! 하고 떨어져요. 그렇게 떨어지고는 어이가 없어서 엉금엉금 기어 내려와서 생각을 하니까 ‘아하, 고마워’ 허허허…. ‘이 나무 한 단 빼놓고 그 속에서 자라고 그랬구나! 참 이렇게 신기한 법이 어딨는가. 내 몸은 모두 너의 시자일 뿐이야. 시자를 뜨듯하게 자라고 이렇게 했구나!’ 하고 그냥 하나 빼고선 들어가니까 얼마나 따뜻해요?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도 그 움막살이나, 왜 예전에는 땅속으로 파서 하는 걸 옴집이라고 그러죠? 네?
사회자 움집….
큰스님 움집. 네, 그런 걸 봐도 그렇고, 다리 밑을 가다가 비 안 맞을 정도로 돼 있는 데를 보면 그것이 아주 싱긋이 웃어지고 좋았지, 좋은 집을 보고 웃은 예는 없어요. 그래서 어느 날 저 삼막사의 길을 가다가 ‘아하, 이것도 착이로구나! 그걸 좋아하는 것도 착이로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그러니까 모두 생각을 해 볼 때에 ‘나를 버리면 성공한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모두 자기가 함이 없이 지금 연기법을 하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 자체가 그걸 알지를 못해요. 살아오던 집착에 의해서 번뇌라고 할까 그것이 그대로 그냥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해서 돌아가는 거예요, 머릿속에서. 그렇게 연결해서 돌아가더라도 내가 아주 죽었다면 그 뭐가 있겠습니까? 내가 나를 버렸다면 말이죠. 내가 버려서 버리는 게 아니고 이미 그렇게 버려져서 가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미!
그래서 항상 어느 때든지 어디 가서든지 이 말은 빠짐없이 합니다. ‘고정되게 볼 수 있느냐? 고정되게 듣고 있느냐? 고정되게 움죽거리느냐? 아버지 노릇만 하느냐? 남편 노릇도 하고 아들 노릇도 하고 형 노릇도 하고 아우 노릇도 하고 이러지 않느냐?’ 그러니 그렇게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거죠.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걸 좀 보세요. “아버지!” 하니까 뭐 아주 자동적으로 “그래!” 하고 대답을 하고 맞아들이는 그 아버지가 자기겠습니까? “여보!” 할 때 남편으로서의 자기가 자기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대로 연기법을 하고 가고 있습니다. 연기의 공법을 그대로 하고 가고 있습니다. 그걸 왜 납득을 못하십니까?
우리가 지금 반은 바로 다니고 반은 거꾸로 다닌단 말입니다. 그런데 거꾸로든지 바로든지 내가 그 둥근 모두를 다 알아야 되듯이…. 그러니까 그렇게 둥글기 때문에 어느 거 하나도 그냥 있는 게 없이 다 움죽거리고 있다는 얘기죠. 우리가 생각할 때에 땅에 발을 붙이고 다니니까 우리가 바로 서서 다니는 거 같지만, 때로는 거꾸로도 되고 때로는 바로도 돼요. 수시로 돌아요. 그런데 착이 앞에 가려서 마음이 거길 따라설 수가 없어요, 이게 비어야 되는데.
종교라는 걸 떠나서 불교라는 거는 불(佛), 즉 그 영원한 생명의 근본, 그리고 교(敎)는 우리 생활, 그러니까 불교라는 것은 어디 딴 데 있거나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고 그대로 만들어진 거죠. 우리가 생명이 있기 때문이죠. 불도 생명이 있고 물도 생명이 있고 바람도 생명이 있고 흙도 생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생명체를 먹고 사는 거죠. 그것으로써 이렇게 생명체를 가지고, 생명체가 있으니까 또 그 모습을 가지고 나와서 지수화풍을 먹고 또 지수화풍으로 돌아가는 거죠. 바람으로 흩어지고 물로 흩어지고 원기로 흩어지고 흙으로 흩어지고 이렇게 해서 네 군데로 흩어져서 돌아가는 거죠.
의정도 여러분이 딴 데서, 즉 책에서 찾으려고 하지도 말고, 나한테 물으려고 애쓰지도 말고 ‘당신, 그 광대한 묘법의, 내면세계의 너만이 알려 줄 수 있다.’ 하고 그렇게 자꾸 두들기란 말입니다. 닫은 문을 열고 다니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은 선승(禪僧)이 될 수도 없거니와 그 공부를 못 해요. 그건 논리에 의해서 문이 있고 없는 거지만 이 무(無)의 세계의 문 아닌 문은 논리가 붙지 않습니다. 그대로 자기 자유대로 문이기 때문에, 이 허공이 모두 탁 터졌기 때문에…. 인생으로 한번 태어났으면 한 철 살면서 이 도리를 배워서 알아 가지고서 세세생생을 얻을 수 있어야,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하면서 아마 우주 천체를 바꿀 수도 있는 그런 계기가 생길 수 있지 않느냐는 얘기죠.
그런데 모두들 생각하는 것이 살아오던 습 때문에 살아오던 습의 차원에서만 뱅뱅뱅뱅 돌아요. 허허허…. 생각들이 말이에요. 좀 엉뚱하게, 좀 기발하게 건너뛸 수는 없을는지…, 그게 아쉽죠. 그거 뭐 손해가 나는 것도 아닌데 왜 건너뛰지를 못해요? 삼천 년 전이라 할지라도 현실의 한찰나예요. 말로만 이러는 게 아니에요. 삼백 년 전이라도 현실이란 말이에요. 만약에 우주가 있다면 우주를 조그맣게 축소해서 이렇게 갖다 놓고 넓게 볼 수 있는 거죠. 이렇게 기묘하고 찬란한 이 한도량 공법이 얼마나 좋은데….
그런데 여러분이 ‘아유, 저 스님은 도대체 부처님 경전을 읽어 주지는 않고 왜 저런 말씀만 하시나!’ 이렇게 생각하시겠죠? 그렇게 하시는 분들 많죠? 예? 경전에 있는 부처님 설법은 왜 안 해 주나 하는 생각을 하시겠지만, 하다못해 돌 한 쪼가리라도 부처님 법문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푸른 산은 그대로 다 부처님 모습이에요. 흘러가는 푸른 물은 다 부처님의 설법이고요. 이 모두가 아니 닿는 데가 없어요. 그런데 어떤 것이 부처님 법이고 어떤 것이 부처님 법이 아닙니까?
팔자 운명도 없으니 내가 생각해서 내가 흐뭇하게 살고, 내가 잘못해서 그 고통을 받는 거를 지금이라도 당장 벗어나야죠. 어떤 때는 남을 믿고 이름을 빌려 줬는데 부도가 나서 다 망했다고 그래서 “여기 언제부터 다녔어요?” 하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여기 오기 전에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거든요. “그럼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열심히 해서 좀 여유 있게 살면 좋지 않겠소?”라고 합니다. 하다못해 강가에 가서 혼자 의연하고 아주 태평하게 앉아서 좀 생각할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 돼야 삶의 보람이 있는 거지 만날 뛰고 만날 그냥 허덕허덕하니 그놈의 게 사는 겁니까?
그래서 내가 방에만 있다고 해서 ‘산책도 하고 어디 구경도 나가고 그러지, 한 칸 되는 방구석에서만 있나.’ 이러겠지만 난 나가고 싶으면요, 나가요. 내 껍데기는 거기 두고 나가요. 이 법당에 내가 안 오는 줄 알죠? 허허허…. 그래도 가끔은 온답니다. 왜냐? 둘이 아닌 까닭이죠. 그렇다고 꼭 육체로 오는 것만이 오는 건 아니죠. 거기서 보고 있으면 벌써 내가 여기에 와서 예배를 올리고 있거든요. 허허허…. 가지가지로 용도에 따라서 내가 쓸 수 있고 할 수 있고 그런 거는 다 해요.
그래서 부처님 법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으로써 보살을 낳아 가지고 보살을 제각기 자유스럽게, 지장은 지장대로 지장이고, 관세음은 관세음이고, 약사는 약사고 이렇게 이름을 다 붙여서 그냥 응신(應身)으로 화(化)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됐죠. 백 사람이 깨쳤다 하더라도 일불(一佛)이에요. 그렇게 좋은 거죠, 너 나 할 거 없이.
내가 자꾸 이렇게 말하다간 질문할 시간이 없겠네. 그러니까요, 내가 뭐 듣기 좋으라고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분은 졸고 있을 테지만 말이에요,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들어 놓으면은 언젠가는 머리에 스쳐 간단 말입니다, 모른다 하더라도. 요다음 세상에 나올 땐 ‘아, 이게 이거구나! 이게 이거구나!’ 하는 걸 다 알게 되기 때문에 먹어 보지 않던 거, 자기가 써 보지 않던 거, 보지 못하던 것들을 귀띔을 해 주면은 요다음에 죽어서 이 세상에 아무 몸이나 받아 가지고 나와서 또 극도로 노력을 하고 고생을 하고 펄펄 뛰고 아파서 울고, 두드리며 울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될 수 있거든요. 나는 그걸 잘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식을 기르고 부모를 섬기며 중간에서 이렇게 살면서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울고, 안 돌아가셔서 울고…, 허허허…. 정말이에요. 늦도록 안 돌아가시면서 고통을 주니까 안 돌아가셔서 걱정, 빨리 돌아가셔서 그리워서 걱정, 이거는 그냥 매사가 사는 게 전부 그래요. 거기서 조금 낫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한 철 구름같이 살다가 구름같이 떠가는 거, 이 도리를 꼭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태자로 나왔을 때 ‘왜 사람은 병들고 늙고 죽나?’ 하는 의심을 가지고…, 정말 사는 거 같지가 않거든요, 자기도 늙어 죽으니까. 조금 왕으로 있어 봤자 신통치 않거든요. 그러니까 ‘아이, 병들고 죽을 걸 그까짓 거 몇 알갱이 산다고 내가 이거를 맡아?’ 하고 그냥 나간 거죠. 허허허….
그래 나가서 자기를 자기가 알고 보니까 ‘아하, 이렇구나!’ 하는 걸 알았더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여러분도 필연적으로 해야 할 일, 꼭 알아야 할 일 그리고 꼭 담당해야 할 일들이죠. 여러분이 진짜 자기 선장을, 자기를 이끌어 가는 선장을 진짜로 믿는다면 하늘이 지금 무너져서 가루가 된다 하더라도 아주 껄껄 웃고 있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이건. 이따가 죽는다 하더라도 지금 껄껄 웃을 겁니다.
나는 어디서 들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하고 가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것뿐이에요. 돈이 뭡니까? 내가 돈을 가지려고 애를 쓰면 돈이 오질 않아요. 주인공에다 맡기고 오직 주인공에서부터 나에게 그냥 스스로 갖다 주게 만들어야지 억지로 끌어 잡아당긴다고 해서 그 돈이 나한테 눌러 있는 게 아니에요. 억지로 끌어 잡아당겨서 내가 돈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건 한 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그냥 되나가요. 하루를 지냈다가 나가든지, 한 달을 지냈다 나가든지 나가는 거는 외려 더 이자를 붙여서 나가요. 그러니 내 것이 될 게 뭐 있습니까.
그러니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은 자꾸 잃지만 놔두고 다니는 사람은 아주 천 년 만 년 수만 년이 가도 자기 거예요, 전부. 그 왜 도둑맞게 짊어지고 다닙니까? 끌어다 놓으면 도둑놈 들어오고 강도 들어오고 그러는데 왜 한 푼이라도 내가 짊어지고 다닙니까? 안 짊어지고 다녀도 쓸 때 되면 다 들어오는 거, 다 주는 거, 그 주는 거 가지고 어떻게 살림을 잘하느냐에 따라서 또 준 사람들에게 공덕을 입게 하는 거거든요. 공덕이 있게 하는 거란 말입니다.
어느 대장부로 사는 사람이 돈이 많아서, 아주 어려운 고학생한테 돈을 한 보따리를 줬더랍니다. “너 이 돈을 사흘 만에 다 쓰고 오너라.” 이랬습니다. 그래, 나가서 십 리, 이십 리를 걸어가서 몽땅 쓰려니 어떻게 다 씁니까, 그 많은 돈을. 예전에는 차가 그렇게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돈 준 사람의 이름으로 학교를 지어 주기로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 돈이 다 들어가더라는 얘기죠. 그 이름 앞으로 몽땅 다 쓰고 자기는 쑥 빠졌단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 돈 준 사람이 말입니다, “너도 생각을 해야지, 심부름꾼도 생각을 해 줘야지 어째 안 해 줬느냐. 그 돈에서 우선 양복 한 벌은 사 입고, 구두 하나 사 신고, 모자 사 쓰고 그러고 가지, 이 멍청아!” 이렇게 웃으면서 말하고 등을 두드리면서 “너는 진짜 사람이구나!” 하더라는 거죠.
그런 거와 같이 사람이 마음이 정갈하면, 정갈하다는 건 ‘청정하다’ 이런 말도 되죠. 그런데 바다에 말입니다, 구정물이나 모든 오물이 안 들어간다면 바다라고 할 게 없죠. 안 그런가요? 대천 바다라고 할 수가 없죠. 어떠한 물이 들어가도 시간이 지나면 다 수습이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이 부처님 법문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바다’ 이러면 작은 우물과 같고 연못과 같지만, ‘한바다’ 이렇게 하면 구정물, 핏물, 고름물, 흙물이 다 들어가도 그 바닷물이 다 수습해서는 맑은 물로 되거든요. 그거를 청정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거를! 나쁘고 옳고, 더럽고 깨끗하고, 짧고 길고, 못생기고 잘생기고, 부자고 가난하고 이런 걸 몽땅 한데 합쳐서 우리가 둥글릴 수 있어야만 그게 청정이란 얘깁니다.
이제 그만하고 우리 토론할까요?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7년 12월 7일 법형제 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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