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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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을 약하게 보지 마시고 당당하게 좀 가지세요!
허허 웃을 수 있어야 웃을 수 있게끔 다시 돌아옵니다!

문 없는 문을 찾기 위해서는
똑바로 들어가지 않으면
통신이 되질 않아서 연결이 되질 않아요

마음 안으로 똑바로 들어가려면
질문: 저는 이번 수계 법회에 참석해서 또 연비를 받았습니다. 제 팔에서 피어오르는 향내음을 맡으며 눈물이 흘렀습니다. 부처님의 팔만경설은 저렇듯 서슬 퍼렇게 마음의 도리를 설해 주고 있는데 물질에 끄달리고 관습과 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저의 모습이 한심해서 말입니다. 정말 이 길에서 물러서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겠다는 발원이 세워졌습니다. 스님, 부처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마음 안으로 똑바로 들어가는 공부를 하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 설하여 주십시오.
답변: 팔만대장경을 보기 이전에 세상 돌아가는 거를 가만히 보십시오. 일체 만물만생이 죽었다 깨어나고 깨어났다 죽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오고 사계절을 통해서 수많은 생명들이 그렇게 봄이면 피고 또는 늦은 가을이 되면 단풍이 지고, 그러는 게 있는가 하면 사계절을 푸르르게 살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 인간도 좀더 차원이 높으면 사계절을 푸르르게 살 수가 있다는 얘기죠. 그리고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100% 다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 되기가 어렵고 또 인간은 됐으나 아주 100% 인간이 돼야만이 진짜 인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어린애를 탄생시켜서 놓으면 그냥 인간이라고 하긴 하죠. 그러나 100% 어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니죠. 그와 같이 여러분이 많지만 그 중에도 완전히 인간이 된 분이 있는가 하면 인간이 덜 된 분이 있고, 아직도 한창 자라야 할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도를 이루어도 견성한 것은 금방 태어난 아기와 같다고 그랬습니다. 둘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또 습을 녹이고 그래야 하기 때문에 또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알기만 하면 그건 도가 아닙니다. 내가 남에게 목마른 데 줄 수 있고 내가 먹을 수 있어야만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둘 아닌 도리를 알았으면 둘 아니게 나툴 줄 알아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얼마만큼 이것이 똑바로 들어가야만이 되는 겁니까? 지금 컴퓨터나 전자기계라든가 이런 것도 글자 하나만 틀려도 그것은 모두가 틀려 넘어갑니다. 숫자 하나만 틀려도 전부 틀리고요. 여러분 현재에 사시면서도 그러시죠.
그와 같이 우리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행선(行禪)이라고도 하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니까요. 곧장 직선적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볼 때에 팔만대장경에 어떻게 그것을 다 쓸 수가 있겠습니까? 팔만대장경이 아무리 잘됐다 하더라도 삼세(三世)를 돌아가면서 이 모든 병풍 둘러치듯 한 이 세계, 우주 만물 이 자체는 아마 ‘팔만대장경은 저리 가라’ 할 겁니다. 왜? 팔만대장경 자체가 그냥 고정되게 써 있지는 않지만, 여러분이 볼 때는 글자로 보이거든요. 글자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 글자 뒷면에, 백지의 뒷면에 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방 너머 세계가 있고, 서방 너머 세계가 있고, 남방 너머 세계가 있고 모두 이렇게 있듯이, 이 너머 세계가 다시 또 있고 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니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똑바로 직결로 들어가지 못하면 통과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문에 들어설 수가 없어요. 이것을 학술적으로 하고 경을 읽어서 한다면 문이 있는 것을 찾지만, 문이 있는 것 뒤에 문 없는 문이 있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 없는 문을 찾기 위해서는 똑바로 들어가지 않으면 통신이 되질 않아서 연결이 되질 않아요.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이끌어 갈 때에 ‘당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모두가 없고 당신이 태어났기 때문에 모두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너부터 알라.'' 이겁니다. 여러분, 각자 여러분이 나로부터 생긴 거지 내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이게 똑바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또 내가 있기 때문에 바로 나를 이끌어 가는 나의 선장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놓으라니까 “다 놔지지 않습니다.” 이러거든요. 왜 다 놔지지 않습니까? 모두 자기가 하는 건데요.
모두 그 껍데기 속에 알맹이가 있습니다. 알맹이와 껍데기가 둘이 아니게 만날 자기가 하고 있습니다. 잘했든 못했든 말입니다. 울게 된 것도 자기가 한 거, 웃게 한 것도 자기가 한 거, 즐거운 것도 자기가 하는 거, 슬픈 것도 자기가 한 거, 자기가 있으니깐 된 겁니다. 그 모두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어렵게만 생각하지 말고 간단히 나로부터 생각하세요. 잘하든 못하든 울든 웃든, 어느 누가 하는가? 그래서 자기로부터 상대가 생겼고 세상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자라면서 ‘어! 이런 거구나!’ 자라 가지고 ‘아! 세계는 이런 거구나!’ 또 어른이 돼 가지고 ‘아! 세계는 우주화가 됐구나!’ 이렇게 아는 겁니다. 자기가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움죽거리고, 보고 들이고 생각하고 하는 게 다 자기가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자기 아닌 자기가 하는 거죠. 부처님께서도 자기 그림자와 자기가 서로 싸운 겁니다. 둘 아니게 싸운 거죠. “너는 내 껍데기 아니야?” 껍데기가 하는 소리가 “너는 내 알맹이 아니야?” 하고 말입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지금 공부해 내려가는 그 모두는 여러분 자신이 하는 겁니다. 남이 해 주는 것도 없고, 남이 주는 것도 없고, 뺏어 가는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을 약하게 보지 마시고 당당하게 좀 가지시고 내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서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나를 아주 얕게 생각을 하고 나는 빼놓고 부처님을 위에 모신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거는 백날 가도 부처님 속에 같이 한자리를 못합니다. 얕보지도 말고 높이 보지도 말고 평등하게 나와 둘 아니게 보세요. 그러면서도 바로 과거에 살던 자기 조상이기 때문에 그 자기 조상으로 인해서 자기 조상을 상봉을 한다면 바로 그게 견성입니다. 일체제불의 마음과 더불어 같이 할 때 그때 이제 성불이고요. 일체 만물만생과 더불어 응신이 돼서 나툴 때, 그때에 바로 열반경지까지, 구경경지까지 이르게 되는 거죠. 말하다 말고 저 넘어갔습니다, 말하다가요.
그래서 우리는 울어도 자기요 웃어도 자기요, 못해도 자기요 잘해도 자기요, 망해도 자기요 승화가 돼도 자기예요. ‘몽땅 놔버려야 한다.’ 이런 것도 말입니다, 본래 몽땅 놓고 가는 겁니다. 왜냐? 내 몸속에 그렇게 자생중생들이 잔뜩 들어 있어서 같이 더불어 돌아가니깐 그놈의 게 전부 공(空)했죠, 네? 혼자 하는 게 한 알갱이도 없어요. 혼자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고, 말하는 것도 없고 혼자 하는 게 하나도 없으니, 이거는 내가 했다고 내놓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다 얻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다 얻어야 다 줄 수가 있는 거지 다 얻지도 못해 가지고 어떻게 남을 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똑바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또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배우지를 못해서 공부를 모릅니다
질문: 저는 선원에 나온 지 이제 1년 정도 된 노보살입니다. 그런데 항상 공부를 하라고 그러셔도 배우지를 못해서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나이가 들어서 다리가 아파 가지고서 자주 나오질 못합니다. 죽기 전에 어떻게 공부를 알고 가야 할 텐데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가르침 주십시오.
답변: 선원의 스님네들한테 자꾸 와서 배우세요. 자주 나오시다 보면 다리를 들어주는 데가 있을 거라고요. 이따금씩 그저 좀 잊어버릴 만하면 또 한 번 들여다보고 그냥 훌쩍 가고 그러니 뭘 알겠습니까? 그러니 다리가 부러지든 성하든, 한번 내가 지극하게 그걸 배워 보겠다 하고 자꾸 와지면요, 한 다리 층층대 이렇게 올려놓지 못한 게 또 한 다리 올라가고 또 한 다리 올라가고 그래요.
그리고 나무 아시죠? 나무! 나무뿌리가 있으니깐 나무가 살고 있죠? 그 나무는 댁의 몸뚱이고요, 그 뿌리는 나무에 달려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이란 이름만 알면, 그걸 뿌리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주인공 뿌리, 너만이 네 다리를 고쳐 줄 거 아니야?’ 하고 그렇게만 하시면 돼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시면서 자식들한테 “얘! 요놈들아, 널더러 돈 달래지 않을 테니까 저기 좀 데려다 다오.” 그러세요. 자꾸 데려다 달라고 그러세요.
돌아가시기 전에 그런 공덕도 세워 놓지 않고 어떻게 하렵니까? 자손들이 믿고 효도를 하고 모셔다 드리고 이러는 것만 스님네들이 봐도 댁의 다리가 훨씬 쉽게 나을 겁니다. 사람은 자식들이 그렇게 효도를 하면요, ‘어, 저렇게 애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또 지극하게 그렇게 하시는 걸 보면 ‘아휴, 저렇게 지극한데….’ 하고 오면서 가면서 다 보는 게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시면서 공부하세요.

장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질문: 스님, 얼마 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조그마한 장사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경기도 안 좋고 직장을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한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대부분 본전도 못 건지고 망한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새로 시작할 수도 없고 그냥 집에만 있을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무나 막막하고 답답합니다.
답변: 여러분 중에는 병고로 인해서 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회사를 하다가 망해서 오시는 분도 있고, 장사를 하다가 망해서 오시는 분도 있죠. 그런데 장사를 할 때는 육안으로나 심안으로나 다음 세 가지를 모두 종합해서 잘 챙겨 봐야 합니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며 거기에 맞는 어떠한 장사를 해야 좋겠느냐, 또 이자를 갚아야 하는 남의 돈을 얻어서 할 것이냐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무리 남는다 하더라도 남의 돈으로만 시작을 한다면 이것저것 갚고 나면 본전이 밑져 들어가고 그러기 때문에 잘 안되죠? 또 한 가지는 장소 문제입니다. 그 물건하고 장소하고 맞춰야 하는데 사람이 얼마만큼 쓸 수 있는 자리인가 하는 것을 한번 잘 보라고 해서 눈, 귀, 육근(六根)이 모두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육경(六境)과 육식(六識)을 다 종합해서 가지고 있으니만큼 그것을 잘 잡아야 될 거 아닙니까? 그거를 겉에서, 보이는 세계에서 잘 잡아 놓고, 마음으로써 ‘모든 것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주인은 바로 너밖에 없다.’ 하고 모든 것을 거기다가 맡겨 놓는 이 도리가 그대로 참선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대로 중용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지금 시작을 하는 분도 있겠지만 망한 분도 있습니다. 그러면 실패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다시 편안하게 할 수 있겠느냐? 누구든지 첫째, 내 마음을 안정시켜야만이 그것이 참선이자 좌선입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면 마음조차 편하지 못합니다.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면 몸속에 든 의식들이 다 편안치 못합니다. 수십억의 의식들이 말입니다. 내 마음 쓰는 대로 몸속에 들어 있는 의식들은 따라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을 가져오고, 망하게 되면 그냥 물질만 망하는 게 아니라 몸까지도 빼앗기고 맙니다. 그러니까 조심하라는 겁니다.
캠핑 나왔는데, 다 무너지고 도둑을 맞고 걸머진 거를 다 집어 갔어도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법이 있죠. 믿음이 진실하고 넉넉하다면 그걸 다 잊어버리고도 허허 웃을 수 있습니다. 허허 웃을 수 있어야, 웃을 수 있게끔 다시 돌아옵니다. 내가 아둥바둥하고 ‘이건 다 넘어갔으니까 다 죽었다.’ 하고 생각을 하면 그냥 생각하는 대로 몸이 망가지고, 몸이 망가지는 대로 가정이 불안하고, 헤어지게 되고 정말 죽게 되는 거죠. 이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묘한지 아십니까?
예전에 제가 가끔 말씀을 드렸지만 개구리가 개구리 알을 끌고 쭉 기어 올라가요. 그래 ‘저게 왜 그러나?’ 그러고 그냥 물끄러미 보기만 했습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끌고 간 지 몇 시간도 안 돼서 그냥 난데없는 소나기가 그 일대를 다 휩쓸었습니다. 하다못해 개구리도 비 올 거를 알고 제 새끼를 살리기 위해서 높은 곳으로 끌고 가서 올려다 놓는데, 하다못해 옥수수도 그 해에 어떠한 문제가 생길 걸 미리 알고 뿌리를 넓게 잡아서 쓰러지지 않게 자기 몸을 딱 세우는데, 하물며 사람이 내일 일을 생각 안 하고 오늘 덤벙대고 그냥 살 수 있겠습니까? 이 날아다니는 새들도 때에 따라서는 남의 집 얘기를 하는 수가 있습니다. “아이, 저 집은 너무 마음이 가난해서 생기는 게 없어.” 하고 새들이 안타까워서 지저귀고 이러지만, 사람들은 그 소리를 새소리로만 듣거든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만 그 모든 것을 서로 통신할 수 있는 한마음이 될 수 있을까? 항상 얘기를 했지만 공생(共生)·공용(共用)·공체(共體)·공식화(共食化) 하고 돌아간다고 그랬죠. 그리고 태양열을 끌어 쓰듯이, 자유자재권을 가지고 우리 마음 씀씀이에 의해서 어떠한 거든지 끌어 쓸 수가 있는 그런 재료가 여러분 앞에 다 주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에 어떤 병이 들어도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 이 네 가지로써 치료도 할 수 있고, 바깥 경계의 모든 것도 조절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는 겁니다. 이것이 말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 있기 때문에 실천을 하시라고 실천 공부를 시키는 겁니다. 실천하시라!
이 모든 것을 알고 실천하면서 자유스럽게 살려면 나부터 알아야, 나의 직결돼 있고 가설돼 있는 이 근본부터 알아야 그 줄을 붙잡고 모두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마음의 근본자리는 보이지도 않고 빛깔도 없고 아무것도 없죠. 허공은 안 그렇습니까? 잡히지도 않고 빛깔도 없지만 허공은 있듯이, 마음도 보이지도 않고 아무것도 없지만 역력하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움죽거리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실천을 하는 공부, 즉 말하자면 어떠한 거든지 재료로 삼고, 모든 것을 거기에 일임하면서 ‘너한테서 나온 거니까 너밖에 해결할 수 없다.’ 하는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가져라. 그리고 어떠한 용도든지 서슴지 말고 거기에 맡겨 놓고 그것을 실험하고 참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를 살리는 길입니다. 아셨지요?

스님과 한마음이 되려면
질문: 스님께서 소켓 얘길 자주 하시는데요, 예를 들어서 스님과 서로 마음이 맞아서 스파크 되는 순간에 한마음이 된다는 얘기를 하시는데, 제가 공부하면서 제 주인공과 스님이 둘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지만 자꾸 스님을 찾으려고 할 때 ‘주인공을 찾으면 되는데 왜 스님을 찾느냐.’ 그런 생각이 드는데 이 두 가지가 조금 혼동이 됩니다.
답변: 나무와 나무, 일체 만물만생이 다 때에 따라서 찾는 것이지 아무 때나 찾는 게 아닙니다. 부부지간도 그렇고 자식지간도 그렇고, 가족이 때에 따라서 내가 꼭 만나야겠다 이래야 만나지고, 이 말을 꼭 해야겠다 해야 하는 거지,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는데 그냥 찾는 법은 없거든요. 그러니까 용도에 따라서 스님이 이거는 꼭 들어야 되겠다 할 때에 자기 마음과…, 이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 영(0)에다 영을 넣으면 영 하나로 돼 버리고, 그것도 영이죠. 그러니 이 마음이 있는 사이 없이 있고, 하는 사이 없이 하고 진실로 현재에 나오는 사이 없이 나온다 이거죠.
그러니 아무 때나 부르는 게 아니라 급할 때 찾는 거죠. 예를 들어서, 어느 사람이 하혈을 막 하는데 급하니까 “스님, 스님 마음 좀 내 주세요.” 하고 전화를 했을 때 그때나 찾는 거지, 예를 들어서 꼭 그거에만 국한돼 있는 게 아니고 천차만별에 해당이 되죠. 사람마다 때에 따라서 급한 일이 있을 때가 있죠. 그럴 때는, 자기 마음이 부족한 듯한 생각이 있으면, 무거운 것은 한 손으로 드는 거보다 두 손으로 들어야만 거뜬히 들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일체 만물만생도 다 같이, 상황에 따라서 한 찰나에 일체제불이 들고 나신다 이런 겁니다. 일체 만물도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응신(應身)이 돼서 나투어 주시는 겁니다. 그 나툰다는 것이 같이 응해서 하나가 돼 준다 이 소리거든요.
그러니 평소에 마음을 쓰면서도 자기 근본에 항상 묻고 맡기고, 그 모든 것을 진실하게 맡겨나가신다면 쓸 일이 있을 때 필요에 따라 모두가 응해주시는 도리를 알게 될 겁니다.

이것이 어떤 경지인지요?
질문: 일상생활을 하다가, 또는 화두를 갖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확철대오 하면 모든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되고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일을 신통하게 안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떤 경지인지요? 스님께서는 단계 없는 세 단계를 말씀하시는 데 이것은 어떤 단계인지요?
답변: 실천해 봐야 알고, 봐야 알고, 들어야 알고 그렇듯이 댁에서 겪어 봐야 아마 알 겁니다. 그러니만큼 이치대로 얘기를 하려면, 사람을 다 낳기는 하되 애가 어른 노릇을 못하니까 어른이 될 때까지 수행정진을 한다는 거죠. 우리는 지금 어린애도 생산을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 얼른 쉽게 말하자면, 내 육신이 태어났지 정신이 태어난 거는 아닙니다. 그래서 내 육신이 태어났으면 바로 육신을 이끌어 가는 참나, 즉 정신을 태어나게 하면 그것을 바로 견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견성했다고 해서 다가 아닙니다. 그 견성한 자체를 키워야 하니까 그게 몇 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몇 년이 걸리든 이 안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체험을 하면서 자꾸자꾸 진행해 나가는 거죠. 그럴 때는 처음에 내가 탄생하기 전에 놓고 들어가듯이 모든 거를 또 놓고 들어가야죠. 내가 탄생한 후에도 이 체험하는 것을 또 놓고 들어가고, 그래서 이제 둘 아닌 도리를 또 알게 되죠. 둘 아닌 도리를 알게 되면서 그땐 어른이 됐다고 볼 수 있죠.
‘열반경지에 든다’ 이럴 때는 둘 아닌 도리에서 둘 아니게 화해서 나투면서 어느 만물만생이 원하더라도 응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즉 말하자면, 내 육신 속의 모든 의식들이 보살로 화해서 나투면서 돼지가 원하면 돼지 속에 들어가서 돼지가 되고 이렇게, 모두 중용을 할 수 있는, 광대무변한 법을 그대로 진행할 수 있는 법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에 능할 때, 이것을 도리천에 이르고 구경경지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렇게 돼야만이 그 모두를 그냥 말없이도 할 수 있고 말없이 알 수 있고 이런 것이지, 지금 견성도 못했는데, 내가 태어나지도 않아서 눈을 뜨고 볼 수도 없는데 그 얘기만 들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얘기만 듣고 아무리 책을 보고 그냥 뭐 무불통지했다 하더라도, 내가 이 물 한 컵을, 물 한 방울을 마실 수가 없습니다. 진행할 수가 없어요. 진실되게 실행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말도 필요 없고, 이론도 필요 없고, 무궁무진하게 아는 것도 필요 없다. 오직 내가 나를 발견하고 어른으로 키워서 또 늙어야 된다. 늙으면 생사도 없다. 생사에도 끄달리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없다’ 하고 ‘끄달리지 않는다’ 하고는 차이가 있는데 ‘없다’ 하는 거는, 들어가서 없다는 건 사실인데, 아래에 있든 중간에 있든 위에 있든 모두 포함해서, 어떤 사람에게든지 이해가 되게 하기 위해서 끄달리지 않는다는 소리가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한 걸음 떼어 놓고 한 발 딛고, 내가 귀머거리에서 벗어나고 장님에서 벗어난다면 그때서부터 공부입니다, 이제. 왜냐하면 지금은 나 찾기에 바쁜 거지, 그리고 나는 세 가지 두 가지를 한데 합쳐서 지금 가르치는 겁니다. 첫번에 유(有)의 법을 가르치고 두번째, 무(無)의 법을 가르치고 세번째, 유와 무를 한데 합쳐서 가르치고 했던 것이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나는 행주좌와(行住坐臥)를 그대로 가르칩니다. 그대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 고통이 오고, 애고가 오고, 병고가 오는데 어떻게 틀고 앉아서 그거를 합니까? 그러니까 애고가 오는 거를 오는 대로 밀쳐 나가고 타파해 가면서 공부를 해라 이겁니다. 그게 아주 제일 쉬운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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