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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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심, 평등심으로 바꾸면 모두 행복해요”
안성 활인선원 개원 기념 법문

법 사 : 고우 스님(조계종 원로의원, 금봉암 조실)
주 제 : 생활 속의 선수행
일 시 : 2008년 11월 9일
주 최 : 활인선원(선원장 대효)
장 소 : 경기도 안성 활인선원 대웅전

불교는 고행주의 아니야… 중도행으로 깨달으세요
부처님처럼 형상과 공 동시에 봐야 문제 해결돼요

제주 원명선원(선원장 대효)은 11월 9일 경기도 안성 죽산면 매산리 비봉산에 활인선원을 개원했다. 원명선원의 중앙연수원격인 활인선원은 대효 스님이 10여 년간 혼신의 힘을 다해 일군 도량으로 법당과 8개 동의 수련시설을 갖춘 간화선전문 수련원이다. 12월 24~31일 간화선 삼매체험과 단식수련회를 시작으로 매월 넷째주 토요일마다 참선법회를 여는 활인선원은 서울 인근에서 가장 큰 전문수련원으로서 조사선풍을 진작시키는 데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400여 사부대중이 동참한 개원법회에서 조계종 원로의원 고우 스님은 ‘불교의 본래의미와 수행의 필요성’을 주제로 생활 속의 참선법에 대해 법문해 큰 호응을 얻었다. 고우 스님의 선법문을 통해 ‘알아도 30방, 몰라도 30방’인 선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안다 해도 아직 문밖의 사람이요, 모른다 하면 송장입니다.”
선사들의 이런 표현에 대해 ‘어렵다’ ‘공허한 화두다’라고 말들 하지만 사실은 공허한 게 아닙니다. 오늘 활인선원 불상에 점안을 하고 낙성법회를 하는 뜻을 제대로 알고,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안다면 공허한 표현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화두는 선사스님들이 우리 손에 과일을 놓아주듯이 자비를 베푼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일이 뭔고 하면, 부처님이 발견한 세계입니다.
<법화경>에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큰 부자가 어릴 때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들도 집을 기억하지 못해 이 집 저 집 밥을 얻어먹으며 자랐습니다. 하루는 자기 집에 밥을 얻어 먹으러 가게 됐는데, 아버지가 한눈에 아들임을 알아차립니다. 당장이라도 “니가 내 아들이다”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굉장한 부자가 자기 아버지인 줄 믿지 못해 도망갈 것 같기에, 아버지는 일단 “너, 우리 집에서 마당이나 쓸고 살아라”하고 말합니다. 그렇게 아들이 집안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점차 중요한 일을 맡기고 나중에는 집안일 전체를 관리하는 집사에 임명합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너는 고용인이 아니라 내 아들이다. 이제는 주인으로서 집을 관리해라.”
아들도 정황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자기가 본래 부잣집 아들이었음을 믿게 됩니다.
이처럼 주인과 고용인으로 사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세계를 몰라서, 주인이 아니라고 착각하고 오해하면서, 우리는 고용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법문을 주고 받는 것도 주인이 돼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입니다.
옛날 당나라 때, 대주(大珠) 선사가 처음으로 강서(江西)에 이르러 마조(馬祖) 스님을 뵙고 예를 표하니, 마조 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디에서 왔느냐?”
“월주(越洲) 대운사(大雲寺)에서 왔습니다.”
“여기에 무엇을 구하려고 왔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의 보물창고는 살펴보지 않고, 집을 떠나 먼 곳을 헤매고 다니면서 무엇을 하는가?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데, 그대는 무슨 불법을 구하는가?”
대주 선사가 엎드려 절하고 물었습니다.
“무엇이 저의 보물창고입니까?”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그것이 그대의 보물창고다. 그곳에는 온갖 것이 다 갖춰져 있어서 조금도 모자란 것도 없고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데, 어찌 밖에서 헛되이 찾고 있는가?”
대주 선사가 이 말에 크게 깨우치고, 자신의 근본 마음을 알았습니다.
대주 선사가 깨달은 이 보물은 우리한테도 다 있으며, 아무리 써도 다 쓸 수가 없어요. 이런 게 있으니 주인노릇하며 잘 쓰고 행복하게 살라는 게 부처님 가르침의 목적입니다.
불교는 절대 고행주의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고행을 버리고 고행도 쾌락도 아닌 중도행으로 깨달으셨습니다. 법당에 붙여놓은 고행상을 떼어버리십시오. 자기가 가진 보물창고를 열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지 않고 갖게 되면, 우리의 존재원리를 알고 거기에 맞게 주인노릇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면 자기도 힘들고 주변 사람도 괴롭습니다. 집안의 가장이나 나라의 대통령이 그걸 모르고 산다면 더욱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우리보다 한 가지를 더 보는 게 무어냐?
그것은 바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즉,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와 액을 넘어섰다는 말입니다. 오온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인데, 이것은 간단히 말해 몸뚱이와 정신을 말합니다. 육체와 정신작용 등 일체가 공(空)했다고 하니까, ‘현상적으로 만져지는 게 있는데 왜 공이라 하는가’ 의심이 갈 것입니다. 사실, 공이란 무엇을 없애치우고 난 뒤의 빈 것이 아니라, 이 컵 그대로가 공입니다. 여기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이대로가 공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볼 때 32상 80종호를 갖춘 몸짱, 얼짱으로 봅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형상 이외에 한 가지를 더 보는 데, 그것이 바로 공입니다. 부처님은 형상과 공을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이걸 보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갈등과 대립, 개인의 마음속 고뇌를 하루아침에 없앨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갠지스강의 모래만큼 보시하는 것보다 이 구절을 외는 게 훨씬 공덕이 크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공이라고 하는가? 모든 것이 연기(緣起)돼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자들의 말처럼 수억만 개의 원자 덩어리가 여러분 눈앞을 왔다 갔다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의학자들은 우리 몸의 세포가 60조에 달한다고 말합니다. 단일하게 독립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포 덩어리가 모여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다에 바람이 불면 산더미 만한 파도나 집채만한 파도가 치거나 작은 물방울이 생기기도 합니다. 모양과 크기는 달라도 물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공(空)이 바로 이런 존재원리입니다.
우리 남녀의 성별을 다르게 보지만, 본질에서는 같은 성품입니다. 본질에서는 남녀도 생사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성품을 우리가 분리해서 이야기할 때는 자성(自性)이요, 연결된 것으로 이야기할 때는 법성(法性)이라 합니다.
여기서 제일 문제 되는 것이 나다, 너다 하는 분별입니다. 이 분별심만 제거하면 물질적, 정신적인 문제들이 모두 해결됩니다. 내가 독립돼 있다는 착각이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소통’을 이야기하지만, 그 분은 자기를 이해하고 따라 줬으면 하는 ‘일방 소통’이지 ‘쌍방 소통’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미국 대선에 승리한 오바마 당선인은 인종과 종교, 빈부를 초월해 모든 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다함께 더불어 잘 사는 길을 찾는 훌륭한 지도자로 보였습니다. 형상이 달라도 본질은 하나이듯이 차별심을 평등심으로 바꾸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지와 이파리를 딸 것이 아니라 뿌리를 해결해야 합니다. 모든 존재의 보편성이 바로 <반야심경>의 공(空)임을 알아야 합니다. 팔만대장경을 압축한 말이 이것입니다. 이 절 저 절 찾아다니지 말고, 부처님 법문 한 마디라도 깊이 이해하고 확실하게 믿어서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식당 주인보살님께 밥하면서 도 닦는 법을 일러준 적이 있습니다. “보살님, 손님을 돈으로 보면 많이 올 때는 좋고 적게 오면 짜증이 날테니 그러지 마세요. 손님이 보살님 집의 자동차를 사주고 집을 사주는 은인으로 생각하고 감사히 여겨보세요.”
손님을 은인으로 보기 시작하니, “어서 오십시오”하는 인사말에서부터 정성이 담깁니다. 친절한 마음이 전해지니 손님도 기분이 좋고 더욱 자주 오게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식당주인이 한달만에 너무나 장사가 잘 된다고 감사 인사를 하더군요.
이처럼 공(空)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해도 삶이 바뀝니다. <서장>에서는 도를 통하지 못해도 정견(正見)만 갖춰도 ‘도둑놈이 어디에 숨어있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지금 스위스에서는 천문학적인 예산과 1200여 명의 과학자를 투입해 최초의 물질 힉스(Higgs)를 찾기 위해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금강경>의 1250 비구와 숫자가 비슷한 것이 마치, 불법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런 실험이 이뤄지는 것만 같습니다. 불교는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 진리성을 입증받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을 이해하는 만큼 생활 속에서도 변화가 돼야 합니다. 깨달음에 대한 체험이 없더라도 생각이 바뀌면 바뀐 만큼 행동도 그만큼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위 ‘한 방’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목숨을 떼놓고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평생 공부를 해도 소득이 없습니다. <서장>에서도 앙산 스님은 언하에 대오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많이 알고 많이 듣는 것보다 일상의 실천이 소중합니다.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고 소통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리에 맞는 불자다운 삶이 될 것입니다.
정리=김성우 기자 buddhapia5@hanmail.net
2008-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