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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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 뜨는 게 최상의 공덕입니다”
참선안심법회 ‘수행과 원력’

법 문 : 수불 스님(안국선원장)
일 시 : 2008년 10월 25일
장 소 : 부산 미타선원 참선수행학교(설법전)

‘원력’은 혜안 열어 부처님 가까이 갈 수 있게 하는 것
수행 뒷받침되지 않은 포교사업은 모래 위에 집 짓기

수행을 빼놓고 불교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부처님께서 새벽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도 모두 수행의 결과였고, 또 그 수행의 결과를 일체 중생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도 수행을 통해서 무엇인가 이루게 하려는 깊은 뜻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로부터 ‘인천교(人天敎)의 어리석은 인연들을 어떻게 제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 수많은 조사와 선지식들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 훌륭한 수행법을 제시했고, 지금도 승속을 불문한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해 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대승불교(大乘佛敎)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직도 적지 않은 불자들이 인천교를 행하고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 안국선원장 수불 스님이 제시하는 인천교의 틀을 깰 수 있는 ‘수행(修行)과 원력(願力)’에 관한 법문을 함께 들어보자.



인천교의 수행은 기도나 염불 등 나름대로의 독특한 수행방법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 소승의 수행방법인 관법도 예를 들어 자비관, 수식관, 부정관, 백골관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더불어 대승의 수행방법으로는 지관법(止觀法)과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 같은 것이 있습니다. 최상승의 수행방법으로 돈오 견성케 할 수 있는 조사선 수행, 간화선(看話禪) 수행과 또한 묵조선(默照禪) 수행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차제로 발달해 나온 것은,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루고 그 뜻을 더 키워서 많은 사람과 더불어 함께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원력은 법당을 크게 짓고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아서 법회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목을 틔워서 좀 더 부처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으로 깨달음의 눈을 열 수 있는 인연을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대승불교의 핵심이라고 알고 있는 <금강경>의 일례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육조혜능 스님께서 <금강경>을 듣고 돈오를 두 번 하신 점입니다. 첫 번째는 나무꾼으로 계실 때, 어떤 선비가 <금강경>을 읽는 가운데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구절을 듣고서 개오했던 것입니다. 그 후 오조 스님을 찾아가서 8개월 동안 방아를 찧은 후, 선지식께서 친히 <금강경>을 해석해주시는 것을 들으면서 처음과 같은 구절에서 두 번째로 다시 계합하게 됩니다. 이렇게 돈오를 두 번 했는데, 앞의 돈오는 ‘점수적 돈오(漸修的 頓悟)’라고 할 수 있고, 뒤의 돈오는 ‘돈수적 돈오(頓修的 頓悟)’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눈을 뜨신 육조스님의 <금강경> 해석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돈교적 깨달음을 눈 열게 해줄 수 있는 오가해(五家解)식 해석을 이해해 왔고, 이와 같은 입장이 지금도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즉 “부처님의 뜻을 너무 잘 알고 있는 ‘해공(解空) 제일’ 수보리 존자가 주변을 돌아보니,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뜻을 알려고 애는 쓰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짐짓 모르는 척 부처님께 여쭙고 부처님께서도 그 뜻을 가납해주셨다. 수보리도 물론 부처님처럼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위신력을 지녔지만,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게 함으로써 그 뜻을 더 크게 드러내 보이도록 했다” 하는 식으로 이해하고 믿어 왔습니다.
그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금강경> 속에서 말씀하신 대승의 큰 눈을 뜬 입장에서의 설명도 해야만 합니다.
부처님을 믿고 의지한 수보리는 이미 혜안을 연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인연해 비로소 법안을 열고 난 후, 그는 너무나 감격해 체루비읍(涕淚悲泣) 하면서 말했습니다.
“혜안으로 있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 부처님 말씀을 듣고 새롭게 눈을 떴습니다.” 이렇게 수보리 존자가 심정을 토로하는 부분이 <금강경> 14품에 나옵니다. 그는 아직 모르는 바가 있어서 그 일을 잘 알고 있는 부처님께 직접 물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전체를 위해서 물어주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보다는 본인 스스로가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왜냐하면 수보리 스스로가 부처님과 동격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제자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는 이미 삼계를 초월해서 위대한 스승의 눈을 갖추신 분입니다.
수보리가 혜안의 눈은 열렸지만, 그것은 아직 상이 있는 유상(有相)의 입장이기 때문에 유여열반(有餘涅槃)의 상태였습니다. 그는 나아가 ‘무상(無相)의 눈이 열린 보살의 입장’ 즉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증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수보리는 이런 상태에서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모습을 가상하게 여기고 수보리에게 ‘유상의 입장’과 ‘무상의 입장’을 대비시켜서 설명해줌으로써, 그가 꿈을 깨고 유상에서 무상의 입장으로 넘어가게 한 것입니다. 보살은 명호만 있고 상이 없기 때문에, 지금 우리 앞에 현신해 계신다 하더라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상(無相)의 안목(眼目)을 열어야, 32상 80종호를 갖추신 불·보살을 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형상 없는 자리에 나아가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지 않고서는, 무상의 보살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 대승적 사고입니다. 유상의 입장이 점수적 돈오이고, 무상의 입장이 돈수적 돈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금강경>은 수보리의 예를 통해 우리에게 돈오점수를 넘어 돈오돈수로의 길을 지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승불교를 한다고 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인천교에 머물고 있는 어리석은 짓을 너무나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어떤 길로 어떻게 체계를 바꾸어서 안목을 열어야 원력으로 거듭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믿고 신심을 냈어도 조금만 가다 보면 회의가 오고, 또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는 막막한 심정에 빠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좀 더 교리적 이해를 열어 단계마다 그 수준에 맞는 얘기를 해드리고, 그 결과 마침내 돈오견성(頓悟見性)의 인연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수행의 눈을 뜰 수 있게 해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믿지 않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포교사업도 수행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마치 모래 위에 집짓는 것과 같이 어리석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지 않는 집단은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할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정신적인 가치관을 높여서, 물질적 균형과 정신적인 균형을 함께 맞추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포교는 수행이 전제된 것이어야 합니다. 수행이 없는 포교는 탁상공론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인기몰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한때의 유행에 따라 빠르고 멀리 퍼져나갈 수 있을지 몰라도, 종교는 궁극적으로 양이 아니고 질을 얘기해야 합니다. 물론 일반 사회는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서 숫자를 채택할 수밖에 없어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근거를 마련해줄 때에 사회 질서가 빨리 잡히고 더 정의로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인위적으로 질서를 잡으려고 해서는 일시적인 경우에 그칠 것이므로, 억지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인연이 된다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다시 <금강경> 인연으로 돌아가서 공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복과 공덕을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복은 형상을 가지고 있을 때 짓는 것입니다. 형상을 가지고 있을 때는 복을 짓는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공덕을 짓는다, 공덕을 쌓는다’ 하는 것은 형상을 가지고서는 못합니다. 그래서 ‘형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형상을 여읜’ 모습 없는 모습을 깨달았을 때, 공덕을 쌓을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양무제가 달마 스님을 만나, “천불 천탑을 쌓고 수없는 공양을 올리고 스님들께 다 넉넉하게 베풀었는데, 이 공덕이 얼마나 큽니까?” 하고 물었을 때, 달마 스님이 바로 “공덕이 없다”고 답을 한 이면에는 수행의 결과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형상을 가지고 남한테 많이 보시하고 희사를 하는 것은 복을 짓는 일이지 공덕을 쌓는 행위가 아닙니다.
최상의 공덕을 쌓는 것은 마음의 눈을 뜨고 부처님 전에 진정한 불공을 올릴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 전에 올리는 불공도 중요하지만, 자기 스스로를 자각하고 그 깨달음의 눈으로 또 다른 사람을 눈뜨게 해줄 수 있는 불공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것이 기도고 원력이고 수행입니다. 작은 수행이라도 실천하면 뒷날 큰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에, 늘 행해서 더 큰 눈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할 것 같으면, 사회인들도 능히 앞일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은 기업이나 단체, 가정에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크게 향상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방법을 통해서 수행할 때 가정도, 회사도, 사회도, 나라도 부강해지고 많은 인재들이 커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에 진력할 때, 포교는 저절로 됩니다. 수행을 하지 않고 포교만 계속하는 경우, 자칫 잘못하면 사사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왜 포교를 해야 되는지의 목적의식을 상실했을 때 오는 허탈감을 누가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습니까? 이는 결코 앞장서서 포교하는 분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포교의 노력들이 수행으로 거듭나서 실천됐을 때 올 수 있는 바람직한 결과를 멀리 내다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믿고 수행하는 인연을 심을 때, 원력은 한층 더 심화되고 커질 것입니다.
안목을 바꿀 수 있는 인연들을 많이 심으십시오. 그 결과로 여러 방면에 종사하는 분들의 눈이 바뀌어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고, 그 변화에 순응하여 더 많은 사람들도 함께 인연 맺을 수 있도록 거듭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교의 길을 걷는 불제자의 한사람으로서 늘 수행을 당부하고 싶고, 수행을 통해 안목이 열릴 때 원력은 지금보다 더 커질 수 있음을 간곡히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정리=박지원 기자 hdbp@hanmail.net
2008-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