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욕망 따라 몸 나타내 제도한 보살 화신
‘방편지혜’의 완성자 … 53선지식 중 한명
오탁악세에 물들지 않고 보리심 내 중생제도
<화엄경> ‘입법계품’에는 창녀 바수밀다가 선지식으로 등장한다. ‘바수밀다(Vasumitra)’는 세우(世友) 또는 천우(天友)라고 하는 뜻인데, 뛰어난 방편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교화한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구도여행 중에 찾아가는 53선지식에는 보살, 비구, 비구니를 비롯해 저자거리에서 법을 설하는 사람, 뱃사공, 음탕하다고 손가락질을 받는 여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과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 등장한다.
‘바수밀다’라는 이름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2004년 김기덕 감독이 만든 영화 ‘사마리아’를 통해서였다. 이 영화는 당시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던 원조교제를 다룬 문제작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여행비를 모으기 위해 원조교제를 하는 두 소녀 중 한 소녀가 결국 자살하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인도에 바수밀다라는 창녀가 있었어. 그런데 그와 잠만 자고 나면 남자들이 모두 참된 불자가 된대… 날 바수밀다라고 불러줄래?”
순진한 마음으로 원조교제를 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소녀는 선(善)으로, 애욕을 합리화한 사회라는 테두리는 악(惡)으로 대비한 듯 다양한 문제의식을 던진 영화였다.
바수밀다는 창녀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입법계품’에서도 선재동자가 그를 찾았을때, 사람들은 걱정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나 바수밀다의 지혜와 공덕을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바수밀다를 찬양하며 선재동자를 그에게 소개했다.
선재동자가 보살도 수행에 대해 법을 청하자 바수밀다는 이렇게 말한다.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해탈을 얻었으며 애욕의 근본을 여의었다. 그래서 나는 온갖 중생들이 좋아하는 애욕을 따라 여러 가지 몸을 나타내노라. 하늘사람이 나를 볼 때에는 나도 하늘아가씨가 되어 얼굴과 광명이 훌륭해 견줄 데가 없으며, 사람과 사람 아닌 신장들이 나를 볼 때에는 나도 그들의 형상대로 아름답게 꾸며 제각기 욕망을 따라 나를 보게 되노라. 어떤 중생이 애욕에 끌리어 나의 몸을 보고 불타는 애정을 참지 못해 술 취한 듯 덤비면 나는 그를 위해 여러 가지 법문을 말하노라. 그러면 그는 어느덧 애욕을 여의고 경계에 애착하지 않는 보살의 삼매를 얻게 되느니라.”
여기서 ‘애욕의 경계를 여읜 해탈’ 법문은 보살이 중생세계에 직접 들어가서 그들을 교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바수밀다가 ‘중생의 욕망에 따라서 몸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마치 관세음보살이 온갖 중생의 구조요청에 응해 제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는 선사들이 수행자나 일반인과 함께 생활하며 수행과 교화에 힘쓴다는 ‘이류중행(異類中行)’과 상통한다. 구도의 10단계를 묘사한 심우도(尋牛圖)의 최후경지인 ‘입전수수(入廛垂手)’ 즉, 시중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는 경지 역시 이를 상징한다.
바수밀다가 이어서 설법한다.
“어떤 중생이 잠깐만 나를 보더라도 애욕을 여의고, 잠깐동안 나와 말을 주고 받아도, 잠깐만 나의 손을 잡더라도, 잠깐동안 내 자리에 앉더라도, 잠깐만 나를 살펴보더라도, 나의 몸짓을 보더라도, 나의 눈 깜빡이는 것을 보더라도, 나를 끌어안더라도, 나의 입술에 입맞추더라도 곧 애욕을 여의고 보살의 온갖 중생들의 복덕을 길러주는 삼매를 얻나니….”
방편 지혜의 완성자인 바수밀다는 세속의 오염된 법을 행하면서도 스스로는 일념(一念)도 오염된 마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생도 오염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와 같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물들지 않고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리심을 발해 중생제도를 발원한 보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바수밀다는 많은 수행자들이 보리심을 내고도 애욕 때문에 위없는 부처님의 도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우려하면서, 대승의 큰 마음으로 그들을 포용하고 제도한 보살의 화신(化身)인 것이다.
서산 대사는 <선가귀감>에서 “수행의 요점은 오로지 자성(自性)을 오염(汚染)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물론 자성은 혜능 선사가 회양 선사에게 말했듯이 “물들이려야 물들 수 없는 자리”이며, 모든 부처와 중생이 공통적으로 가진 것이다. 부처와 중생, 너와 내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게 갖추고 있기에 자성은 단박에 깨칠 수 있다는 것이 돈오(頓悟)의 가르침이다. 김성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