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왔는지를 모른다면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서로 공생 공용을 하면서 공체로서 공식화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공식화하고 돌아가는 반면에 네가 있고 내가 있고 천차만별로 개개인이 있습니다. 차원에 따라서 말입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이렇게 만나게 되는 오늘의 이 자리를 너무나 기쁘게 생각합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인간이라 하면 ‘우리 이 자체가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마음과 마음으로써 내 마음과 몸을 다스리면서 모든 일을 꾸려 나가고 있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이거를 여러분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입산을 했든 입산을 안 했든 이 공부하는 데는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른다면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온 고장을 모르기 때문에 갈 고장도 모르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하라. 영원한 근본, 자기 뿌리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맡겨 놔라.” 이렇게 해도 ‘뿌리가 뭐 말라빠져 죽은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나 봅니다. 어떤 분들은 오신 지가 얼마 되지 않아도 과감히 놓고 가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7, 8년이 돼도 놓고 가지 못합니다. 이건 무슨 까닭일까요. 자기 마음으로써 자기를 다스리고 행을 하면서 그 행하는 자체가 바로 자기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거를 알고 모든 거를 놓을 수 있다면 될 텐데, 그거를 모르고 항상 방황하고 관습을 좇아서 ‘이거는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거는 저렇게 해도 안 되고’ 하고 끄달리고 가니 어떻게 걸림 없이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제일 시급한 것은 내가 나를 발견하는 것이고, 나를 발견했다면 상대를 발견하는 것이고, 상대를 발견했다면 세상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이 세상에 나오고부터 벌어진 일들인데도 나로부터 찾지 않고, 나로부터 생각해서 다스릴 줄 모르고, 나한테 닥치는 용도대로 모든 것을 그 자리에다 다시 입력을 해서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게 할 줄 모르고 이런다면 일일이 닥치는 것을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한다 이겁니다. 부처님께서 “인연 없는 중생은 어찌할 수 없느니라.” 하신 뜻도 거기에 속한다고 봅니다. 아무리 내가 수 해를 두고 수십 년을 두고 이렇게 해도 여러분이 그 뜻을 모른다면 항상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에 그 굴레에서, 업식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럼으로써 옷을 바꿔 입는다 하더라도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한 대로 옷을 입고 나오니 얼마나 부자연스럽겠습니까.
옛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죠. 지금 생활 속에서 살면서 벌어지는 일이니 옛날 얘기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잘 들어 보세요. 어떤 사람이 혼자 외로이 살다가 고양이 한 마리를 길렀더랍니다. 말할 데가 없으니까 고양이한테 항상 말을 걸면서 “너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저렇게 하면 잘하는 짓이고 이렇게 하면 이렇다.” 하면 그 말을 듣는 것처럼 눈을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더랍니다. 수 해를 그렇게 가다 보니까 고양이가 그 사람의 말을 그대로 알아듣더랍니다. 그대로 알아들어서 그대로 행하고 그대로 생각하고, 주인을 따라서 너 나가 둘이 아니게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는데, 친척이 재산 때문에 그 사람을 살해하고 재산을 송두리째 다 갖게 됐더랍니다. 그런데 살해해서 갖다가 버린 그 자리에 항상 고양이가 가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더랍니다. 자기는 사실을 알려 주는 거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야옹 야옹” 하고 고양이 우는 소리로밖에는 듣지 못하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탐정이 그래도 마음과 마음을 전달하는 그 요량을 알았던지 그 고양이의 심상치 않은 태도를 보고 거기를 파 봤더랍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그 시체가 나오고, 그래서 그 재산이 고양이 앞으로 다 갔더랍니다. 그런데 그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있겠습니까? 자기 주인이 죽었던 자리에 가서 그대로 몸을 벗었답니다.
우리가 이것을 얘기로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고양이의 옷을 입을 수도 있고, 개의 옷을 입을 수도 있고, 돼지의 옷을 입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천차만별의 옷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산 대로 말입니다. 그러니 옛날 얘기라고만 하겠습니까? 그전에도 여러분한테 말을 했지만, 더 기가 막힌 것은 사람의 의식이 남아 있는데다가 고양이의 모습을, 옷을 입고 나온다거나 개 모습을 하고 나온다거나 돼지 모습, 소 모습, 토끼 모습, 곤충의 모습, 저 나무의 모습 등 가지가지 모습을 가지고 나온다면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옥이겠습니까? 상대방들은 모두 옷 입은 대로 대접을 해 줄 겁니다. 독사 소굴에 들어가서 독사가 되었다면 독사의 대접을 해 줄 수밖에는 없죠.
그러한 고로 여러분이 지금 사실 때에 어떻게 살아야만이 잘 살 수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만이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이 아니게 중용을 할 수 있으며, 중용을 하는 데도 걸림 없이, 어떠한 거를 본다 듣는다 해도 구김살이 없이 자유스럽게 무명을 벗겨 줄 수 있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자기가 무명을 벗은 고로 어떠한 곤충에 이르기까지라도 보고 들으면 무명이 벗겨질 수 있도록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기가 자기를 알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칠석(七夕)이다’ 이럽니다. 칠석날! 일체 만물만생이 둘이 아닌 고로 종합적으로 여래라고 하는 거와 같이, 칠석이라는 이름은 종합된 이름입니다. 칠석! 그러면 또 칠성은 무엇인가? 그거는 개개인들의 성을 말하는 겁니다. 성을 항상 가지고 있으면서 떼려야 뗄 수 없듯이, 성 자체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성입니다, 그대로. 그래서 칠성은 개개인의 성일 뿐만 아니라 그 이름과 성을 종합해서 칠성이라고 이름을 해 놓은 겁니다. 그래서 북두칠성도, 어떠한 별성도 이 우주 천체가 우리 마음에 직결이 돼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있어서 마음대로 살 수 있게끔 하는 도리를 지금 배우는 겁니다. 여러분이 제가끔 자유스럽게 쓸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도, 자유스럽게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자유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못 쓰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칠석날 촛불을 켠다 이런 것은 우리가 마음의 밝음을 그대로 연결해서 내가 밝아짐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칠석날은 산 사람이 촛불을 밝히듯이 내 마음을 밝혀서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땅에서 싹이 났는데 그 싹은 뿌리를 모르기 때문에 칠석날을 만들어 놓고 누구든지 자기 뿌리와 더불어 마음을 밝혀라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이 자기 뿌리와 자기 싹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스님네들은 스님네들대로 물을 촉촉히 주면서 “마음을 밝혀서 네 뿌리를 보아야 된다. 네 뿌리가 일체 살림을 하고 가는 것을 알아야 한다. 들어야 한다.” 이렇게 가르치는 겁니다.
백종(百種)은 왜 생긴 건 줄 아십니까? 백종이라는 것은 그 말 그대로 백종입니다. 씨가 아직 땅속에 들어가지 않은 관계상 여러 신도님들은 부모를 위해서나 자기를 위해서나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씨는 다 마찬가집니다. 싹은 났으되 그 자기의 씨를 모르니까 말입니다. 살아 있을 때에 그 씨를 몰랐기 때문에 자기가 싹으로 그냥 있는 줄 알고 허공 중에 헤매는 조상들이,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스님네들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신도님들이 밭을 갈고 흙을 고르고 물을 촉촉하게 해 놓으면 스님네들은 씨를 심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 씨가 바로 싹이 되고 할 때에, 또 이런 점이 있습니다. 천도재들 많이 하시죠? 그런데 염불만 해서 천도가 되는 게 아니고 씨가 심어지는 게 아닙니다. 씨를 어디다 심느냐에 따라서 또 결과가 달라지죠. 또 씨를 심었다 하더라도 자기 씨에서 싹이 났다는 거를 그 조상의 영이 스스로 알 수 있게끔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스님네들의 소임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분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도 은연중에 자기 뿌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 자손들이 그렇게 해 놓으면 스스로 자기 마음의 뿌리도 알게 될 것이며 조상들도 마찬가지여서 양면이 다 알게 됨으로써, 즉 말하자면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얘깁니다.
그냥 절에 와서 촛불이나 켜고 향이나 피우고 물이나 떠 놓고 꽃공양이나 하고 “난 절에 갔다 왔어.” “나는 불교를 믿어.” 이렇게 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자기를 알고, 자기로부터 이 세상이 벌어진 걸 알고, 자기로 인해서 공용을 하고 돌아간다는 거를 알아야만이 바로 불교를 아는 것입니다.
불교라는 것은,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불(佛)이라는 것은 일체 만물만생의 생명의 근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종교를 막론해 놓고 다 생명 없는 것이 없으므로 불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말과 말로 전달해서 돌아가게 했고 천차만별 생명들의 모습들이 다 그 나름대로 전달하고 돌아갑니다. 우리가 미국 사람이면 미국말 하고 일본 사람이면 일본말 하고,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말 하듯 다 자기네들끼리는 말을 하는 겁니다. 말을 못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일체 만물만생이 다 말을 하고 전달하고 돌아가는 겁니다. 그 가운데 특출한 거는 뭐냐? 말없이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하는 도리입니다. 이게 정신계의, 바로 중용의 진리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전달돼서 돌아가는 이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의사나 과학자나 천체물리학자가 자기소임을 행하는 데 있어서 모든 문제들을 걸림 없이 타개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이 되는 거는 일체 우주 삼천대천세계 모두가 가깝고 멀고가 없이 전달이 됩니다.
그런데 병원만 하더라도 마음과 마음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학술 이론 등 지금의 지식이나 의학계의 모든 거를 동원해서 아무리 연구해도 100% 해결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 사람이 어디서 온 줄을 알아야 그 병도 어디서 온 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정신계의 50%를 충당할 수 있고, 거기에 물질로써 커버하고 뒷받침을 해 줄 수 있는 의료상의 50%가 종합돼야 우리가 100% 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기술 분야도 그렇고 어떠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어도 다 그러합니다. 기계 하나를 만들어 놔도 그 사람의 혼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것도 바로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장승을 하나 세워 놔도 장승 세워 놓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혼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가고 오면서 보고 생각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이 거기 투입이 돼서 다 신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조성을 해서 저렇게 모셔 놓으면 그 모습만 봐도 부처님이라고 생각을 하고 모든 마음을 거기다 다하기 때문에 여래라고 하기도 하고 부처님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없다면 부처님도 안 계신 거고 부처님이 안 계시면 우리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내는 것이 없다면 목석이 될 것이고, 체가 없다면 무효일 것이고, 정신계의 근본이 없다면 바로 또 무효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지금 제일 시급한 문제는 아주 높은 데고 낮은 데고 다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나부터 알아야 된다는 얘깁니다.
여러분에게 ‘주인공에 관하라’ 하니까 자기 빼놓고 주인공이 개별적으로 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주인공이 있다.’ 하니까 ‘주인공에다 해 달라고 그러면 해 준다더라.’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단 말입니다. ‘주인공! 당신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관해야지 ‘당신이 좀 해 주시오.’ 하면 그것도 기복이지요. 생각 자체가 아주 중요합니다. 주인공은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면 주인공이라고 이름을 지었는가! 한 가정을 한데 합쳐서 이끌어 가는 사람을 아버지라고 하듯이, 내 몸속에 있는 일체 생명들과 외부에서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자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몸속에 들어 있는 생명체도 너무 많으니 공생이지 그게 개별적인 자기 생명 하나입니까? 그래서 공생입니다. 내 내면의 세계에, 내 육체세계에 생명이 많이 들어 있는 것만 봐도 공생인데, 나로 인해서 또 혼자 살 수 없는 도리가 외부에 모두 있다 이겁니다. 항상 얘기하지만 아버지가 있어야 아들이 있고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가 있듯이, 회장이 있어야 사장이 있고 사장이 있어야 직원이 있듯이 이거는 양면의 한쪽만 없어도 무효입니다. 아니 됩니다. 작용이 될 수가 없죠. 그럼으로써 혼자 먹는 것도 없고 혼자 버는 것도 없고 혼자 쓰는 것도 없고 혼자 하는 것도 없고, 모두가 혼자 하는 게 없기 때문에 주인공이라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항상 여러분한테 얘기하기를, 공생 공용 공체 공심! 그러니까 주인공 아닙니까?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시면 내면에, 육체 속에 있는 그 많은 생명들이 저 좋은 대로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좋아서 먹는 게 아니고 여러분의 부하 직원이 달라고 하니까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인 혼자 먹는 게 아니라 직원들하고 같이 먹으니까 그 직원들이 바로 자기인 것입니다. 자기 수효가 그렇게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혼자 먹는 것도 없습니다. 혼자 보는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결부됐으니까 말입니다. 세포 하나하나가 간장이니 위장이니 심장이니 모든 게 한데 붙어서 정맥 동맥이 그냥 같이 돌아가는데, 혼자 사는 게 어디 있고 혼자 먹는 게 어디 있고 혼자 일하는 게 어디 있고 혼자 했다고 할 게 뭐 있습니까. 그러니까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자기 일상생활 그대로, 근본과 마음내는 거와 육신이 움죽거리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움죽거리기 때문에 육신이 움죽거린다는 거를 알면 내면의 모든 일체가 다 내 마음에 의해서 움죽거리는 걸 아실 겁니다. 내면에서 마음의 선장이 ‘이렇게 하자’ 하면 전부 따라 줍니다. ‘좋게 하자’ 하면 좋게 따라 주고, ‘도둑질하자’ 하면 도둑질하는 대로 따라 주고. 이렇게도 따라 주고 저렇게도 따라 주는데 그거를 왜 믿지를 못하고, 왜 거기다가 맡겨 놓으라는데 진짜로 맡기질 못합니까? 모두가 자기 아닌 자기인데, 전체가 자기인데 자기 이름을 수효대로 부를 수가 없으니까 포함해서 한마음 주인공이라고 이름을 한 겁니다.
간장 공장에도 소임자가 있고 위장 공장에도 소임자가 있고, 몸속에 전부 소임을 맡아 가지고 제각기 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몸속도 한 나라라고 친다면 한 나라입니다. 그러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대통령이 바로 마음입니다. 나라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대통령으로서의 그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이, 습에 끌리지 말고 못한다 한다에 끌리지 말고 단호히 당당하게 모든 거를 믿고 맡겨 놔야죠. 아니, 죽든지 살든지 같이 죽고 같이 살아요. 당신의 영혼의 근본이 떨어지면 당신도 송장이 될 뿐만 아니라 당신 몸속에 들어 있는 생명들도 다 같이 죽어요.
그러니까 다스리는 마음이 진짜 내 모든 생명의 의식들하고 통한다면 자기가 자기 죽이려고 하진 않습니다. 누구든 자기가 자기 죽이려고 나쁘게 하는 법 보셨습니까? 자기가 살 양으로 나쁜 짓도 하고 좋은 짓도 하지요. 그러니까 내 마음을 그 관습에 얽매이게 하지 말고, 또 안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네가 한 거니까 네가 그렇지 않게도 할 수 있잖아!’ 하고 다시 놓는 것이 자생중생을 제도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말로 하자면 복잡합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인연에 따라서 업식이 돼 가지고 자기 어머니 아버지, 정자 난자에 포함돼 가지고 자기 영혼에 다 붙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면세계에서 화가 나고 미운 사람 이쁜 사람이 있고, 죽이고 싶은 심정이 들거나 화가 나서 ‘에이그, 죽어 버리겠다.’ 하는 생각이 나거나, 다 그냥 흩쳐 버리고 어디로 가고 싶거나 하는 것들이 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업식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렇게 나올 때마다 거기다 다시 입력을 해라 이겁니다. 생명의 의식들은 바로 한 집에, 한 독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스리는 마음이 선장이 돼 가지고 잘 다스려 나가면서 제도를 해야 ‘아래로는 제 중생들을 제도하고’ 이런 문제가 나옵니다. ‘아래로는 자생중생 자기를 제도하면서 위로는 일체제불의 마음과 더불어 둘이 아닌, 자기 주인공과 둘이 아닌 도리를 항상 잊지 말 것이니….’ 하는 거죠. 이 모두가 습득이 돼서 잘 아신다면 참자유인이 될 겁니다.
진짜 떼려야 뗄 수 없는 자기 뿌리를 믿는 것인데 왜 못 믿습니까. 누가 형상을 믿으랬나요, 이름을 믿으랬나요, 허공을 믿으랬나요, 어느 스님의 고깃덩어리를 믿으랬나요? 가난하든지 부자든지, 모자라든지 모자라지 않든지 자기가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있는 거니까 바로 자기 뿌리를 믿고 거기에 다 놓으라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자기는 체가 없다고 해도 믿지를 않아요. 체가 없는 자기의식들이 너무 많아서, 한마음에 그 의식들이 너무 많습니다. 즉 어느 회사에 직원들이 수천수만이라면 회장님 한생각에 직원들이 다 움죽거리게 됩니다. 안 그럴까요? 이거 하라는데 저거 할까요? 그러니까 한 회장님으로서, 사장님으로서 의논을 하고 모두와 조화롭게 한번 결정을 해 놓는다면 모두 거기에 따라야 되는 거죠. 그렇듯이 내가 한번 과감하게 생각을 했다면 그대로 거기에 믿고 놔야만이 결정적인 결재를 하는 겁니다.
결재를 해서 내려야 모두 작용을 해 주는 겁니다. 안에서만 작용을 하는 게 아닙니다. 세포 하나하나에는 우주간 법계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다, 즉 말하자면 모든 걸 채근해서 좋은 거는 들이고 나쁜 거는 내보내고 이렇게 할 수 있는 바로 대기권이 있습니다. 우리 몸뚱이도 지구의 대기권과 같이 세포 하나하나에서 모두 소임을 맡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가고 들어오는 거를 다 채근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안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내가 한번 결정을 내리면 결재가 된 거와 같아서, 바로 마음에서 그럭하면 두뇌로 통신이 돼 가지고 사대로 통신이 돼서 전체가 결정적으로 작용을 하게 됩니다. 안에서는 안에서대로 결정적으로 작용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안에 고장이 났을 때는 안에서 모자라는 것은 뭐든지 다 보급을 해서 채웁니다. 호르몬도 모자란다면 채워 가면서 작용을 합니다. 또 바깥의 일들이 위태롭게 될 때는 바로 세포의 법계에서 의식들이 나가서 바로 마음과 마음속으로 들고 남이 없이 들고 나면서 조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들은, 일체 만법은 다 한마음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겁니다.
그렇게 한마음에서 이루어지는데 자기 마음을 자기가 정리를 못하고, 믿지를 못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된다 안 된다’ 그러면서 무슨 이유들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믿지 못하는 것은 자기 몸뚱이가 자기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뚱이가 자기가 아니라 자기가 너무 많아서, 이름도 많고 의식도 많은데 많은 그게 하나로 뭉쳐서 한마음으로 선장이 돼 있다는 사실이며, 그 뿌리가 바로 선장과 같다 이겁니다.
그런데 왜 믿지를 못하고 그렇게 허왕지왕 허왕지왕 해 가지고 업식 무명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자꾸 자기 마음이 자기 마음을 막습니까.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인 것을 그렇게 애탄지탄 착이 갑니까? 지금 가다가 죽으면 어떠며 지금 조금 덜 먹으면 어떠며 더 먹으면 어떠며, 더 살면 어떻고 덜 살면 어떻습니까? 왜냐하면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사실 의향이 있다면 이런 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아주 세련된 옷을 착 입었다 이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더 세련된 옷이 생겼어요. 그게 새로이 유행이 되고 그러니까 이것은 벗고 그것을 좀 입어 봐야겠다 이럽니다. 우리 인생이 그런 거와 같습니다. 죽으면 아주 죽는 게 아니고 사대가 흩어져서 원점으로 돌아가서 원점에서 다시금 생산이 되는 겁니다. 다시 생산이 돼서 다시 새로운, 즉 말하자면 유행되는 옷을 입고 다시 나오죠. 그런데 왜 그 구식의,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그게 떨어질까 봐, 그거 벗겨질까 봐 그냥 애씁니까? 내 마음대로 유행하는 옷을 입고 나올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도리를 아는 사람은 자기가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연연하지 않으니까 또 오래 살게 되는 거죠.
내가 길을 걷거나 절 안에 앉아 있거나 하더라도 한숨이 훅 그냥 맥없이 나옵니다. 그리고 고개가 뚝 떨어집니다. 내가 왜 그런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먹고 안 먹고 또는 죽고 살고, 이런 거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러분을 끌고 다니고 그렇게 많은 생명들을 자기가 집합소가 돼 가지고 끌고 다닌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리고 혼자 먹지도 않는 거를 혼자 먹는다고 하고 혼자 줬다고 하고 혼자 산다고 하니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습니까? 혼자 먹었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 많은 생명의 의식들이 ‘너 혼자 먹었으니까 혼자 알아서 해라’ 하고 이렇게 할 겁니다. 그러니까 일일이 걸려도 누가 손 한 번 대 주지 않아요. 한마음으로 도와주질 않는단 말입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요? 자기가 혼자 잘났다고 까분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어떠한 지경에 이르러도, 어떻게 죽게 돼도 손을 안 대 준단 말입니다. ‘너 혼자라고 만날 떠드는데, 내가 이렇게 만날 작용을 해 주고 이래도 너 혼자라고 그러는데 혼자 잘 해 봐라’ 이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덕을 쌓아야 됩니다. 우리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조금도 에누리가 없는 세상입니다. 남이 미워서 속에다가만 넣고 그냥 말로는 그런 대로 해 나가곤 있지만 속에다가 ‘조놈 두고 보자!’ 하면요, 그쪽에서도 역시 ‘너 요놈 두고 보자!’ 이렇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둘이 아닌데 뭐, 예전에 몰랐을 때의 내 모습과 같지. 둘이 아니야. 사람이 살다 보면 다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그러니까 그렇지 않도록 하는 것도 너밖에 없잖아.’ 하고 거기다 맡겨 놓으면 그쪽에서도 역시 아름다운 마음으로써 외려 회개를 하고 “아휴, 내가 전자에 자네한테 참 잘못했어. 참 미안해. 살다 보니까 새록새록 생각이 나.” 하고 마음이 아주 더 측은하고 참답게 진실한 친구로서 대하게 되죠. 그런데 이거는 가족끼리도 그렇지 못하게끔 울그락불그락하고 야단들이니 어떻게 화목을 찾을 수 있으며 어떻게 행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