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가수 나훈아씨가 괴소문을 참다못해 기자회견을 자청한 일이 있었다. 인기여배우와의 염문설, 야쿠자로부터의 폭행설 등 갖가지 루머에 시달리던 나씨는 ‘보여주면 믿겠느냐’며 바지까지 벗으려고 한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회견에서 나훈아씨는 ‘대한민국은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를 내는 나라’라고 질타했다. 언론의 자유를 빙자해 헛소문을 양산하는 악플러들에게 주는 경고였다.
최근에는 인기 탤런트 최진실씨가 괴소문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했다. 사채장사라는 헛소문을 유포시켜 만인의 사랑을 받던 한 재능 있는 연기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인터넷의 익명성 뒤에 숨은 비열한 살인자들은 무슨 억하심정인지 최씨가 죽은 다음에도 악플을 달았다. 망자에게까지 비아냥거리는 악플을 다는 것은 도의적으로도 옳지 않은 짓이다. 오죽했으면 그녀가 자살을 결심했겠는가.
두 사람의 경우만이 아니다. 신문이나 방송에는 유명인사들이 근거 없는 헛소문에 시달리다 못해 고소를 했다는 뉴스도 심심치 않다. 그럼에도 일부 지각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바퀴벌레처럼 어둠 속에 숨어서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장난삼아 던진 돌멩이로 개구리를 죽음의 언덕으로 내모는 것이다. 장난이든 의도적이든 책임을 면할 길이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런 일로 ‘세상 사람들에게 섭섭하다’고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또한 옳은 일은 아니다. 어떤 고통도 목숨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둠은 해가 뜨면 사라지게 되듯이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주지 못한 최씨의 인내심이 아쉽기만 하다.
남이 나를 모함할 때는 참고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좋은 모범을 보여준 분이 부처님이다. 부처님도 한때는 괴소문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그것은 전도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부처님의 명성이 퍼져나가자 이를 시기한 외도들은 손타리라는 처녀로 하여금 정사를 출입하게 한 뒤 임신했다는 소문을 냈다. 부처님은 억울했지만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다렸다. 얼마 뒤 그녀는 배에 찼던 바가지가 깨지면서 거짓이 들통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부처님은 더욱 거룩한 분으로 추앙받았고 모함자들은 쥐구멍으로 숨어야 했다.
사람은 누구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가슴에 두개의 ‘살(殺)’자를 품고 괴로워한다고 한다. 하나는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죽이고 싶은 살인(殺人)욕망이고, 또 하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自殺)의 유혹이다. 억울한 일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두 최악의 선택일 뿐이다. 최선은 첫째도 인욕, 둘째도 인욕이다.
물론 억울한 일을 참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적 가르침에서 지혜를 배워야 한다. 잡아함 42권 <빈기가경>은 그런 우리들에게 작은 위안을 주는 경전이다.
어느 날 외출을 나간 부처님이 뜻밖의 봉변을 당한 적이 있었다. 친족 가운데 한사람이 출가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외도가 부처님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다. 부처님은 듣기 거북한 모욕적 언사를 한참동안 참고 듣다가 그에게 물었다.
“젊은이여, 그대가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좋은 음식을 내놓았다고 하자. 그런데 손님이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그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는가?”
“그야 물론 내 차지가 되겠지요.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요?”
“오늘 그대는 나에게 욕설로 차려진 진수성찬을 대접하려 하는구나. 그러나 나는 그것을 받고 싶지 않다. 그러니 그 모욕적 언사들은 모두 네가 가져가야 할 것 같구나.”
이 이야기는 억울함을 당한 사람에게 주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있다. 하나는 남을 괴롭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과보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조금은 위로가 될 것이다. 또 하나는 모함이나 모욕을 받게 되면 무조건 참으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마음으로 극단적인 대처를 하면 자신만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홍 사 성
불교평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