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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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정수행(正修行)?<끝>
復次 若人能如是一切處中修行大乘 是人則於世間最勝最上無與等者 釋論偈中說
閑坐林樹間 寂然滅諸惡 澹泊得一心 斯樂非天樂 人求世間利 名衣好床褥 斯樂非安穩 求利無壓足 衲衣在空閑 動止心常一 自以智慧明 觀諸法實相 種種諸法中 皆以等觀入 解慧心寂然 三界無倫匹
어떤 사람이 일체 처소에서 이와 같이 대승 정 수행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세간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으뜸이어서 그와 겨룰 자가 없다.
여기에서는 ‘대지도론’을 인용해서 이 문제에 대해 밝히고 있다.

숲속에 한가히 앉아
고요한 마음으로 모든 악을 소멸하네
담박하게 증득한 일심
이 즐거움은 천상의 즐거움이 아니라네
사람들은 세간의 이익과
좋은 옷과 좋은 침상을 추구하나
이 즐거움은 안온이 아니니
이익을 구하는데 만족이 없기 때문이네
누더기 옷으로 텅 비고 고요한 가운데 있으면서
행동거지를 따라 마음이 항상 한결 같다네
스스로 지혜의 마음으로
제법실상의 이치를 관조하네
갖가지 제법을
모두 평등한 마음으로 관찰하고 깨달아
지혜의 마음이 고요하여
삼계에는 그를 짝할 이 없다네

‘부차(復次)부터 무여등자(無與等者)까지의 문장은 지관법문을 지닌 사람은 그 공덕이 불가사의 하다는 것을 찬미하고 있다. 그 사람은 여래 가업의 짐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자비와 지혜의 두 가지 법으로서 중생들을 포섭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세간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장 고상하여 그를 세간 사람들은 같은 수준에서 평등하게 짝 할 수가 없다.
‘숲속에 한가히 앉아’ 부터 네 구절은 속제 가관에서 진제 공관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모든 선 공덕이 뛰어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한가히 앉아 있다’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편안히 앉아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심란하게 시끄러운 것을 멀리 여의었다는 뜻이다. ‘숲속’이라고 하는 것은 세간을 멀리 여의고 세상 사람과 서로 왕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고요한 마음으로 모든 악을 소멸하네’ 라는 구절은 모든 선 공덕을 일으키고 일체 번뇌와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담박하게 증득한 일심’ 은 마음이 한결같이 담연하다는 뜻이다. 우리 중생들의 마음은 흉내 내기 좋아하는 원숭이와 같고 의식은 날뛰는 말과 같아서 동분서주하며 하루 종일 번뇌와 함께 한다. 그런데 어떻게 담박한 일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단정히 앉아서 제법실상의 이치를 생각해야만 이와 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몸과 손발이 편안하여 요동하지 않으며 마음까지도 항상 담박하여 산란심이 없어야만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즐거움은 천상의 즐거움이 아니라네’ 라는 것은 세간의 쾌락은 출세간의 쾌락과 비교되지 않는 것이 부처와 중생처럼 천양지차인 것을 말한다.
세간의 즐거움은 유루법이다. 이는 유위법으로서 생멸이기 때문에 즐거움이 끝내 무너진다. 하지만 출세간의 즐거움은 무루법이고 무위법이다. 무위는 불생불멸하여 끝내 파괴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즐거움은 유위법인 천상의 즐거움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제행은 무상이며 생멸법이라는 점이다. 생멸이 소멸하고 나면 적멸의 즐거움이 있는데, 적멸의 즐거움은 인간세상이나 천상의 생멸의 즐거움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속제 가법으로부터 진제 공관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이치에 대해 밝힌 것이다.
‘사람들은 세간의 이익과’ 구절부터 네 구절은 범부들이 어리석고 우치하여 진실을 미혹하고 도적을 자기 자식으로 잘못 인식하듯 허망을 실재로 여기는 것에 대해 밝혔다.
미혹하기 때문에 세간의 욕구를 떠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탐구하면서 생각생각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또 출세의 길로 달리면서 명예를 추구하기도 하고 상업을 하면서 재리를 도모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세간의 오욕 육진경계 속에서 갖가지 계교를 부리면서 탐구하는 마음에 싫증을 내지 않는다. 그들은 인생의 쾌락을 끝까지 다 맛보는 것으로써 목적을 삼기 때문에 쾌락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 따라서 세간의 쾌락은 안온한 법이 아니다.
‘누더기 옷으로 텅 비고 고요한 가운데 있으면서’라는 구절부터 네 구절은 생사를 벗어날 길이 있고 열반에 오르는 문이 있어 고통의 불에 타지도 않고 영원히 안온하다는 것에 대해 말하였다.
‘누더기 옷’은 출가한 사람을 가리킨다. 즉 발심하고 출가하여 거친 옷을 입고 담백한 음식을 먹으며 바위굴이나 수풀아래 머물면서 종일토록 부처님만 생각하면서 도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행동거지를 따라 마음이 항상 변함이 없는 것은 지 수행에 속하고, 지 수행을 통해서 지혜의 총명으로서 제법실상을 관찰하는 것은 관 수행에 해당된다.
제법은 의보와 정보를 말한다. 반야의 지혜를 일으켜 일체 의보와 정보인 제법을 관찰해보면 법마다 실상이다. 실상은 차별상이 없다. 그 이유는 세간의 일체제법은 모두 인연을 따라서 일어나 자체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범부가 집착한 유의 모습도 없고, 이승이 막혀있는 공의 모습도 없으며, 보살의 주관과 객관을 나누는 두 모습도 없고, 진제 속제를 떠난 중도의 모습도 없어 차별상이 없는데서 나타난 모습이 바로 실상이다.
‘실상에는 따로의 모습이 없다’는 것은 진제인 공의 의미이고 ‘실상은 차별상으로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속제인 가의 의미이며 ‘실상은 상이 없으나 상으로 나타나지 않음도 없다’는 것은 중도의 의미이다.
따라서 갖가지 모든 법 가운데서 평등한 마음으로 관찰하여 공관을 수행할 경우 한 법이 공하면 일체법이 공하여 가 가운데서 동시에 공하며, 가를 닦을 경우 하나가 가이면 일체가 다 가여서 공 가운데 가가 동시적이며, 중을 닦을 경우 하나의 중이면 일체가 중이어서 공과 가가 중도와 함께 한다.
중도 밖에 따로의 공과 가가 없고 공과 가 외에 중도가 따로 없다. 이 셋 가운데 하나를 들으면 동시에 공가중 삼제를 갖추고 공가중 삼제를 따로 말한다 해도 하나의 이치여서 셋과 하나가 두 모습이 아니다. 그 때문에 이를 두고 ‘제법을 평등하게 관찰함’이라고 하며, 또 ‘공가중 삼제를 원만하게 관찰함’이라고 한다.
‘지혜의 마음이 고요하여 삼계에는 그를 짝할 이 없다네’ 라는 이 구절은 지관을 수행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과 같은 수준으로 논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밝혔다.
여기에서 ‘지혜’는 스스로 수행하고 스스로 이해한 지혜이다. 이 지혜로 세간을 분명하게 관조하여 갖가지 제법을 낱낱이 다 평등관으로써 관찰하여 낱낱의 제법이 즉공 즉가 즉중 아님이 없음을 명료하게 통달하는 것이다.
지혜로 관조하고 나면 일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마음이 담연하고 적정하여 일체 경계를 따라서 요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수행자가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삼계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그와 짝할 수는 없다고 말하였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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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3 오후 1: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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