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서)
나는 이날까지 거짓말까지 해서 중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고, 거짓말을 해서 차원이 높아지려고 생각지도 않았고, 이름을 가지려고도 안 했습니다. 세상 살아나가는 과정 속에서 모두가 내 아픔 아님이 없는 까닭에 하는 것이지 이름을 위해서 이렇게 하진 않습니다. 이름이 빛나거나 이름이 높아질 걸 바라고 이러는 것도 아닙니다. 먹을 걸 잘 먹고 입을 걸 잘 입으려고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한테 거짓말을 하고 현혹을 시키고 이렇게 해서 이름이 나면 뭘 하겠습니까? 그 죄는 어디서 받고요. 또 죄 안 받으려고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죄를 내가 그렇게 다 받더라도 여러분만 잘 살 수 있다면, 물에서 사는 생명들이나 들에서 사는 생명들이나 여러분이 모두 다 평화롭게, 그러한 고생 없이 살 수 있는 상세계로만 된다면 나는 아무 흔적도 없는 가루가 돼서도…, 난 그렇게 각오가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되기가 무척 어려운 겁니다. 그렇게 반야줄이라도 쥐고, ‘내 자부처가 나한테 있다’ 하고 쥐고 나가기만 하셔도 그거는 반 이상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데에 대해서는 아주 기쁩니다.
그럼 여러 가지 말들을 했으니까 오늘 질문해 보세요.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괜찮으니까요.
질문자1(남) 스님, 안녕하십니까? 진주지원에서 왔습니다. 저는 2, 3년 동안에 교통사고가 네 번이 났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한번은 술을 먹고 운전을 하다가 접촉 사고가 났었습니다. 차가 폐차가 될 정도로 많이 상했는데 제 몸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마는 제가 내려놓는다는 마음으로 스님께 말씀드립니다. 주위에서 그 일이 있고 난 이후에 ‘너를 공부시키려고 이런 일이 있는 거니까 열심히 하라’면서 격려를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 이후에 또 사고가 한 번 났었는데 눈길에 차가 미끄러졌습니다. 사고가 나기 5분 전에 제가 관(觀)했었습니다. ‘주인공, 이거 바닥이 매우 미끄러운데 절대 사고가 나지 않게끔 잘 이끌고 가라’고 관한 지 한 5분도 되지 않아서 사고가 났습니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고 차만 많이 상했는데요, 마음을 그렇게 돌렸습니다. ‘아, 그래, 사람은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하다고 그랬지만 왠지 꺼림칙했습니다. 사고가 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사고가 났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그저께, 금요일날 진주에서 법회를 보고 선원에서 나오다가 인사 사고가 일어났었습니다. 제가 차를 몰고 가고 있는데 술 먹으신 분이 그냥 갑자기 차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순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큰 사고는 아니었습니다. 다행히도 다리를 약간 다치셨는데 병원에 가서 X-RAY 찍고 해 보니까 아무 이상이 없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참 고맙다.’ 이렇게 느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과연 관을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인가, 안 그러면 진짜로 그렇게 사고가 나야지만이 나하고의 그 인연이 해결이 되니까 더 잘되기 위해서 사고가 난 것인가?’ 하고 궁금해서 스님께 질문드리러 왔습니다.
스님 아까 상점 하는 얘기 했죠. 본인이 사고가 난다 안 난다를 떠나서 ‘너만이 사고 나지 않게 할 수 있어.’ 하고 항상 나기 전에 미리미리 해야지, 사고가 닥치고 얘길 하면 벌써 이미 차는 지나가. 그래서 아침마다 관하고 타라. 또 저녁에 내릴 때 감사하게 관해라. 그 차도 생각이 있고 생명이 있고 마음이 있으니까 그 차도 들어요. 차도 듣고 안의 주인공도 듣고 말이에요, 다. 그러니까 주인공, 자기 자부처는 자기를 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끌어 주는 거죠. 그러니까 열심히 해 보세요. 그것뿐이 아니라 다른 것도요. 그럼 알게 돼요.
질문자1(남) 그런데 스님, 그저께 난 사고도, 제가 밤눈이 좀 어둡기 때문에 밤에 운전을 잘 안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운전을 하면서 앞이 잘 안 보여 갖고 ‘아, 이상하다. 이거 너무 안 보인다. 이거 참, 주인공 잘 이끌어 가라.’고 그렇게 관하고 나서 얼마 안 돼서 또 사고가 났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 이게 아닌데…’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스님. 그래서….
스님 그것을 한번…, 생각하기에 달린 거거든요. ‘내가 이러고 했는데 왜 이럴까?’ 하고 마음이 얼떨떨해서 약해지거나 이런다면 안 되죠. 자기 뿌리와 자기 싹인데 어찌 된다고 해서만 믿고, 안 되면 안 믿겠습니까? 진짜로 믿어야죠. 그래 이거 공부하는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질문자1(남) 한 3, 4년 정도 됐습니다.
스님 그럼, 자꾸 해 보세요. 그것뿐이 아니라, 또 당신으로 인해서 남이 다치거나 또 딴 사람으로 인해서 내가 다치거나 하더라도 죄 없이 맞은 매는 빨리 낫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외려 내가 맞았으면 ‘저 사람 수고를 시켜서 나를 사람 되라고 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한번 해 보신다면 좋을 거예요.
질문자2(남) 예, 저는 안양 본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동안 스님 말씀과 살아오신 삶을 통해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스님께 먼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마음공부를 시작하는 초기에는 스님을 친견하고 싶어서 무척 안달복달했었는데 제가 오만해지는 건지, 아니면 신심이 약해지는 건지, 아니면 스님 말씀하신 대로 마음은 체가 없어서 스님과 마음이 통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요즘은 뭐 굳이 스님을 친견해야 된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담담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우연찮게 아주 영광된 기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먼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스님께서는 현세에서 ‘고’라는 것은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방편이자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결코 고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자비(慈悲)라는 그 한자를 풀어 보면 자는 바로 ‘사랑 자(慈)’이고 비는 ‘슬플 비(悲)’라고 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 바로 자애로움만 갖고는, 물론 저도 깨치지 못한 중생이어서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한데, 중생을 제도하는 데 있어서는 자애로움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따끔할 정도의 어떤 비원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악감정이 없이 비록 중생에게는 당시에 그게 고통일지라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하되 함이 없는 그 비원은 어느 정도의 기준으로 얼마나, 또 시간적으로 말씀드리면 어느 시간 정도 그게 지속될 수 있다고 보시는지 그 기준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스님 끝없이! 끝없이, 함이 없이 모두 하고들 가십니다. 이건 현실에 나와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끝없이 하고 가고 있어요. 함이 없이 하고들 가세요. 보는 사이도 없다. 보는 사이 없이 봤다. 금방 넘어가니까, 딴 거 봐야 하니까. 들은 사이 없이 또 딴 걸 듣는다 이럴 땐 함이 없이 하는 거다, 이렇게 되죠. 그러니까 이 진리라는 것이 무슨, 지속 된다 지속이 안 된다 이런 것도 없고, 그냥 물이 흘러 돌아서 또 돌고 또 돌고 그러듯이 말입니다. 그대로 끝없는 거죠. 끝없는 그 까닭에 바로 교차로가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거기에서 즉, 차원이 높아지느냐 더 낮아지느냐 여기에 따라서 생활이 주어지죠. 삶이 주어진단 말입니다.
질문자2(남) 마지막으로 스님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최근에 KAL기가 떨어진 괌이라든가, 또 KAL기는 아니지만 비행기 추락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죽은 캄보디아라는 곳이 과거 일제 시대 때 정신대 할머니들이 많이 끌려갔던 곳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구천을 방황하고 있는 원혼들이, 바로 그분들이 거기에 끌려가셨다는 것을 보이기라도 하듯이 연이어서 이런 사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 할머니들은 바로 스님 연배의 할머니들이었습니다. 스님이 마음을 내셔서 구천을 방황하고 있는 원혼들을 제도해 주시고, 현재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진상규명과 법적배상이 조속히 그리고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스님께서 원력을 좀 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스님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만약에 그 죽은 사람들이 과거에 끌고 간 놈들이라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항상 돌아요. 부처님이 앉아 계시면서도 그것은 해결을 할 수가 없죠. 왜냐? 그건 한 번 재판을 받아서 그렇게 됐으면 그 이미지는 없앨 수가 없으니까 다시금 돌려서 건지는 거죠. 예를 들어서 ‘왜 죽느냐? 왜 그렇게 됐느냐?’고 하는데 이 이유는 50% 정신계에 있는 거니까요. 그렇다 저렇다를 떠나서 한번 그렇게 바꿔 생각을 해 보십시다. 거기 끌려간 놈이나 끌고 간 놈이 있다면, 끌려간 놈은 끌고 가는 놈이 되고 끌고 간 놈은 끌려가는 놈이 되고, 이렇게 바꿔지거든요. 그게 인연이에요. 그런 거를 지금 요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선 ‘왜 이렇게 죽느냐, 사느냐?’ 이러면 말이 안 되죠.
질문자2(남) 예. 한 가지 제가 덧붙이겠는데요, 그 정신대 할머니들은 그런 고통을 어느 정도 종교적인 걸로도 많이 승화를 시키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인연을 맺은 끌고 간 사람들, 사실은 이 문제로 인해서 그 사람들에게도 어떤 영혼의 구제가 미쳐야 되지 않는가, 당장 그 사람들이 미워서 그런 게 아니고 이 문제가 어떤 인연된 한마음 공동체라면….
스님 말로만 종교를 믿고 좋은 일을 하고 좋은 말씀을 하셔도 이 정신계의 공부가 없어서 정신계의 뜻이 거기 포함이 되지 않는다면은 그거를 벗길 수가 없어요. 자기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머리를 짚으시며) 입력이 돼 있거든요. 그럼 현실로 나오게 돼 있어요. 그런데 그 입력을 없애려면 거기다가 다시 입력을 해야 앞서 입력된 게 없어지죠? 그런데 그 입력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모두 살고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인과로 인해서 업이 될 때에는…, 누구나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렇게 되나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정신계의 50%를 같이 봐라 이러는 거죠.
우리 신도님들 중에 가끔 그런 일이 있어요. 신도님의 일가, 신도님들의 형제간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그래, 사고가 나니까 이 형제분이 오시는 거예요. 와서 그것을 이렇게 해결하려고 그래도 전깃줄이 닿아야 어떻게 전기가 들어오게 하죠. 그렇건만도 그 인연으로 인해서 부처님께선 가끔 연기법으로써 그걸 해결을 하시죠. 하여튼 생각을 잘하고 잘 살아요. 열심히 한번 해 봐요. 그렇다면 종교가 따로따로 있는 것도 아닌 거를 알게 돼요.
질문자3(남) 스님, 이렇게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전지원의 선근회에서 왔습니다. 이번에 제가 영탑공원에 조상님들을 모시는 문제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저희 조상님들은 지금 부여에 있는 공동산에 모셔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기회가 있어서 천도재를 선원에서 여러 번 모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금년에 제가 천도재 한 부분과 공동산에 모셔져 있는 부분에 대해서 잠시 자신에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바로 네가 지금 전세 사는 거와 같으니라’ 하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비록 전세는 살지만 스님의 가르침을 지녀서 참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2년마다 자금을 마련하는 등으로 인해서 사실 많은 불편함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도재는 했다고 하나 그런 것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영탑으로 모실 마음을 냈습니다. 그런데 저희 친지분들께서는 그 부분에 많이 반대를 하시고 일반 산에 모셨으면 좋겠다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스님께서 설법하실 때 ‘육신은 두고도 혼을 전부 들어서 탑으로 모실 수도 있느니라’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스님 왜냐하면 거기가 3분의 1 조금은, 그건 뭐 치지도 않겠지만 반 이상이, 즉 남의 땅으로 돼 있거든. 안 그래요?
질문자3(남) 지금 현재 공동묘지로 돼 있습니다.
스님 그래. 그리고 자기 집이 아니지. 그거는 요만큼 그저 셋방살이지 그게 자기 집이 아니야. 그러니까 이 사람이나 그 사람이나 모두 셋방살이야, 셋방살이. 허허허…. 그런데 만약에 조상들 영령을 건져서 탑에다 모신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그런데 댁이 마음에서 좋으니까 영령들의 마음도 좋고, 그 영령들의 마음이 좋으니까 댁도 좋게 되는 거지, 한 염주알이니까. 부모들은 자식이 사 준 집에서 사는데 자식은 셋방을 산다 이런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소? 어떠한 마음이라도 내서 좋은 일이 되게끔 해 주실 거요. 나는 죽은 사람 따로 치고 산 사람 따로 치지 않아요.
질문자3(남) 감사합니다, 스님. 그런데 지금 저의 현실에서는 5대조부터 전부가 다 계시기 때문에 집안 친지분들이 모두 관련이 돼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이 영탑에 대해서는 아직 이해를 못하시죠. 제가 마음도 많이 내면서 하지마는 흐름이 같이 형성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요, 지금….
스님 그것은 다 그냥 놔두고도요, 위패를 써서 다라니에 싸서 영령들만 모시면요, 거긴 빈터가 돼 버려요. 육신은 사대(四大)로 다 가잖아요? 온기를 좇아서 가고 물로 좇아서 가고 흙으로 좇아서 가고 바람으로 좇아서 가는 거 아니에요? 흙 속이라고 바람이 없는 줄 아세요? 공기가 있기 때문에 다 썩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잘 하시고 팔자 좋게 사세요. 허허허…. (대중 웃음, 박수)
사회자 끝났습니다.
스님 어떻게 이렇게…. 그럼 내가 아까 그 얘기 길게 하지 않았으면…, 질문할 분이 두 분밖에 없었어요?
사회자 세 분….
스님 그런데 한 분….
사회자 세 분 했습니다.
스님 그것만 하고는 나더러 내려가라고 그러려고 그랬느냐고요? (대중 웃음)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사람 되기 어렵고, 부처 되기는 더욱 어렵고, 진짜 부처가 돼서 평등공법으로 삶을 살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겁니다. 우리가 진짜로 그거를 그렇게 해 보려고 애를 쓰지 마시고, 애를 쓰면 병고예요, 또. 허허허…, 애를 쓰지 않아도 안 되고 애를 너무 써도 안 된단 얘기죠. 그대로 자기 생긴 대로, 그대로 자기 모습대로, 또 분수대로 다 살면서 (가슴을 짚으시며) ‘오직, 그놈이 이렇게 움죽거리게 하는구나!’ 하는 거, 그것을 진짜로 아신다면 그저 급할 때 어떤 거든지 다 거기다 넣으면 바로 화해서, 딴 걸로 변해서 현실로 나오게 돼 있어요. 바로 우리 생활 자체가 심성과학이니까요.
과학이 따로 있는 줄 아세요? 무슨 물질과학 정신과학 이러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진리가 바로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 아니게 지금 돌아가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심성과학이에요. 과학 아닌 게 하나라도 있나 보세요. 어쩌면 그렇게 묘하게, 이거 보면 저거 보게 되고, 어떻게 묘한지 이 말 하곤 또 요 말 하고, 아버지 노릇 잘하고 남편 노릇 잘하고, 자식 노릇 잘하고 사위 노릇 잘하고, 형 노릇 잘하고 아우 노릇 잘하면서 자동적으로 그냥 이렇게 돌아가는 이것이 심성과학이지 뭡니까? 모두가 과학 아닌 게 어디 하나라도 있습니까? 벼를 심어서 추수해서 까서 밥해 먹는 거 보셨죠? 허허허…. 못 보셨습니까, 모두? 그것이 다 과학이에요. 과학 아닌 게 어디 있나요? 물질과학으로 자꾸 하려니까 과학 과학 따로 있는 것처럼 얘기하죠. 과학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어떻게 하든지, (물컵을 짚어 보이시며) 이 구멍이 한 털구멍이라면, 이 털구멍 하나가 만약에 자불(自佛)이라면 이 세상을 다 넣어도 남음이 있다 이런 소립니다, 털구멍 하나에. 그리고 모든 것을 여기다 집중해서 다, 그저 생기면 여기다 넣고 생기면 여기다 넣고, 그러면 붙을 게 없고 집착도 없고 그냥 그렇게 되면 멸도 없고 생사도 없고 다 없는 거죠, 뭐. 그냥 모두 한 털구멍에 다 넣어 버리는 거와 같이 바로 자기 자불에, 자불이 주인공이니까 그냥 주인공에 다 놔 버리시고 편하게 사세요.
예를 들어서, 병원에 가니까 암에 걸렸다고 그러는데, 암에 걸렸다고 의사들이 그러면 ‘이제 나는 죽었구나!’ 이렇게 생각들 해요, 모두. 그래 가지곤 의사한테 매달리는데, 그게 바깥으로 끄달리는 거죠. 의사한테 100% 다 그냥 매달리고 비비는 거예요. 그러나 의사인들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 반은 분담을 해서 의사 반, 나의 마음 반, 이것이 돼야 됩니다. 자기 뿌리만이 자기 싹을 살릴 수 있다는 그 믿음! 그리고 의사도 자부처의 인연으로 만난 거니까 그것도 또 딴 손이 아니죠. 그렇게 해야 할 텐데 ‘주인공은 뭐 하는 주인공이야? 주인공 이름을 불러도 뭐 나오지도 않고….’ 이렇게 해요, 글쎄. 그러니까 자기가 색경을 보면 자기가 있다는 걸 볼 수 있는데, 색경을 보지도 않고 자기가 없다는 거죠. 그럼 못 믿는 것도 자기가 자기를 못 믿는 거지, 그게 뭡니까?
자기 자신(自神)이라 하는 게 있어요, 자신! 자신이 어려서부터 쭉 형성돼서 나올 때까지, 왜 삼신할머니라고 그러죠? 그 이름을 삼신할머니라고 붙였으니까 그렇지 ‘자불’이에요. 자불이 그렇게 길러서 백일 때까지 그 과정을 모르게 딱 정돈해 놓곤 그때서부터 바깥에 있는 모든 거를 배우게끔 만들죠. 자불이 수없이 겪어 오면서 자기를 형성시키고 또 진화시키고 이래서 인간까지 올려놓았는데도 그게 없다는 거죠.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죠. (손가락을 하나 세워 보이시며) 주인공이라는 이름을 말하는 게 아니죠. 아주 자기의 근본 자불이죠, 자불! 그 자불이 아니라면 지금 여러분이 같이 이렇게 앉아 있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죠, 송장이니까요.
지루하시죠? 허허허…. (합장하시며) 그러면 요다음에 또 만나십시다. 나는 말이에요, 아휴, 할 말을 못 하고 말이에요. 말은 했는데 그 속의 뜻을 전달하지 못해서 해도 한 것이 아니고…. 아이구 참 내! 허허허…. (대중 웃음) 아이구 참!
아까, 비행기 사고로 왜 죽었느냐? 스님은 그러지 않게 할 수 없겠느냐. 왜 죽었느냐, 왜 죽느냐, 왜 자꾸 일이 생기느냐, 벌어지느냐 하는데요, 그 이유가 없다면 그렇게 되질 않아요. 하나하나가 모두 이유가 있어요. 그런 거를 내가 어떻게 말을 합니까? 보이지 않는 거를 말을 했다가…, 허허허…, 그냥 보이지 않게 여러분을 좋게 한다거나 또 여러분을 아프지 않게 한다든가, 여러분을 좀 살게 한다든가 이런 거는 말없이도 할 수 있는 거지마는 그런 질문의 대답은 참, 어려운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