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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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정수행(正修行)?
六意知法中修止觀相 如初坐中已明訖 自上依六根修止觀相 隨所意用而用之 一一具上五番之意 是中已廣分別 今不重辨 行者若能於行住坐臥見聞覺知等一切處中修止觀者 當知是人眞修摩訶衍道 如大品經云 佛告須菩提 若菩薩行時知行 坐時知坐 乃至服僧伽梨 視?一心 出入禪定 當知是人名菩薩摩訶衍
여섯 번째로 의근으로서 지관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 밝히고 있다.
의식은 색성향미촉 등 전오진이 의식에 떠오른 낙사영자(落謝影子)인 법진의 모습을 인식한다. 이 문제는 이미 앉아서 지관을 수습하는 장에서 자세히 밝혔다.
다섯 가지 인연이 화합해서 의식이 일어나는데, 다섯 가지란 아홉 가지 인연가운데서 명(明), 공(空), 근(根) 등 세 가지 인연과 분별의연(分別依緣)을 제외한 경(境) 작의(作意) 근본의(根本意) 염정(염정) 종자(種子) 등을 말한다.
의식은 세력의 작용이 다른 식보다 광대하여 시간과 공간에 구애없이 보편하게 일체법을 인식하여 삼경(三境)에 두루 통한다. 또 의식은 삼량(三量)까지도 모두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 의식을 훌륭하게 사용하면 팔식 망상을 전환해서 사지보리(四智菩提)를 이룰 수 있겠지만 잘 사용하지 못하면 보리열반이 전환하여 번뇌생사를 이루게 된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의식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본이 될 수도 있고 모든 선의 뿌리도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중생이 생사로 윤회하느냐 아니면 열반의 안락에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는 오직 이 의식의 작용에 의할 뿐 다른 물건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인식대상인 삼경을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성경(性境)이다. ‘성’은 자체성질이라는 의미이다. 안식으로부터 신식에 이르기까지 전오식과 제팔식이 인식하는 색 등 오진인 실재경계의 모습에서 그 대상에 대해 명칭과 언어를 일으키지 않고 계산하고 헤아리는 마음도 없이 자체 있는 모습 그대로 인식한다는 뜻에서 성경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로 독영경(獨影境)이다. 영이라는 것은 그림자의 모습인데, 이는 상분의 다른 명칭이다. 그것은 허공 꽃, 토끼 뿔처럼 명칭만 있을 뿐 실재가 없는 것과 과거 미래에서 환상 변화로 나타난 제육의식의 상분경계를 말한다. 다시 말해 실재 종자가 없이 독자적으로 의식 속에서 나타난 상상으로 구성된 경계를 독영경이라고 한다.
세 번째로 대질경(帶質境)이다. ‘대’라는 것은 함께 끼고 합한다는 뜻이고 ‘질’은 체질의 의미이다. 이 경계는 본질 상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 본질을 실재와 같이 살피지 못하고 잘못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제칠식의 견분이 인식하는 상분 그림자는 제팔식 견분인데도 그것을 주재하는 자아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이다. 또는 제육의식이 새끼줄을 뱀으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
삼경을 인식하는 삼량은 현량(現量) 비량(比量) 비량(非量)을 말한다.
현량(現量)은 환하게 드러난 것을 헤아리는 것인데, 전오식이 목전에 환하게 나타난 오진경계를 마주하였을 때 자체모습 있는 그대로를 분별없이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비량(比量)은 과거에 인식했던 것과 현재를 서로 비교해서 추리하고 헤아려서 인식해 아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담장 밖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그 아래에 불이 있다는 것을 과거의 경험으로 비교 추리해서 아는 경우이다.
비량(非量)은 대상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말한다.
삼량은 육식이 분별하는 인식의 주체이고, 삼경은 인식 대상의 경계가 된다.
앞에서는 이미 열거했던 육근가운데 각자마다 육진경계를 마주한 상태에서 지관 수행을 하는 방법을 말했다. 이를 의거해서 말해본다면 그 숫자가 여섯이기는 하지만 본성 자체 가운데는 여섯이라는 간격이 본래 없다. 왜냐하면 본성 가운데서는 육근의 작용을 통일된 모습으로 알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육근으로 간격이 막히지 않는 하나의 본성을 본래 가지고 있어 오묘하고 밝은 마음이 항상 육근을 통해서 지혜를 발하여 선악과 주관 객관의 상대적인 모습을 본래 얻을 수 없지만 단지 중생은 이 같은 본성을 미혹하여 번뇌의 장애를 받을 뿐이다.
결국 본래 있는 진심이 간격이 없는데서 간격이 생겨 내 마음의 보리 열반을 위배하게 되어 보는 것은 색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귀는 소리를 듣는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다.
가령 색을 보아도 보는 마음을 돌이켜 자성의 색을 보고, 소리를 들어도 마음을 돌이켜 자성의 소리를 들으면서 육근 가운데서 하나의 근만 근원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나머지 오근 모두 동시에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엔 안근이 색을 볼 뿐만 아니라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감촉을 느끼는 등 모든 육근의 작용을 동시에 일으킬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육근가운데 하나의 근이 모든 육근의 작용을 동시에 걸림없이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열반경’에서는 “여래는 하나의 근으로 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구별하고 감촉을 느끼고 일체법까지도 안다”라고 하였다.
하나의 근이 그렇다면 나머지 근도 역시 이와 같다. 이것이 바로 육근이 상호간에 걸림없이 작용하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아나율타 존자는 눈이 없었으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고, 발란타용존자는 귀가 없어도 들을 수 있었고, 극가신녀는 코가 아니어도 냄새를 맡을 수 있었으며, 교범발제는 혀가 없어도 맛을 알았으며, 순야다신은 몸이 없어도 감촉을 느꼈으며, 마하가섭은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지혜가 원만하고 총명하여 명료하게 알았다. 이러한 사례 등이 육근이 걸림없이 작용한다는 증거이다.
마하연은 대승을 의미한다. 수행하는 사람이 모든 시간 가운데서 전일하게 지관을 수습한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대승의 도를 진실하게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대품반야경’에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고하기를 “보살이 행할 땐 행할 줄 알고 앉을 땐 앉을 줄 알며 대가사를 입거나 눈으로 살피거나 깜짝하는 순간에도 지극한 일심으로 선정에 출입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어떤 행동,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사량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일심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심이란 두 마음이 아님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으로 선정에 안주해야만 하는데, 이것을 ‘걸어가도 선이고 앉아도 선이어서 행주좌와 견문각지에서 마음이 자연스럽게 선정을 이룬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자리이타를 행하는 보살 가운데 대보살인 보살마하살인 것이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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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3 오전 1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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