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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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사람 많아도 깨어있는 사람 적어요”
강 사 : 우희종(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 교수)
주 제 : 복잡계 이론으로 본 깨달음의 구조
일 시 : 2008년 9월 6일
장 소 : 우리함께회관 6층 선우법당
주 최 : 우리는선우 9월 정기법회

한국 종교계는 현재, 종교자유 질서를 파괴하는 종교편향의 소용돌이에 있다. 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만행이라면 무죄가 성립되는가. ‘우리는선우’ 성태용 이사장(학진 인문학단장ㆍ건국대 철학과 교수)은 법회를 열며, “종교의 장점이라면 물론 ‘관용’도 있겠으나 한국의 현안을 마주한 이 때 불교야 말로 사회 질서의 가장 중심이 돼야 할 종교”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인가. 불교계가 반성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범불교도 행동이 불교를 넘어 불교계가 경각심을 일으키는 운동으로 전개되길 발원한다”면서 ‘복잡계 이론으로 본 깨달음의 구조’를 주제로 한 우희종(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 교수의 강의를 청했다.

종교 갈등이란 사회ㆍ경제적 입장 차이가 아닙니다. 모든 이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심각한 후유증을 남깁니다. 지금 같은 때에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호국불교라는 이름으로 기득권이었던 불교입니다. 그러나 밖에서 큰 그림으로 보면 70~90년대를 거치는 동안 과연 민중과 함께 한 불교였냐고 묻습니다. 친정부적인 불교와 거리가 멀었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작금의 상황에서 우리 불교계는 진지한 참구를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명확한 것은 종교로 인해 인간이 피해 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불자는 자성의 깨달음을 통해 부처의 삶을 닮고자 합니다. 한국불교는 간화선을 표방합니다. 화두는 오매일여(寤寐一如)로서 자나 깨나 성성한 본래 성품을 보도록 하죠. <금강경> 설법을 들은 제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이 사회는 관념화된 깨달음이 강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항상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간화선도 좋은 수행입니다만 지금은 되돌아보는 수행이 더욱 강조돼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 부처님은 悟者인가, 覺者인가?
누가 무엇을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가? 돈오(頓悟)가 지향하는 바가 수행의 끝점이라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각자이지 오자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깨달음과 깨어있음이란 무엇일까요. 한국불교의 간화선은 오(悟)를 강조하고 있지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깨달음을 강조한 <화엄경>에 주목합니다.
현재 나는 어디 있는가. ‘나’라고 하는 개체고유성이 있습니다. 아상(我相)이라 하지요. 그 안에 심리적인 관계가 있고 주변과 사회적 관계에서 점차 자연의 관계로 확대됩니다. 나는 개체고유성으로서 하나입니다. 각자 모양대로 아름답게 어우러져 사는 ‘화엄’입니다.
2000년대 들어 주목받는 복잡계 이론은 정신적인 신경과 신체적인 자기 면역으로서 개체고유성을 인정합니다. 사람은 태어나 섭취를 통해 육체는 성장하지만 신경과 면역은 반드시 외부 자극에 반응하고 기억하면서 지금 이 자리의 나를 형성합니다. 관계의 총체적인 누적에 의해 결정된 나입니다. 즉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계에 의존해가는 것이죠.

# 의미와 가치의 창발현상(Emergence)
깨달음의 구조와 복잡계 구조의 특징은 연관이 깊습니다. 물질이 모여 관계의 맛을 냅니다. 관계에 의해 완성된 바람직한 맛으로 불자들은 관계를 심화해 어느 한 순간 창발이 일어나 깨달음을 얻습니다.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었을 때 부분 안에 전체의 모습을 갖는 무한한 단계의 모습, 이것을 ‘프렉탈(Fractal) 구조’라고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바이러스가 반복의 관계성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스케일의 대소와 상관없이 고정적인 문양을 지니죠. 이것은 자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연 현상은 간단한 듯 반복되지만 전혀 간단하지 않죠. 그것이 바로 ‘만다라’입니다. 만다라 구조를 보면 반복과 기하학을 발견합니다. 신경정신과의사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나의 전체성ㆍ통합성ㆍ총체적인 나를 표현한 것이 바로 만다라’라고 정의했습니다. 전체로서 나를 표현했다는 의미죠. 이것은 고승들이 깊은 명상에 들어가서 경험하는 반복 체험입니다. 깨달음의 주체는 몸을 매체로 개체고유성이라는 생명현상을 나타냅니다. 창발적 생명현상인 개체고유성은 구체적 실체가 없는 관계에서 비롯합니다. 각각의 관계 속에서 다양성을 지니죠.
지구가 만들어진 빅뱅이 있습니다. 나의 부모를 거슬러 올라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으로 거슬러 가봅시다. 누적된 150억 시간이 현존하는 인간이 지니는 시간의 나이테입니다. 나의 원인을 돌이켜 뿌리를 찾을 때 우리의 나이는 150억년입니다. 인간은 가치를 잣대로 다양성을 망각하며 차별합니다. 모든 것이 각각의 모양새로 존중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차별은 우리 사회에 만연합니다.
승찬 선사는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 했습니다. 차별 없는 곳에 차이가 그대로 드러나면서 화엄 세계를 장엄합니다. 각 구성 요소의 상호 작용에 의해 창발적인 구조로 진화해 가는 것, 이것을 복잡계 이론이라고 합니다. 혼돈과 질서의 경계에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이 있습니다. 이를 화엄 세계라고 합니다. 깨달음과 연결되는 복잡계 현상의 특징은 일반 현상과 틀립니다. 물이 끓다가 어느 시점에 수증기로 변화되는데 이것을 극심한 변화의 가장자리라는 말로 ‘상(相)전이’라고 합니다. 경계까지 꽉 찬 임계상태죠.

# 멱함수(冪函數ㆍPower law)
세상이 좁다고들 말합니다. 네트워크라고 하죠. 복잡계 현상은 어느 상태가 되면 상전이가 일어납니다. 나라는 것은 내 몸과 내 정신 관계로 인한 삶의 반복입니다. 150억년 시간의 누적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를 보십시오. 선조들이 연구해온 자료들이 도서관에 가득하지만 정신은 언제나 새롭게 다시 시작합니다.
삶이란 관계의 흐름 속에서 내가 만들어 가는 관계의 덩어리입니다. 개체의 탄생과 소멸을 통한 삶의 반복으로 나만의 존엄성이 발현됩니다. 개체고유성은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판화가 에셔(1898~ 1972)의 그림 ‘도마뱀(1943년作)’처럼 반복성을 통해 개체의 근거와 고유성이 나옵니다. 풍요로운 삶이란 이로써 가능하며 창발되는 소중함을 확인할 때 엄숙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후회해 본적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 반복되는 심심한 일상의 삶이란 연기에 의한 것으로 성낼 필요도 후회할 일도 없습니다. 평상심, 이것이 도(道)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길 권합니다.

# 복잡계와 깨달음
복잡계 이론에 의하면 대선사의 깨달음과 일상의 깨달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부처와 같이 큰 깨달음이냐 하는 것은 임계상태 여하에 의한 것입니다. 창발현상에 의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삶의 역사성(業)으로 부처의 삶에 이르도록 합니다.
깨달음이란 항상 깨어있음입니다. 이것이 가치를 떠나 모든 존재의 소중함을 인정하는 화엄입니다. ‘도’란 어렵지 않습니다. 간택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임계상태가 될 때 깨달음은 가까이 있습니다. 평소 내 삶에서 깨달음은 구현될 수 있습니다. 축적에 의해 저절로 창발 됩니다. 삶과 삶의 현장 양쪽을 아우르는 변화의 가장자리에 선 경계의 삶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편안함을 길들여가는 나눔의 자세로 변화의 창발적 사유을 하십시오.

# 우리에게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은 자는 많으나 깨어있는 자는 적은 한국불교의 현실을 바라보며 깨달음의 탈신화를 모색합니다. 평상심을 강조하고자 ‘평범’에 주목합니다. 일반이란 집단 대다수의 공유지만 평범이란 인간이 살아가며 늘 있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평범한 것입니다. 깨달음에서 깨어있음으로 일상을 적극적인 회복의 삶으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적극적인 관계회복의 삶을 발원합니다.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하는데 ‘단념’과 ‘체념’은 독입니다. 약자가 취하는 폭력이죠. 부처님은 과정을 강조하셨습니다. 희망으로 인해 내 삶의 소중함을 잃어야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희망에 목매지 마십시오. 불자라면 강자의 입장이건 약자의 입장이건 관계회복을 위해 삶을 요구해야 합니다.
대오(大悟)란 각성을 이루는 바탕인바 ‘오’가 곧 ‘각’이 되기 위해 얻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욕망은 더 큰 욕망으로 치유되지 않습니다. 깨달음의 주체인 인간, 깨달음이라는 행위, 그리고 깨달음의 대상으로서의 연기법, 이 셋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깨달음과 삶은 소중한 경이로움입니다. 임계점에 도달한다는 것은 평상심과 깨어있음입니다. 내가 왜 사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놓지 않을 때 임계상태는 저절로 축적됩니다. 평상심으로 매 순간 날이 선 취모리(吹毛利)를 간직하십시오. 정리=가연숙 기자 omflower@buddhapia.com
2008-09-23 오전 10: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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