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중생’ 성악코드에서 ‘본래성불’ 성선코드로 변모
화두수행은 대안 수행법 … 가상의 문제로 실상에 다가서
발 표 : 박재현(서울불교대학원대학 선사상)
논 평 : 월암 스님(벽송사 선원장)
일 시 : 2008년 9월 19일
장 소 : 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
주 최 :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간화선의 핵심은 화두 참구와 병통의 극복에 있다. 역사적으로 지적돼온 간화선의 문제를 검토하고 현대 관점에서 대안을 모색한 자리가 열렸다. 조계종 불학연구소 주최로 제7회를 맞이한 간화선 세미나는 올 여름내 간화선을 주제로 연구한 결과를 점검했다. 간화선 실참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혼란한 세상에서 수행자의 본분을 바로 아는데 주력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박재현 교수(서울불교대학원대학)는 ‘화두의 기능과 역할’을 주제로 동아시아 불교수행의 문제의식과 간화선에서 스승의 역할, 수행 제자의 역할과 공안(公案) 등을 논제로 다뤘다.
토론자로 참석한 월암 스님(벽송사 선원장)은 논자의 논점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며 논문의 본론이 간화선의 공안보다 ‘조사선의 기용과 살활’에 더 부합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인도불교의 심성론 내지 인간관을 성악설에 기초한 논자의 시각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더욱이 “논자가 거론한 백파 스님의 <선문수경>이 초의 선사에 의해 많은 부분 비판받았음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각국의 선수행이 불교사상과 수행의 축적에 의한 결과물임을 인정해야 한다. 공안의 의심이야말로 붓다의 출가 동기가 아니었던가”라고 말해 앞으로 더욱 체계적으로 확립해야 할 간화선의 과제를 제안했다. 박재현 교수의 발표문을 요약 정리했다.
# 무명중생에서 본래성불로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태생적으로 사회성과 역사성이 취약하다. 중국으로 전래된 초기는 물론이고 화엄학과 천태학이 번성했던 교학불교시대와 선불교시대까지도 불교도들에게 부채로 남은 문제였다. 교학불교시대의 핵심 과제는 불경의 사회성과 역사성이 함축된 해석학 작업으로 이 문제를 보강하는 것이었다. 중국철학 전통의 성선과 성악은 단순히 심성 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인간 존재에 대한 포괄적인 규정으로 확대됐는데 법장과 종밀의 <화엄오교장>과 <원인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도의 사유전통에 의하면 인간은 오직 윤회 전생하는 무명의 중생일 뿐이다. 이런 참담적 존재 상황을 중국어법으로 표현하면 ‘성악’이다. 윤리 도덕적 개념에서 확대해 심성의 선천적 문제로 보면 인도의 인간관은 기본적으로 성악설에 기초했다고 해도 좋다.
중국 출가승들은 붓다의 근본교설인 인천교(人天敎)와 소승계열의 불교이론, 유식사상과 중관사상으로 대표되는 인도 대승불교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불요의(不了義)로 칭했다. 여래장과 불성사상만을 분리해 요의(了義)로 천명했다. 이것은 성선(性善)에 기초한 불교 이론을 적극 발굴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로써 불교는 무명중생이라는 성악 코드에서 본래성불이라는 성선의 코드로 바뀌었다.
# 지관 그리고 화두
선불교가 등장하기 이전, 불교 수행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수행했을까? 천태학에서는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가 있지만 결국 지(止)ㆍ관(觀)으로 단언했다. 지관수행은 기본적으로 의식을 갈무리 하는데서 출발해 분석적 사유 과정과 반비례한다.
지관수행은 분석지에 대한 비판적 의식에 중점을 둔 수행법이다. 분석지는 대상에 대한 몰이해와 왜곡을 낳는다. 그 오염원은 내 안에 있고 그것을 차단하는 것이 번뇌의 발생을 막는 첩경이라는 것이 지관수행자들의 세계관이고 자아관이다. 분석지가 올바른 인식작용을 방해해 대상을 왜곡하고 그것이 고(苦)의 발생으로 이어진다고 봤으니 당연한 대책이다. 문제는 사회는 기본적으로 분석지를 확장하고 심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데에 있다. 오염원이 확장되고 심화된다면, 지관을 통한 자정(自淨)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다. 수행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다녔던 것도 이러한 이유다.
그렇다면 북새통 세상 속에서 수행은 끝내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화두수행은 중국 불교도들이 창안한 대안 수행법이었다. 화두 들기는 화두라는 가상의 문제의식을 통해 의식의 자재(自在) 혹은 자유(自由)를 구현해 실상에 다가서는 수행법이다. 화두수행자가 두 눈을 부릅뜨고 봐야 할 것은 망령된 의식이 아니라 화두였다. 지관수행은 의식의 흐름이 본질적으로 불결하고 무상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반면, 화두수행은 의식을 규정하지도 그것에 주목하지도 않는다. 화두가 성성하게 살아 있는 한, 인간은 뜬금없는 의식에 끌려 실종되지 않는 것이다. 불순한 의식은 애당초 없었고 모든 의식은 기어코 온전한 것이다.
# 살활(殺活)과 기용( 機用)의 교육론
간화선 수행에는 길이 없고, 지도(地圖)도 없다. 수행에서 스승은 페이스메이커(pacemake)이다. 경험이 미숙한 주자(走者)들이 목표하는 시간대에 전 코스를 만족스럽게 완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그가 한다. 선불교의 교육은 깨침이라는 궁극적 가치를 직접 겨냥한다. 깨침은 교육을 통해 구현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성과라는 것이 선불교의 혁명적인 발상이다. 선(禪)은 독각(獨覺)을 지극히 경계한다. 독각은 대승불교 발생 당시부터 제기된 문제였고 선에서 심하게 문제 삼았다. 교육, 즉 스승과 제자라는 교육 ‘관계’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깨침의 내용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깨침의 방식이나 과정 혹은 절차를 문제 삼는 것이다.
간화선에서 스승의 역할은 살활(殺活)과 기용(機用)이다. 살과 활은 수행의 점점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죽이고 살린다는 말이 섬뜩하지만 생사대사를 목전에 둔 일이기에 절실하다. 제자의 상황에 따라 스승은 살이나 활 혹은 살활을 동시에 처방할 수 있어야 한다.
살은 부정적인 방식의 지도법이다. 엇나가거나 자만에 빠져 있는 제자에게 갑작스레 지청구나 면박을 주어 주눅 들게 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처방은 당연히 순간적으로 심한 모욕감과 반항심을 유발한다. 하지만 수행성과에 대한 자신감을 넘어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수행자를 이끄는데 탁월하다. 제자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도과(道果)를 스승이 은연중에 노출하는 방식 역시 살이다. 이러한 처방은 간혹 소심한 수행자가 수행자체를 포기하는 사태를 초래하기도 한다. 수행과정에서 지나친 의욕과 자신감에 차 있는 수행자에게 자신을 되돌아 볼 기회를 갖도록 유도하는 처방이다.
활은 긍정적인 방식의 지도법이다. 이것은 제자를 격려하고 의욕을 북돋우는 내용이 기조를 이룬다. 수행에 진척이 없어 답답해하는 제자에게 격려하는 방식이다. 소심하고 완벽증에 빠진 수행자를 지도하는데 유용하다. 스승이 직접 낮은 단계의 도과를 은연중에 노출해 제자가 ‘저 정도라면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스스로 일으키는 것이다.
조선 말 백파긍선(白坡亘璇ㆍ1767~1852)이 모든 선적(禪籍)을 주의 깊게 분석한 <선문수경>에는 살활을 삼처전심(三處傳心)으로 보았다. 열반한 부처가 관 속에서 두 발을 내밀어 살과 활을 동시에 함께 보였다는 이치다. 부처는 가섭에게만 부촉했으니 그에게는 활일 것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기척도 없었으니 그들에게는 살이라는 것이다. 백파는 기용(機用)에 대해서도 여래선에는 없고 오직 조사선에만 해당된다고 보았다. 기용은 살이 아닌 활 지도법으로 살활과 함께 대기원응(大機圓應)과 대용직절(大用直截)과 기용제시(機用齊施)를 요체로 한다. 기는 기틀이요 용은 기틀이 빚어내는 작용이다. 기틀이 제 틀만을 고수한다면 빚어진 것들은 온전치 못하거나 끝내 빚어지지 못할 것이다. 그런 기틀은 소기(小機)일 것이어서 끝내 재료를 못 쓰게 만드는 살(殺)에 머무르고 만다. 마음 기틀이 촘촘할수록 대용은 더욱 어긋난다(心機愈密而大用愈乖)하지 않았던가.
# 살활제시(殺活齊示)의 공안
살과 활의 처방을 얼마나 적절히 구사하는지 살펴보면 간화선 수행지도자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다. 선 수행은 수행지도자가 자기중심을 잡고 상대를 전면적으로 인정하고 전폭적으로 신임하는 바탕위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수행의 출발이고 전부다. 지나친 자신감이나 소극적 자포자기의 마음 모두 수행을 지연하거나 멈추게 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해롭다. 그러므로 살과 활의 처방을 적재적소에서 기민히 사용해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간화선 수행지도의 핵심이다. 살과 활은 선수행이 중도(中道)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줄탁동시(啄同時) 교육론과 교육법의 실제야말로 살활의 공안인 것이다.
정리=가연숙 기자 omflower@buddhapia.com
사진=박재완 기자 jwpark@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