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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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나는 부처님의 시자
공부 잘하는 처사
직장인인 고씨에게 친한 친구가 어떤 산중의 절에서 하는 수련회가 있다고 같이 가자고 하였다. “처사들만을 위해 마련한 자리야. 그 절에 대단한 노스님이 계셔. 대중법문을 잘 안 하시는데 이번에 우리를 위해 특별히 법문도 해 주시기로 했대.” 첫날 취침시간이 되자 친구와 고씨는 가만히 처소를 빠져나왔다. 둘은 자지 않고 밤새 정진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절의 모든 건물은 아홉시면 잠그지만 친구는 주지스님과 잘 아는 사이였다. 미리 부탁해놓아서 그 날 밤만 산신각을 열어주기로 했다고 했다.
약속대로 둘은 산신각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비까지 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와서 문을 열어준다는 시자스님은 오지 않았다. 둘은 안 되겠다 싶어 산신각 옆 건물로 갔다. “여기 시자스님이 계시다고 했어.”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취침시간이 지났으니. 그래도 또 방문을 두드리며 “스님, 스님!”하고 불렀다. 잠시 후 환갑이 넘은 듯한 스님이 나오셨다. 잠자리에 들려고 했는지 잠옷 같은 차림이었다. “무슨 일이오?” “스님, 산신각 열쇠 가지고 계십니까?” “네, 그런데 왜요?” 열쇠를 가지고 있으니 시자스님이 틀림없었다. 노스님의 시자스님이라 연세가 좀 되셨구나 싶었다. “스님, 죄송한데요, 주지스님께서 오늘 밤 산신각 문 열어주라고 말씀하셨지요?” 스님은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아니, 아무 말 못 들었소,” “그럴 리가요. 분명히 주지스님께서 약속하셨어요!” “난 모르는 일이오.” 연락이 안 되었구나,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주지스님께 전화로 확인하셔도 돼요.” 자신만만했다. 둘은 “스님, 저희가 서울서 온 처사들인데요. 문만 좀 열어 주십시오. 네?” 하며 졸라댔다. 밤 늦은 데다가 비가 내리고 있어 스님께 좀 무례하다 싶었다. 그러나 시자스님이니 당연히 좀 도와 주셔야지 싶었다. 무엇보다 주지스님말씀 아닌가. 내일은 주지스님의 은사이신 노스님께서 특별법문도 해주실텐데. ‘우리는 특별한 불자이다’ 하는 마음이었다. 뻔뻔하게 졸라대니 결국 스님은 가보자고 하였다.

밤샘 정진
잠옷차림이던 시자스님은 열쇠를 찾아서 비 오는 마당으로 나왔다. 함께 산신각으로 갔다. 들어가서 초를 켜려니 보이지 않았다. 스님에게 “초가 없어요, 좀 찾아주세요” 하고 다시 부탁했다. 스님은 “잠시 기다려보시오” 하고 상단 아래의 문을 열고 어둠 속에서 이것저것 찾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여기 있소” 하며 초와 성냥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비오는 밤에 죄송했지만 고씨는 ‘시자스님은 절의 일 도와주시는 게 소임일 거야’ 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해버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새벽예불 때까지 정진하였다. 피곤했지만 몹시 뿌듯했다. 내일 큰스님께 밤새 정진했다고 말씀드려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면 이 서울처사들에게 특별히 법문해줄 만하구나 하고 생각하실지도 몰라. 하하, 난 역시 열심 불자야.
다음날 법문시간이 되었다. 어떤 처사들은 녹음기를 준비하였다. 절의 수십명 스님들도 큰스님 법문듣기가 어렵다며 모두 나와서 정좌하고 앉아 긴장된 분위기였다. 어떤 분인지 굉장히 궁금했다. 마침내 들어오는 큰스님을 보는 순간 앗! 하고 눈을 의심하였다. 어젯밤의 그 시자스님이었다! 가사장삼을 갖추고 위엄 있는 모습이 완전 딴 사람이었다. 아뿔싸, 큰스님이셨구나. 순간 너무 당황하여 멍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고씨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시자처럼 문도 열어주고 초까지 찾아 주었지 않은가.

“나 시자 맞아요”
이를 어쩌지. 큰스님께 초면에 삼배는커녕 일을 시켰으니! ‘지금 어디로 도망갈까’ 안절부절했다. 순간 법좌에 높이 앉은 큰스님의 첫 마디가 귀를 때렸다. “서울서 공부 많이 한 처사들이 온다고 해서 얼굴을 보고 싶었어요.” 아이고, 맙소사, 큰스님도 몰라본 내 공부 실력이라니. 고씨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들었다. “나는 여기 회주스님이다”라고 한 마디만 해 주셨어도 좋았을 텐데. 왜 안 하셨지? 모두가 건강을 염려해 드린다는 큰스님을 비오는 밤에 일까지 시켰으니 주지스님이 아시면 뭐라고 하실까. 진땀이 나면서 ‘그래, 변명이라도 해야겠다. 몰라서 그랬다고’ 하고 결심했다.
법문이 끝나고 간신히 기회를 잡았다. 스님에게 “스님, 어제밤에 정말 죄송합니다. 시자스님이신 줄만 알았거든요.” 스님은 얼굴빛도 안 변하고 “나 시자 맞아요. 중이 부처님 시자 아닌가.” 그리고는 “아직도 이름으로 사람을 분별한다면 공부는 언제 합니까” 하였다. 아, 부처님, 참회하옵니다. 다시 초발심으로, 하심부터! 죽자, 죽어, 죽고 싶다. 황수경(동국대 선학과 강사)
2008-09-09 오후 1:2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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