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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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 즉 진리입니다! 그리고 교재입니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또렷하기 때문에 좋지요? 이제 더위가 좀 가신 것 같습니다. 더운데 살기가 힘들었죠? 그런데 한마디 하고 질문을 받을까요, 질문을 다 받고 나중에 할까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왜 대답이 없으세요?
그럼 먼저, 사람 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그 사실에 대해 말씀드리죠. 저도 봤습니다만 어느 사찰에서 있었던 일이죠. 그 도량에서는 시식을 지내거나 하면, 항상 그 넓은 돌 위에 밥도 덜어다 놓고 과일도 덜어다 놓고 그럽니다. 그럼 그 돌 밑에서 나와서 먹기도 하고 날아와서 먹기도 하고 그러죠. 그래서 꼭 그 생명들을 위해서 갖다가 놓죠.
그런데 큰 구렁이가 돌 밑에서 그걸 받아먹으면서 한 2년 남짓 살다 보니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모두 보면서, 우리가 지금 부처님 찾는 거와 똑같이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스님이 나와서 먼 산을 보고 있는데, 그 돌 밑에서 구렁이가 나와서 하는 소리가 “스님처럼 저도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거는 도승들이나 듣지 보통 사람은 못 듣죠. 그러니까 “될 수도 있지만 그 어려운 고비를 어떻게 넘기겠느냐?” 그러니까 “죽더라도, 죽더라도 꼭 그렇게 해 보고 싶습니다.” 했답니다. 간략하게 그냥 얘기하죠.
그러니까 이 스님이 하는 말씀이 “너의 동료…”, 즉 말하자면 뱀의 도반이라고 할까요. “…300명을 꼭 교화를 시켜서 이 도리를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항상, 법당에서 스님이 법을 설하시거나 또는 예불을 올리시거나 할 때 그분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말고 들을 수 있겠느냐? 셋째는 네가 3년 동안 이슬만 받아먹고 살 수 있겠느냐?” 하셨더랍니다. 그러니까 “그거보다 더한 거라도 하겠습니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뱀은 주는 것도 그때서부터는 못 먹고, 나와서 항상 이슬만 받아먹고 들어가고 들어가고, 그러면서 자기 동료들을 교화시키려고 애를 쓰고 그랬죠. 그리고 끄트머리에 가서는 “한 가지 또 있느니라.” 하면서 뭐라 그랬느냐 하면 “장독에 가서 장을 얻어먹을 수 있어야만 된다. 사람이 먹는 장 방울을 얻어먹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항아리를 넘어 들어가서 먹는 게 아니다. 장을 뜨러 왔을 때에 떨어지는 방울을 먹어야 마지막에 인간으로 환토할 수 있느니라.” 했단 말입니다.
그거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스님이 말씀하신 거를 새겨 본다면 우리가 노력 안 하고 그 뜻을 배울 수는 없다는 것이니까요. 또 노력하지 않고 차원이 높아질 수도 없고, 노력 안 하고서 내가 스스로 여여하게 살 수는 없으니까요. 모두가 다 그렇죠. 그런데 그 구렁이는 그걸 이겨 냈답니다. 이겨 내서 거길 떠나지 않고 공양주 스님이 간장을 뜨면서 떨어뜨린 거를, 그걸 그냥 기다리려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거를 받아먹고, 또 한 번 받아먹고, 또 한 번 받아먹고 세 번을 받아먹는 데 3, 4년이 넘게 걸렸단 얘깁니다. 그러니 얼마나 깊은 의지와 깊은 뜻이 거기 서려 있겠습니까?
그전에도 내가 얘기했지만, 수없는 광년을 거쳐 오면서 우리는 진화돼서 형성되고, 형성되면서 진화되고 모습을 바꾸고 바꾸고 이렇게 하면서 인간까지 왔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진리를 볼 때에도 그렇지만, 또 (배를 짚으시며) 우리 오장 육부 속에 그 모습과 의식과 생명이 다 들어 있으니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그 구렁이는 뼈다귀만 남아 가지고 너무나 애절하게 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벗고 인간으로 환생을 하는데, 그 스님이 인도를 했답니다. 자손 없는 집으로 인도를 했죠. 그거는 부처님의 일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모두 황당하게 들릴지 몰라도 부처님의 연기법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잘 자라서 어른이 돼서 지금 부지런히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 모습 하나 벗기가 그렇게 어렵단 말입니다. 토끼라면 토끼 모습을 벗기가 어렵고, 새라면 새 모습을 벗기가 어렵고, 또 개라면 개 모습 벗기가 어렵고, 소라면 소 모습 벗기가 어려운데, 부처님 경지에 이르러야만이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돼 가지고도 99%가 자기 자신부터 알아야 된다는 거죠.
예전부터 그렇게 얘기했죠. 육조(六祖) 스님이 오조(五祖) 스님한테 대답하기를 “내 불성이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했단 말입니다, 내 불성이. 각자 모든 사람들에게 불성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그 불성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냥 여여하게 살 수 있다 이런 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모두 갖추어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여여한 것입니다. 또 우리가 들이고 내고 하는 생활 자체가, 그대로 만법을 들이고 낼 수 있는 불성 자체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만법을 스스로 들이고 내고 할 수 있게끔 되는 것이죠.
이것을 아마 말로 해서는 실감이 영 안 될 겁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지만 사람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지금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현재 누구에게나 다 물질과학이 50%로 등장하고 있죠. 그런데 정신과학이라는 걸 거기다 벌충해서 100%를 만들어서 굴리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우리가 살기가 그렇게 힘들고 어려워지고 오래 걸리고 이러는 원인이 정신계를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물질계를 다 알아 가지고 이제 정신계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거기까지 알아야 되니까요. 이게 물질계 속에서 ‘정신계는 물질계를 리드하는구나’ 하는 거를 알아야 빠른데,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 뿌리를 무시하고 그냥 싹이 산다고만 생각을 하고 가니까 이건 50%의 물질계만 알면서 수없는 광년을 그냥 허송세월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정신계로 들어서도 또 50% 정신계에서의 수없는 광년이 지나야 할 테니까 말입니다.
이러니 그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지, 나는 요새 말입니다, 물에서 사는 거나 들에서 사는 거나 또 사람들이나…, 어떤 때는요. 야, 어떡하면 그 아픔과 쓰림, 맞아서 아픈 것도 아니면서도 왜 그 쓰리고 아픈 게 있죠? 그리고 먹히고 먹고, 또 사람들은 모두 그 심성, 즉 말하자면 정신을 뺏기고 뺏어 먹고…. 이 세상이 모두 그렇단 말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어떤 때는 자나깨나 그 사는 모습들이 머리에서 모두 뱅뱅 돌고 있어요. 그런데 내 재주로는 그거를 몽땅 없앨 수가 없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지금 현재 모두 한 개체로 태어난 것이라면 자식을 낳지 않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뿐만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면 다 없어지는 폭이 되죠. 그런다면 또 문제가 있는 것이 종자의 과정과 그 무엇이 등장을 안 하면 이 우주 법계는 법계라고 할 수도 없고 다 무너질 거니까 말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내가 말하는 거를 어떻게 들을지 몰라도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불쌍한 마음이 그지없을 때가 많습니다. 불쌍하다고 어떻게 말로 다 하리까, 이거를. 세상에 사람 사는 것도, 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느냐는 거죠. 그건 무(無)의 세계로 인해서 유(有)의 세계가 돼야 하는데, 무의 세계는 저버리고 유의 세계 속에서만 사니까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공부를 하면 ‘귀신도 너와 둘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하죠.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도 나의 보이지 않는 거하고 동일하게 되니까 귀신이 아니라 선신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차를 탈 때도 관하고 타라. 내릴 때도 감사하게 관하고 내려라. 어딜 가든지 ‘이건 뭐 괜찮을 거야!’ 하지 말고 돌다리도 두드려 가면서 가랬다고 항상 자기 자불을 진짜로 믿고, 위험하든지 뭐든지 모든 것은 거기다 맡기고 해라. 사업을 하든지 공장을 하든지, ‘이 껍데기를 리드해 나가는 주인이 하는 거지 심부름하는 껍데기가 하는 게 아니다.’ 하고, 이렇게 진짜로 아신다면 우리 살기가 그렇게 급급하지 않아요.
그런데 벌써 고(苦), 집(集)이 있다면, 즉 집착을 하면 고가 생긴다 이런 건데, 우리가 그렇게 모든 걸 맡기고 갈 수 있다면 자기가 고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집착을 하는 것도 아닌 게 된단 말입니다. 이 소리 잘 들으세요. 우리는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화(化)해서 나툴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공(空)이 색(色)이요 색이 공이니라. 그대로 여여함을 알라.’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고’라는 거 ‘집’이라는 거, 이렇게 이름을 해 놨기 때문에 그 이름에 걸려 가지고선 외려 더 하지 않나. 외려 팔정도니 육바라밀이니 이런 이름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채 쓱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걸리지 않나,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그래서 어떠한 거든지, 인간들도 그렇습니다. 이쁜 사람이나 미운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얕은 사람이나 평등하게 보라, 이러는 거는 자기가 수없는 억겁을 거쳐 오면서 어떤 거는 안 돼 봤겠습니까? 또 어떠한 일은 안 해 봤겠습니까? 한 상황에 처해서 어떠한 문제는 안 일으켰겠습니까? 그러니 그것을 내 모습으로 봐라. 모든 것은 내 모습과 같고 내 아픔과 같고 내 슬픔과 같고 또 내 배고픔과 같고, 모두가 내 도량에서 나 아님이 없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러니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셔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하셨든 안 하셨든 이 세상 살아나가는 진리가 바로 부처님 법이죠.
먼저 깨달으셔서 우리들한테 전파를 하셨으니까 부처님은 우리의 아주 진짜, 이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스승이죠. 그래서 그 스승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마는, 부모는 자식이 잘되라는 것이지 공경 받으려고 자식을 기르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부처님!’이라고 하면 과거의 부처님만 부처님이 아니라 여기 계신 분도 부처님이고 저기 계신 분도 부처님이고 부처님이 꽉 차 있죠. 그러니까 만불이 일불이요 일불이 만불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앉아서 고생한다고 하는데 이거는 별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서역에서 몇백 명씩, 몇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수십 명씩 조를 지어서 중국으로 이 법을 펴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오다가 열 명이면 한 명 남을까 말까 했답니다. 세상에, 그 소금 요만큼 괴춤에다 매고 오는 거죠. 지금은 신발이나 두둑한 게 있겠지만 그때엔 신발도 없고, 모두 짚신 하나 신고 오다가 또 하나 갈아 신고, 그러다 보면 다 떨어져서 맨발로 걷고요. 그 고생하신 생각을 한다면 여러분이 이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바로 자유스런 삶을 살 수 있어야 그 역대 조사들한테 보답을 하는 거와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 되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거요. 지금 사람이 돼 가지고도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또 모습이 달라질 수 있는 거니까요. 사람이 돼 가지고도 수천 년, 수만 년을 이렇게 돌다가 상세계로 차원을 이루는 수가 있고, 또 이렇게 살다 하천세계로 떨어지는 수가 있는 거고요. 여긴 상천세계냐 하천세계냐로 갈라지는 교차로니까요. 교차로이기 때문에 중세계에서는 그렇게 사람 되기가 어렵고 사람이 아닌 데로 떨어지기가 쉽다. 그러니까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것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찰에 와서 종교를 믿고 그렇게만 하는 게 아니죠. 어느 종교의 이름이든지 그것은 이름일 뿐이지 그 이름 가지고는 아무 소용 없는 겁니다.
인생이라고 태어나서 한 철 살 때에, 한 철 사는 이 모습과 이 모습 속의 생명들과 한 철 사는 정신계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삼합(三合)이 맞아서 나왔으며…, 또 우리가 삼합이 맞아야 잉태를 하게끔 돼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 모두가 배우면서 실질적으로 느껴 가면서 알아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남녀를 막론해 놓고, 여러분이 수기 쓰는 것처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써서 자기네들끼리 모아서 이렇게 낸다면 그것이 바로 훗날에 자기를 자기가 보는 것이 되고 자기가 한 페이지 써 놓은 게 되고, 또 남들이 볼 때도 그걸 보고 교화가 되고, 그건 여러 가지로 보살행입니다. 많이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 스님네들이 좋자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한창 기복으로 가던 사람들도 되돌아설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됩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우리 사무장님더러 달라고 그래서 여러분끼리 하세요. 사무장님 손을 거치는 것도 아니요, 그렇게 하시라고 하는 거는 다 뜻이 있어서 그럽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는 그 자체도 겉으로는 어떻게 하든지 속 내용이 어떤가, 얼마만큼 길러졌나, 얼마만큼 잘하고 있나 이것도 검토할 문제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무슨 체험담을 한다 이런대서가 아니라 수기 쓰는 셈 치고 자기의 진실한 마음을 그대로 한 페이지씩 쓰란 얘기죠. 써서 여러분이 한 신행회에 한 권씩 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질문을 하시는 데도 일부러 만들어서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다니고 이렇게 배우다 보니까 이러한 생각이 드는데, 자기 생각으론 가망이 없는 것 같을 때, 또 여러분 집안에 무슨 문제가 있는데 주인공을 찾아도 아니 되더라 할 때 질문하세요. 생활이 즉 진리입니다. 그리고 교재입니다.
진리라는 이 자체를,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나도 항상 여러분한테 그렇게 말하죠.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는 고정된 게 하나도 없다. 만남도 고정되지 않고, 보는 거 듣는 거 말하는 거 가고 오는 거 먹는 거, 전부 하나서부터 열까지 고정된 게 하나도 없다.’라고요. 그러니 과거는 바로 찰나 전이고 미래는 찰나 후란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도 연방 과거로 돌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 그 가운데에서 잘하고 못하고 잘되고 못되고 하는 이것이 대상을 두고서 살아나가는 살림살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상점을 하나 내는데 어디가 좋습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걸 생각을 해 보십시오. 어떤 게 잘되는가 어떤 게 못되는가, 어딜 얻어야 하느냐, 이런 건 상식입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용도에 따라서 가게를 얻어야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용도에 따라서 가게를 얻되, 잘 팔릴 수 있고 썩지 않고 그런 문제 등을 잘 살펴봐 가지고 책정을 하는 것이죠. 잘되는 거 못되는 것을 둘이 아닌 가운데서 그대로 그걸 자세히 봐서 결정하라고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지 않습니까, 다! 그걸 잘 봐서 하라는 뜻이죠.
또 무슨 일을 하게 되면 잘되는 거 못되는 거, 돈을 버는 거 못 버는 거 이걸 계산을 하지 말고, 못 버는 거 잘 버는 거 이 둘을 다 떠나서 한번 생각을 해 보는 거죠. 어떻게 해야만이 우리가 굶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럴 때 거기에서 요량이 생기는 것이 결정적인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산도 없이 빚을 털퍽 얻어 가지고 가게를 얻어서 그걸 한들 이자로 다 빠지지 뭐가 남습니까? 먹고 사는 게 거기서 자꾸 줄어드는 거예요. 그러니 못살게 될 수밖에 없죠. 그러니 아무것도 없으면 차라리 맨손으로 무엇을 들고 다니며 팔든지 이렇게 해서라도 그걸 감당할 수 있다면, 가다 보면 하늘에서 뚝 떨어질지 누가 압니까? 허허허….
정성이 지극하면, 지성이면 감천이랍니다.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행동과 선의로써 가정을 책임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뭐든지 될 수 있습니다. 내 그런 얘기를 또 한마디 하겠습니다. 다 들으셨을 거예요. 어떤 사람이 은행 앞을 3년을 쓸었답니다. 하도 들여다보고 쓸고 쓸고 그러기 때문에 은행원들이 생각하기를 ‘신문지를 오려서 돈으로 보이게 해 가지고선 앞에 한번 내던져 보자. 그러면 아주 좋아서 들고 달아 나갈 거다.’ 이럭하고는 신문지로다가 만들고 윗 덮개만 돈을 붙여서 그거를 내던진다고 해 놓고선, 딴 사람이 교대를 해서 들어오는 바람에 착각을 해서 진짜 돈을 내던지고 그거는 돈 가져가는 데로 보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돈보따리를 들고 가서, 자기도 공부를 못 했으니까 지점장의 이름을 쓰고 그 몇몇 아는 사람 이름도 쓰고 그렇게 해서 학교를 지었답니다. 그리고 또 집도 마련하고 해서 가정도 살리고요. 그랬는데 아니, 그 학교 지은 사람이 누구누구라고 하니까 그 은행으로 다 왔지 않겠습니까, 신문사에서. 그러니까 자긴 그런 새가 없는데 ‘심부름 하라고 주셔서 이렇게 했노라’고 자기 이름을 밝혔단 말입니다. 그렇게 했으니 그 미지수로 남았던 문제가 나중에 밝혀지면서, 허허허…, 그 사람네들이 탄복을 했답니다. 야, 남을 무시하고 그렇게 장난 삼아 한 것이 현실로 벌어졌다는 사실에 놀라고 또, 그 사람의 마음이 그런 줄은 정말이지 모르고 무시했다는 거를 아주 절감하고 용서를 빌었답니다. 그러니 이름나서 좋고, 그러고부터 은행 직원들도 그렇지마는 그 지점장도 좋은 일을 늘 해 가더랍니다, 거기에서 모두 탄복을 해 가지고.
그런 것도 있지만, 올바르게 사는데도 방 한 칸이 없어서 쩔쩔매고 비를 주룩주룩 맞으면서 “스님, 어떡하면 살겠습니까?” 하고 네 식구, 다섯 식구가 우는데…, 그거는 그렇게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아마. 그 갑바, 그 뭔가 (양 손을 좌우로 벌려 보이시며) 이렇게 치는 거 뭐죠? 그 이름이 뭐예요? 왜, 캠핑 가서 치고 자고 그러는 거 있잖아요?
대중 텐트요.
스님 그거 말고 차에 물건 담아 놓고 위에 덮어서 가는 거.
대중 천막!
스님 천막! 허허허…. 천막을 치고선 오돌오돌 떨고요, 추운 가을에요. 그런데 그때가 장마통이라 가을인데도 비가 그냥 한없이 왔거든요. 그때는 여기 짓고 얼마 안 돼서니까 돈이 하나도 없을 때죠. 있었으면 그냥 다 줬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그러니까 어서 집엘 가 봐라. 도중에 당신한테 하늘에서 떨어지는 뭐가 있다면 더더욱 좋을 테고….” 해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 위안의 말에 울음을 그치고 가다가 보니 종이벽지 말은 것처럼 똘똘 말아져 있는 큰 신문지 뭉치가 떨어져 있더랍니다. 그래서 ‘어디 남의 원두막이라도 얻으려면 신문지도 필요하겠다’고 생각해서 신문지를 주워 들고선 비를 맞고 갔죠. 가서 그 신문지를 푸니까, 돈이 잔뜩 들었더랍니다. 그래서 그 돈 가지고 전세 얻고, 우선에 구멍탄도 없으니까 구멍탄 한 백 장 들여 놓고, 아이, 그 사람이 그렇게 얘길 해요, 허허허…. (대중 웃음) 백 장 들여놓고 쌀 한 가마 들여 놓으니까 세상에 누구도 부럽지 않더랍니다. 그래 와서는 “스님, 참 고맙습니다.” 그래서 “왜 날더러 고맙대? 네가 오지 않았으면 나도 없을 것이고 내가 너를 보지 않았더라면 너도 없을 것이야. 언제나 사람과 일체 생명들은 다 그렇게 연관이 되고 인연이 돼서 돌아가는 거지. 그렇지만 그저 그렇게 어려워도, 착하고 마음이 정직하고 진실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 아니겠어?” 그렇게 말했어요.
그런데 그럭하고 나서부터 참, 아무 뜻도 모르면서 부처님의 법이 이렇게 그냥 좋다는 것만 알고 살고 있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이 소리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에요. 어저께 저, 전설의 고향인가 그거 보신 분들 있죠? 보신 분들 있으시면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얼마나 지극하게 했으면 그 석관 속에서 빠져 나와서 노인네로 화해 가지고선 삼천 냥을 만들어서 모두를 살리고 장가도 들이고 그랬잖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습니다. 꼭입니다. 이건 틀림이 없습니다. 어떤 거든지 내가 마음을 올바르게 하고, 생각을 넓게 쓰고, 인의로써 남의 탓을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내가 잘하든지 못하든지, 내가 있으니까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모두 잘들 하시면 아마도 보이지 않는 데서 무주상 보시가 내릴 겁니다. 정말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2008-09-09 오후 1: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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