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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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근과 촉진 둘 다 잊어야 마음이 청정
五身受觸時修止者 隨所覺觸 卽知如影 幻化不實 若受順情樂觸 不起貪著 若受違情苦觸 不起瞋惱 受非違非順之觸 不起憶想分別 是名修止 云何身受 觸時修觀 應作是念 輕重冷煖滑等法 名之爲觸 頭等六分 名之爲身 觸性虛假 身亦不實 和合因緣 卽生身識 次生意識 憶想分別苦樂等相 故名受觸 反觀緣觸之心 不見相貌 當知受觸者 及一切法 畢竟空寂 是名修觀
다섯 번째로 신근이 촉진과 접촉하였을 때 지 수행을 하는 것에 대해 밝혀 보려고 한다.
신근이 촉진을 감촉하면 그것은 그림자, 허깨비, 변화처럼 실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감정에 순응하는 즐거운 감촉을 느낀다 할지라도 탐애의 집착을 일으키지 않으며, 감정을 위배하는 괴로운 감촉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진심과 고뇌를 일으키지 않으며, 감정을 위배하지도 순응하지도 않는 감촉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을 기억하고 분별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를 두고 지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음으로 신근이 촉진을 받아들일 때 어떻게 관 수행을 해야만 하는가.
가볍고 무겁고 차고 따뜻하고 껄끄럽고 매끄러운 것 등을 촉진이라고 한다.
촉진의 성품은 허깨비처럼 거짓이며 몸 또한 실재하지 않는다. 단지 신근과 촉진이 화합하는 인연 때문에 바로 신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제육의식이 감촉을 기억하여 괴로움과 즐거움 등의 모습을 분별한다. 따라서 신근이 촉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신근이 촉진과 인연으로 일어나는 마음을 돌이켜 ‘실재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라고 여겨야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받아들인 촉진과 일체법은 공적하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관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몸이 차고 따뜻한 것, 바람이 부는 것, 남녀의 몸이 부드럽고 윤기 있는 것, 아름다운 의복에서 감촉을 느끼는 것 등 모든 것을 촉진이라고 말한다.
촉진에서 지를 닦는다는 것은 감촉하는 촉진경계를 따라서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 영상과도 흡사하다. 그것은 거울상에 나타난 허상이기 때문에 실재 있지 않는 것이 그림자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허깨비 변화와 같아 본래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다.
부처님 제자인 필능가파차존자는 최초로 발심 출가하여 부처님으로부터 ‘세간의 모든 법은 고(苦)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 부정(不淨)하기 때문에 즐겨서는 안된다’ 라는 말씀을 자주 들었다. 이 말씀을 듣고 그는 걸식을 하면서 관법에 들어갔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발에 독이 들어가 온몸에 퍼져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는 즐겨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인해 즐겁지 못한 경계까지 만나서 부처님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내 몸이 앎이 있어야 만이 고통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되자 걸음을 멈추고 통증에 마음이 끌려가지 않으면서 ‘이 고통을 아는 사람은 끝내 누구일까’ 하고 관찰하였다. 이로 인해 몸에 지각하는 마음이 생긴 그는 통증을 느끼기는 했지만 나의 본각인 청정한 마음엔 통증의 모습이 따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한 몸에 통증을 느끼는 지각과 통증이 도달하지 못하는 마음이 어떻게 따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한 몸에 통증과 통증을 느끼는 마음 둘이 있어야만 된다. 지각하는 마음과 통증이 둘로 나뉘어 있다면 마땅히 이 한 몸에서 두 부처를 이루게 될 것이니 그러한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마음을 돌이켜 관찰하고 생각을 거둔지 오래지 않아 몸과 마음이 홀연히 공적하여 통증을 느끼는 마음과 통증을 일으키는 대상이 따로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바로 주관과 객관을 둘 다 잊어버려 마음이 청정해졌다고 한다.
내 감정을 위배하는 촉진도 이와 같다면 감정에 순응하거나 위배하지도 순응하지도 않는 촉진경계를 생각해보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이를 두고 촉진을 통해 지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두고 몸이 감촉을 받을 때에 관을 닦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이에 대해 말해본다면 대상을 통해 느끼는 모든 촉감을 촉진이라고 하고 그 촉감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머리 등 여섯 분야를 신근(몸)이라고 한다. 여섯 분야는 머리, 몸, 양팔, 양다리를 말한다.
알아야 할 것은 감촉하는 대상경계는 그 성질이 본래 공적하여 진실이 아니며 그 감촉을 받아들이는 내 몸도 역시 진실이 아닌 허깨비라는 점이다.
우리의 몸은 지수화풍 사대인연으로 화합하여 신근이 있으며 사대인연이 분리하면 신근도 따라서 없어진다.
안으로는 신근이 인이 되고 밖으로는 촉진이 연이 되어 내적인 인과 외적인 연이 화합하여 바로 신식이 일어나면 다음으로 제육의식이 일어나 목전의 촉진에서 괴로움과 즐거운 모습 등을 분별하게 된다. 그 때문에 이를 ‘촉진을 받아들임’이라고 한다.
대체로 신식으로 인해서 촉진을 느끼고 의식으로 인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분별한다. 이로써 촉진은 자기 스스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으로 인해서 있게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촉진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끝내 따로의 모습으로 얻지 못한다는 것을 돌이켜 관찰해야만 한다.
이를 두고 말하기를 “마음은 본래 일어남이 없건만 대상경계로 인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대상경계가 없을 때엔 마음도 역시 없다”라고 한다.
이처럼 인과 연이 화합해서 일어난 것은 반드시 인연의 분리를 따라서 소멸하여 생멸거래는 끝내 형상이 없다. 그 때문에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촉진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대상인 촉진이 끝내 공적한 것이다.
능엄경에서 말하기를 발타파라존자는 과거 전생에 위음왕 부처님 밑에서 법을 듣고 출가하였다. 어느 날 그는 스님들이 목욕을 하자 함께 들어가 이런 생각을 했다.
‘몸이 물과 합하여 그 물에 촉감을 느낄 때 올바른 생각을 일으켜 이 감촉이 무엇으로 인해 있을까. 만일 이 감촉이 때를 씻는 것으로 인해서 있다면 때는 본래 무정물인데 어떻게 감촉을 일으키겠는가. 이는 때를 씻음으로 인해서 감촉이 있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또 감촉이 몸을 씻는 것으로 인해 있다면 몸을 이루고 있는 지수화풍사대가 본래 공적한데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몸을 씻음으로 인해서 감촉이 있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이를 따라서 끝까지 추구해보았더니 촉진이 일어나지 않고 내 몸도 역시 존재하지 않게 되어 그 중간에서 감촉을 느끼는 마음이 편안하여 요동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원통경계로 깨달아 들어가 외부의 촉진과 안으로의 몸이 동시에 공적하여 오묘한 감촉이 청정하여 본래 오염됨이 없었는데, 청정하여 오염됨이 없는 처소가 끝내 공적하여 주관과 객관의 상대적인 두 모습이라고는 없었다.
이를 두고 촉진을 통해서 관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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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9 오전 11: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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