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부모님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을 너희들에게 물려줄 테니, 앞으로 우리에게 효도할 생각 없나?”라고 물으신다면…. 요즘 매스컴에 소개된 어느 대학교수의 연구결과가 장안의 화제다. 그것은 ‘돈이 있어야 자식들의 공경을 받는다’는 세간의 속설을 입증해 주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논문에 의하면 세계 27개국 가운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부모의 재산이 많거나 소득이 높을수록 자녀들과 만나는 빈도가 잦아지는 흥미로운(?)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예컨대, 부모의 소득이 1% 높아지면 부모와 자녀가 1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날 확률은 통계적으로 2.07배나 증가한다는 것이다. 또한 따로 사는 부모나 친지들과 서로 왕래하는 횟수도 한국이 일본과 더불어 비교 대상 국가들 중에서 가장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면서도 ‘갑자기 큰돈이 필요할 때 찾는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51.9%가 ‘가족이나 친족’이라는 답변을 했다는 전언이다. 그렇다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도대체 어떻게 규정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 뿐만 아니다. 얼마 전부터 일부 계층에서는 ‘효 테크’란 말도 유행이라는 소식이다. 한 마디로 말해 부모를 자~알 모시는 행위가 곧 자식들의 현명한(?) 재테크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윤리에서 강조하는 ‘자리이타행의 원리’를 곰곰이 되새겨 보게 된다. 왜 부처님은 ‘이타자리행’이라고 하지 않고, ‘자리이타행’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부처님이 보시기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엄연한 자연적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도 부처님은 ‘이기’와 ‘이타’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이타’를 우선하고 ‘이기’를 희생하는 삶보다는 ‘이기’를 앞세우되, 가능하면 ‘이타’까지 배려하는 행위를 윤리적인 삶의 한 형태로 권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모와 자식들에게 적용하면 논의의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즉, 부모와 자식 모두 자신들의 이익을 상대방의 그것보다 먼저 고려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상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와 같은 솔직한 심정을 표현하는 양측의 윤리적 사고방식이 우리 사회의 건전한 도덕성과 어긋나지 말아야 함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그동안 우리의 부모-자식 관계가 너무 서로에 대한 도덕적 의무관계로만 인식되어 왔다는 데에 있다. 그 결과 부모와 자식들은 일종의 상호 채권-채무자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부모와 자식은 서로에 대한 윤리적 기대의 충족 여부로 대부분의 경우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돈이 있어야 자식들의 공경을 받는다’거나 ‘효 테크’라는 금융상품의 등장은 그와 같은 인간적 불편함을 자본주의적으로라도 해소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고육지책이 아니겠는가? 부모는 자식들로부터 효도라는 ‘정신적 이익’을 얻고 싶고, 자식들은 부모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고 싶은 양측의 계산(?)이 그런 식으로라도 타협점을 찾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기도 한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풍경이 되고 있음을 또 어쩌랴!
다행히 윤리학에서는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조정하기 위한 게임의 규칙을 만들거나 또 그것을 도구화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사회윤리학적 접근방법 외에도, 언제 어디서나 또한 어떤 조건하에서도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덕성이 있음을 규명하고 더 나아가 이를 내면화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는 도덕형이상학적 관점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건전한 도덕상식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전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후자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적어도 우리 불자들은 돈으로 ‘효도’를 살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닐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