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휴는 당시 제 이름을 잊었는데 裵相當時忘却名
스님이 불러주어 다시 성성해졌네 被人喚着又惺惺
포태에 생기지 않은 날에는
不知未具胞胎日
누가 감히 성령을 건성으로 대충 말하랴 誰敢塗糊此性靈 -불인원
황벽과 배휴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배휴의 무심으로 자성본원에 활연계회하는 이야기와 배휴가 깨친 이야기를 읽고 마하반야바라밀본지(摩訶般若波羅密本地)를 가름해보자.
어느 날 배상국이 들어왔다가 원주에게 물었다.
“벽에 붙어 있는 게 무엇이오?”
“큰스님들의 초상입니다.”
“초상들은 볼 만한데 큰스님들은 어디에 계시오?”
하니 원주가 말을 못하거늘, 배상국이 또 물었다. “여기에 선승은 없소?”
“예, 희운이라는 수좌가 있는데, 아마 선승 같습니다.”
이에 배상국이 선사를 불러서 다시 물었다. “초상은 볼만한데, 큰스님은 어디에 계시오?”
선사가 “상공!”하고 불렀다.
배상공이 대답하자 선사가 말했다.
“어디에 계시오(在甚 處)?”
이에 배상공이 말끝에 깨달았다(言下領旨). (<선문염송>, 권10 393칙 ‘形儀’)
황벽이 불렀다. 배휴를 불렀다. 허공을 불렀다. 자성본원을 불렀다.
“자, 어디 계시오(在甚 處)?”
정말 어디에 계시오. 한 번 다그침에 배휴가 무심인 일심, 자성본원에 몰록 합일된다. 이것을 <선문염송>에는 단지 언하영지(言下領旨), 말 아래 종지에 닿았다. 영회하다로 가볍게 적고 있다.
이것은 바로 가벼울 대로 가벼워져 아무런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으니 자성본원, 무상대도, 본래면목, 일심무심이다.
앞의 게송, 1행은 오랜 관습과 합리에 의해 자성본원에 두터운 딱지가 앉아 갈무리 되어, 본래 청정한 이름을 망각하고 살아감을 말하고, 2행은 황벽이 존상의 이름에 배휴라 부른 것은 일체만물의 본래 이름을 부른 것. 곧 단말마의 진언인, ‘배휴’하고 부르니 이미 자성본원에 계합된 배휴는 단번에 이 도리를 간파한다.
앞의 선화에서 나타나듯이 이미 자성을 견성한 배휴의 성능은 가히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어서 번뇌 망상의 사슬에 포박당할 이유가 없다. 본래 ‘배휴’나 ‘우리’나 ‘그대’나 ‘나’나 알고 있는 본래의 참 얼굴을 한 번 본 뒤에는 잊혀지지 않으니, 그렇다. 한 번 깨침은 다시 망각되지 않으니, 그나 나나 그대나 오직 모를 뿐이다.
그래서 2행에서 ‘불러주어서 다시 성성해졌네’라 한 것은 다시 한 번 본성을 깨우쳐 주어서, ‘다시 성성해졌다(又惺惺)’라고 불인원이 읊은 것은 노파심임을 알 수 있다. 3행과 4행에서 “포태에 생기지 않은 날에는(不知未具胞胎日)/누가 감히 성령을 건성으로 대충 말하랴(誰敢塗糊此性靈)”라고 노래한 것은 ‘어머니 배속에 ‘그대’나 ‘나’나 생겨지지 않은, 자성본원이니, 바로 기독(基督)이 말씀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의 앞이다. 이러할진대 ‘누가 있어 이 소식에 감히 입을 뗄 수 있을까보냐.’ 이 자리는 과거 미래 현재의 부처도, 천하의 선지식도 입을 때지 못하니, 석가모니도 “말 있음(有言)도 묻지 않고 말없음(無言)도 묻지 않습니다(<선문염송>권1 16칙 ‘양구’)” 하는 ‘외도의 질문에 침묵(良久)’하였고, 달마도 양무제의 질문에 ‘모르오(不識)’(<벽암록>1칙 ‘확연무성’)라 했을 뿐이다.
뒷날 천동각이 위의 선화를 들어(拈) 방문한 손에게 ‘배상국이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질문한 후, 양구했다가 자답했다.
앉아서 자주 술 권한다고 이상히 생각 말게莫怪坐來頻勸酒
헤어진 뒤 그대를 만나기 힘들기 때문일세 自從別後見君稀
착어 : 만나는 곳마다 그, 내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