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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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제1장 구연(具緣)
次受具足戒 作比丘 比丘尼 從修戒來 淸淨護持 無所毁犯 是名上品持戒人也
그 다음으로는 비구 이백오십계를 받아야 되는데 그것을 말해본다면 살ㆍ도ㆍ음ㆍ망(殺盜淫妄) 사바라이(四波羅夷)를 근본중죄로 여긴다. 범어 바라이는 한문으로 번역하면 버린다는 뜻이다. 또는 참회가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가령 이 죄를 범하면 바다처럼 광대한 부처님의 세계 밖으로 버려진다는 뜻인데 이른바 바다가 비록 광대하다 할지라도 죽은 시체는 용납하지 않듯이 바다처럼 광대한 부처님의 세계라 할지라도 이 계를 범한 사람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음으로는 십삼승가바시사(十三僧伽婆屍沙)인데 한문으로 번역하면 여러 사람을 해친다는 뜻이다. 가령 다른 사람에게 무기로 해침을 당했을 때 머리는 손상됐다 할지라도 호흡이 존재한다면 오히려 그 사람을 구제하고 참회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삼십니살기(三十泥薩耆)와 구십바일제(九十婆逸提)가 있는데 번역하면 타락이라고 한다. 이 죄는 재물의 일로 인해서 범하는 죄인데 탐욕과 교만심이 강렬하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고 참회하기 어렵다. 이 죄를 또 사바라이사니(舍尼)라고도 하는데 번역하면 꾸짖는다는 뜻이다. 이 죄는 반드시 겉으로 드러내야만 한다.
일백돌길라(一百突吉羅)는 번역하면 악을 짓는다는 뜻과 악한 말을 한다는 뜻인데 이 죄는 극도로 미세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이 계율을 지니기는 극도로 어렵다. 그러므로 배움의 정도를 따라서 지키는 측면에서 그 명칭을 수립하였다.
또 이불정(二不定)과 칠멸쟁(七滅諍)이 있는데 이상의 내용을 게송으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사중십삼이부동(四重十三二不同) 사중금계 십삼승가바시사 둘은 동일하지 않으며
삼십구십사제니(三十九十四提尼) 삼십니살기 구십바일제
일백중학칠멸쟁(一百重學七滅諍) 사바라제 일백 가지 여러 배움과 일곱 가지 소멸해야 할 언쟁
총론이백오십계(總論二百五十戒) 이 모두를 총체적으로 이백오십계라고 한다.

그 나머지 비구니 삼백오십계는 비구 이백계에다가 <범망경>에 나오는 보살계 십중금계(十重禁戒)와 사십팔경구죄(四十八輕垢罪)등을 더한 것인데 수행인이 이와 같은 일체ㆍ대소ㆍ경중 등 모든 계를 낱낱이 청정하게 지니면서 털끝만큼도 무너뜨리거나 범하는 일이 없다면 이를 두고 상품지계인이라고 한다.

當知是人修行止觀 必證佛法 猶如淨衣 易受染色
마땅히 알아야 될 것은 이와 같이 청정하게 계율을 지니는 사람은 반드시 불법을 증득한다는 점이다. 청정하게 계율을 지니는 것은 비유하면 소중한 보배를 간직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계율을 청정히 지닌 상태에서 수행을 일으켜야만 불법을 쉽사리 깨닫는데 그것은 마치 깨끗한 하얀 색의 옷이 염색을 잘 받아들이듯이 하얀색이 모든 색깔의 근본이 되어 오염된 색깔을 쉽사리 받아들이는 것과도 같다.
계율을 청정하게 지니기가 이처럼 어렵다. 그러므로 최상급으로 계율을 지니는 사람만이 지관을 쉽게 수행할 수 있다.

二者 若人受得戒已 雖不犯重 於諸輕戒多所毁損 爲受定故 卽能如法懺悔 亦名持戒淸淨 能生定慧 如衣曾有垢 若能浣淨 染亦可着
여기에서는 두 번째로 중품인이 지계하는 모습을 밝히고 있다. 가령 수계를 한다면 수계의식을 행할 때가 가장 중요하다. 계단에 올라 네 차례 갈마( 摩)를 할 때부터 즉시 무작계체(無作戒體)를 얻고 나서 청정한 계율을 지닐 수 있는 자라면 그 복이 허공처럼 가이 없다.
그러나 수계식을 하고나서 다시 계율을 범한다면 더욱 죄를 더하는 꼴이 된다. 사중근본대계(四重根本大戒)는 비록 범하지 않는다 해도 가벼운 계율은 범하는 경우가 많다. 가벼운 계율은 니살기ㆍ바일제 등을 말한다.
계를 범한 뒤에 자기의 허물을 알고 그 허물을 드러내어 참회를 해야 하는데 ‘참’이라는 의미는 전념의 허물을 후회한다는 뜻이고 ‘회’라는 의미는 전념악이 소멸하는 자리가 후념악이 일어나는 자리라는 것을 알고 후념악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죄가 있는 줄 알았다면 마땅히 참회해야만 하는데 참회하면 안락하고 참회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더욱 깊어만 간다. 그러므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참회를 해야만 한다.
참회하는 법은 행동으로 하는 참회와 이치로 하는 참회가 있다.
행동으로 참회하는 법은 유상(有相)참회라고 하는데 작법참(作法懺)이라고도 한다. 이는 시방제불과 모든 대보살 존귀한 형상 앞에서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고 나서 자기가 파괴했던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어 슬픈 마음으로 참회를 해야 한다.
이치로 참회하는 문제는 무상참(無相懺)이라고 하는데 이를 실상참(實相懺)이라고도 한다. 이는 의식을 마음으로 거둬들여 단정한 몸으로 고요하게 앉아서 선도 악도 짓지를 않고 오직 이 죄의 성품은 어디로 일어났을까 관찰할 뿐이다. 즉 자성의 원인에서 일어났는지, 타인의 성품이 외적인 조건에서 일어났는지, 아니면 자신과 타인의 공통된 성품에서 일어났는지, 혹은 자성의 원인도 아니고 타성의 조건도 아닌데서 일어났는지 이러한 문제를 관찰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네 구절로 추궁해 보았으나 그 죄업의 성질을 모두에서 끝내 얻지 못한다면 죄의 성질은 본래 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땅히 알아야 될 것은 일체 죄업은 오직 마음을 따라서 조작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음에서 추구해보았지만 죄의 성질을 끝내 얻지 못한다면 그 죄의 성질도 실체를 얻지 못한다. 이것은 이른바 죄업은 마음을 따라서 일어나므로 다시 마음으로 참회해야 된다. 마음이 소멸할 때에 죄 또한 없어지면 죄의 성질이 없어지고 마음마저 소멸하여 이 둘이 모두 공이라면 이를 두고 진실한 참회라고 한다.
이 같은 이참(理懺)은 모든 참회 가운데서도 공덕이 가장 광대하다. 이를 두고 옛날 큰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무거운 죄업은 마치 서리나 이슬과 같아서 지혜의 해가 밝아지면 바로 소멸된다”한 경우에 해당된다.
가령 참회를 하고 싶어하는 자라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죄의 실제모습을 관찰하여 스스로 죄업의 장애가 깊고 무겁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와 같은 참회법을 의지해서 법답게 참회해야 한다. 이를 두고 계율을 청정하게 지닌다고 한다. 이 같은 사람을 중품으로 계율을 지니는 사람이라고 한다.
참회할 줄 아는 사람은 얻기 어려운 사람이다. 왜냐하면 옛날 큰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성현이 아니라면 누군들 허물이 없으랴. 허물을 알고 고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가령 참회를 할 수 있다면 즉시 정혜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마치 때 묻은 옷을 세탁을 하면 염색을 할 수 있는 것과도 같은데 옷은 개체와 같고 더러운 때는 계를 파하는 것하고 같고 세탁은 참회하는 것과 같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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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8 오전 10: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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