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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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주처를 믿고 세상을 한번 새롭게 걸어보세요! 하는 사이 없이 하는 것이 마음의 진짜 자비한 보시!
(지난 호에 이어서)
그러니 천당 지옥이 따로 있다고 하지 마시고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기한테 짊어지워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나는 어떤 땐 이렇게 생각합니다. 꼭 내놓고 남한테 보시를 하느냐? 그게 아닙니다. 진짜 자비한 보시라면 길에 가다가도, 옹기종기 애들을 데리고 추운 데서 떨고 있거나 더운 데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거나, 쫓겨나서 집을 얻으려도 돈이 모자라서 못 얻고 오갈 데 없이 헤맬 때 그냥 아무거라도, 하다못해 재를 지내 달라는 돈이 있다 할지라도 그냥 주는 게, 그게 재를 잘 지내 주는 일이죠. 그게 진짜 보시지, 내가 한다는 게 없이 해야 보시지 내가 한다고 하고 내가 했다고 하고 보시하는 건 보시가 하나도 안돼요. 자기한테 요다음 생에, 세세생생의 예금 통장이 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왜냐하면 더불어 같이 살고 더불어 둘이 아닌 까닭에, 나를 내가 도운 건데 나를 위해서 내가 한 건데 누구한테 잘했다 못했다 하겠습니까? 가게 물건을 사러 갔을 때에 물건을 하나 샀으면, 얼마짜리든 돈을 주고 물건을 샀으면 준 것도 없고 받은 것도 없단 얘깁니다.
이런 거와 같이 여러분은 정신계를 좀 더 추구해서, 나를 지금 이끌어 가는 놈이 누군가, 나를 공부하게 하는 놈이 누군가, 나를 군대에 입대하게 하는 놈이 누군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있으니까 한 거 아닙니까? 누가 갖다 넣은 것도 아니고 누가 뺏어 가는 것도 아니죠. 행복을 누가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뺏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서 행복한 거지요. 그러니까 누가 하라 말아라 한 게 아니라 바로 자기가 생겼으니까 하게 된 거죠. 그러니 그렇게 되게 만든 그 장본인이 누구냐는 얘깁니다.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 속에, 그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서는 천차만별의 말 뜻 행, 이런 거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블랙홀이라는 그 큰 별성이 내가 될 수도 있고 이 지구가 내가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행성이 내가 될 수도 있고, 또는 태양이 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부처님께서는 “만 명이 깨달아도 일불이니라. 그 일불의 마음은 바로 내가 나 아님이 없기 때문에 어떤 혹성이 팽창이 되거나 타 버린다거나 이래도 내가 그것이 되는 까닭에 내가 나를 죽이는 법은 없느니라.” 이랬습니다. 그래서 모든 걸 이끌어 갈 수 있다 이런 거죠, 수명을 길게 할 수도 있고. 이 한 가지를 비롯해서 일체 만법을 다 알 수 있는 거라고 보는데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억겁을 통해서 나온 것을 어떻게 한마디로 다 말을 하겠습니까마는…. 근본적인 나! 나로 인해서 이 세상이 벌어졌다. 나로 인해서, 바로 참나로 인해서 껍데기인 나가 지금 기계처럼 움죽거리고 있다. 그러니 움죽거리는 것도 그 속에서 작용을 해서 움죽거리게 하니까 ‘내가 움죽거리고 있는 것이다.’ 하는 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마음이 발전되면…, 옛날에도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저쪽 군사는 천 명인데 이쪽에는 오백 명밖에 안 됐답니다. 그래 그것을 다 해결을 하기 위해 어떻게 생각을 했겠습니까? 자기 속에 있는 생명들의 의식을 모두 투입했습니다. 자기 군사들 오백 명한테 투입을 하고 또 그쪽에는 그쪽대로 투입을 해서, 모두 자기 군사가 아닌 줄 알고 싸워서 오백 명을 다 해치우더랍니다. 이거는 그냥 옛날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 현실입니다. 여러분이 보이는 물체가 오면 ‘아! 저기서 오는구나!’ 이렇게 보지만 보이지 않는 데서 오는 거는 누가 덜미를 쳐도, 누가 모가지를 친다 하더라도 못 보니까 몰라요. 그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그 군사 오백 명을 가지고 천 명을 이겼는데, 죽인 게 아니라 그냥 그대로 싸움이 멎고 편안하게 잘됐더랍니다. 피리 하나를 가지고도 그렇게 했고, 나무의 잎사귀 하나하나를 군사로 만들어서 투입을 해 가지고 이기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럼 지금 발전된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바로, 바로 여러분 마음속에서 그대로 천차만별의 그 마음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거죠. 마음은 한계가 없어서 허공에 하나의 마음이 꽉 찰 수도 있는 거고, 하나도 없을 수도 있고, 마음대로니까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해도 모두 해 보지 않았으니까 아리송하고 모르겠죠. 여러분이 만약에 맛있는 자장면을 안 먹어 보고 얘기도 들어 보지 않았더라면 먹고 싶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먹어 보고 해 보고 했으니까 그게 하고 싶고 먹고 싶지, 보지도 못하고 먹어 보지도 못하고 맛도 모르고 누구한테 얘기도 못 들었다면 그건 아마 발전도 할 수 없고 먹고 싶지도 않을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한번 시도를 해 보라는 겁니다. 평상시에 항상 ‘너만이, 너만이 할 수 있어.’ 하면서, 바로 아까 컴퓨터 얘기 했죠? 구정물이 나올 때는 거기다 ‘구정물이 나오게 하는 것도 너니까 구정물이 안 나오게, 맑은 물 나오게 하는 것도 너야.’ 하고 되입력을 한다면 구정물이 바로 말간 물로 화해서 나옵니다.
그런 것과 같이 팔자 운명은 없습니다. 모두 살기도 힘든데 여기 뭐가, 이사 가는데 손이 있어서 못 간다, 날짜를 봐야 한다 이러는데, 뭐가 있다고 날짜를 봅니까? 내가 ‘어느 날이 좋겠다. 그러면 여러 사람들이 도와줄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 날로 이사를 하는 거고…. 이 한마디로 다 아셔야 됩니다. 재 지내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게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다 들으시라고 이러는 겁니다.
우리가 재를 지낼 때도 떡 하나면 됩니다. 물, 초, 향, 떡 하나. 왜냐하면 그 살던 의식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버둥거리다가 갔는데 또 먹는 거를 갖다가 상에 놓고 의식적으로 항상 붙들어 매놓는다면 이 공기주머니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말려서 승천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안 해도 아니 되고 너무 차려 놔도 아니 되고 그냥 떡 하나면 족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떡 하나 가지고 다 먹고도 그 떡이 되남는데 말입니다.
이 도리를 알 수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모두 여러분이 마음속에다가…, 급하면 그렇게 차려 놓고 할 사이도 없죠. 상황에 따라서 급하면 그냥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여기다가…. 조상도 전부 한 줄에 꿰여 있어요. 콩 종자라면, 콩씨라면 콩씨대로 놓여 있고 팥씨라면 팥씨대로 모여 있지 콩씨하고 팥씨하고 섞어 놓는 법 봤어요? 과일도 전부 끼리끼리 모아 놓으면서도, 그것도 큰 것과 작은 걸 골라서 또 놔요. 인간 자체 살아나가는 것도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저절로 자동적으로 모이고, 기사님들은 기사님대로 자동적으로 모이고, 군인은 군인대로 자동적으로 모입니다. 아, 한번 보세요, 안 그런가. 제가끔 다 저절로 자동적으로 모여서 살죠? 그리고 더불어 도와 가면서 살죠?
만약에 옷 짜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가 옷을 지금 어떻게 입고 있으며, 농사짓는 사람이 없다면 농사지은 걸 어떻게 우리가 지금 먹고 지내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농사짓는 데에 가면 농사꾼이 높고, 배 타는 데 가면 뱃사공이 높고, 옷 짜는 공장에 가면 옷 짜는 공장 주인이 높고, 모두가 제각기 높으니라. 그래서 평등하니라.” 하고요. 요새 내가요, 치아가 빠져서 치과에 가니까 치과 의사, 원장님이 제일 높습디다. 거기 가니까 내가 아주 밑에, 딱 그냥 밑으로 가 버리잖아요. 하하하….
그러니 이 만물만생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라를 이끌어 가는 어버이라면 소 또는 말, 사람 등 어느 차원의 도량이든지 다, 그 도량에 가면 내가 그게 돼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얘야, 소를 건지기 위해서는 내가 소 속에 들어가서 내가 소가 돼야 하느니라. 그렇지 않다면 소가 저항력을 느껴서 한마음이 되지 않느니라. 내가 소가 돼야 소도 나에게 저항력을 느끼지 않아서 한마음이 되니까 건질 수 있는 건데, 안 그러냐?” 하고 말씀하시더랍니다. 그러니 소뿐이 아닙니다. 미생물에서부터 우주 또는 별성, 태양, 어느 혹성이라 할지라도 어느 거 하나 아니 되는 게 없이 되는 거죠. 저항력을 느끼지 않게끔 하나가 돼야 건지죠.
사람 하나 건지는 데도 내가 그 사람이 돼 줘야 건져지는 거지 내가 잘났다고 그 사람을 끌려고 애를 쓰면 절대로 그건 이끌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죽어야 모두 한마음이 되는 거지 내가 죽지 않는다면 한마음이 어떻게 되며, 내가 베풀지 않는데 어떻게 상대에서 베풉니까? 내가 아무리 잘났다 해도 잘난 게 하나도 없어요. 나를 보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각자 여러분도 다 그렇고, 또 각자 부처님들이 말씀하신 겁니다. “내가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지옥에 갈 땐 지옥고에 있는 거고 또는 중세계에 갈 때는 중세계에 있는 거고 상세계에 갈 땐 상세계가 주어지는 거니라. 그러니 어느 것이 내가 될 때에 나라고 할 수 없느니라. 그래서 내가 했다고 할 게 하나도 없느니라. 그래서 내가 온 자리도 없기 때문에 갈 자리도 없느니라.” 하고요. 보세요! 이 자리에서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그냥 모습만 찰나에 왔다 갔다 하는 거죠. 그런데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모습과 차원이 주어지죠. 주어지는 모습과 차원은 자기가 한 대로 오는 거니까요. 그래서 ‘이 세상은 중세계다. 하천세계로 떨어지거나 상세계로 올라가는 중세계다. 그래서 이거는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거니까 공부를 해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되는 거니까 너 먼저 알아라.’ 이런 거죠.
그러니 소년 소녀 가장 돕기라고 하지만 그게 내 자식들입니다. ‘예전에 내 자식이었을 때 그렇게 불행했었고, 예전에 나였을 때 그렇게 불행했었고, 그러니 그 아픔을 어찌 다 말로 하랴!’ 하고 그것을 내 아픔처럼 생각해야 되고, 물질적인 보시도 해야겠지만 정신적인 보시가 또 있습니다. 정신적인 보시는 둘 아니게 같이 하는 공덕을 쌓은…, 그 쌓은 것도 없는 것이 공덕이죠. 공덕을 쌓은 그거를 한마음으로 같이 한다면 차차차차 그 애들이 잘되고, 마음들이 이리로 가서 나쁠 거를 저리로 가게 만들고,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그게 마음 보시입니다. 그래서 하는 사이 없이 하는 것이 마음의 진짜 자비한 보시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 보시를 해서 잘되기 전에 벌써 굶어 죽게 생겼으니까, 그리고 애들이 또 활력이 없으니까 우선 먹을 걸 줘 가면서 정신적으로 보시를 해 줘야 잘될 거 아닙니까?
원주에서 이런 예가 있었죠. 원주 경찰서 앞에 어떤 미친 여자가 말입니다, 만날 벌거벗고 돌아다니면서 그 경찰서에 있는, 뭐라고 해야 될까요? 서장이나 뭐 어떤 분이 나오든지 간에 그냥 차를 막고는 훼방을 놓았습니다. 그래서 붙들어서는 그냥 저기다 내다 놓고 이렇게 했는데도 연방 거기로 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가 상원사 토굴에 있을 때인데 내려갔다가 아이, 거기서 만났어요. 그런데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야이, 똥개 새끼야!” 허허허…. 그때만 해도 똥개 같았죠, 뭐. 찢어진 바지에다가 그냥 밀짚모자 하나 쓰고서 그냥 몸은 뭐, 개미허리 같았으니까 말입니다. 그랬는데 말입니다, 세상에 자기 아버지도 없고 노모 한 분밖에 없는데 그 노인네도 병자예요. 그래 가지고는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었죠. 그래서 그날부터 먹는 거나 용돈을 다 대 주면서 마음의 보시를 했던 겁니다. ‘과거에 수억겁을 거쳐 올 때에 나는 저렇게 안 했을까? 바로 옛날의 내 모습과 같구나! 그때 나도 이렇게 도움을 받아서, 부처님께서 도움을 주셔서 이렇게 걸어왔지.’ 하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 경찰서 앞을 만날 쓸라고 그랬습니다. 빗자루를 주고 말입니다. 자꾸 쓸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말을 들어요. 그냥 만날 아침마다 나와서 거기를 쓸고 그러더니 아주 나아서요, 지금은 아들 딸 낳고 잘 살아요. (대중 박수)
그런데 여러분이 가정에서 살면서 시시때때로 닥쳐오는 그 모든 것을 어떻게 대치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누구에게 이루종차 말을 해서 대치해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어떠한 종교를 믿든지 간에 그걸 떠나서 내가 변소에 있으면 주처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변소에 있다고 해서, 더럽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라 더럽고 깨끗하고 이거를 떠나서 항상 내가 있는 자리에 부처님은 계시다는 걸 아셔야 하고, 또 기독교 믿는 사람은 내가 있는 자리에 바로 주님이 계시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내가 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거다 이런 얘기입니다. 부처님이란 뜻은 몸, 이 안에서도 더불어 같이 살고, 내가 따로 없이 더불어 살고 바깥에서도 내가 따로 없이 더불어 같이 사니 어찌 그것을 말로 해서 한 인간의 이름으로 지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더불어 같이 내가 아니 됨이 없이 내가 되는 그 한마음을 규정지어서 부처님이라고 말씀해 놓으신 겁니다. 그리고 또 주님이라고 한 것도 역시, 여러분 몸속에 의식들이 모두 같이 하고 있으니 한마음으로 같이 하고 있는 그 가운데서 자기가 주둔하고 있는 마음이 바로 주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기가 표현하자니까 ‘님’자를 붙인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를 알면, 나를 다스려 가는 나를 안다면 바로 이 세상을 다스려 가는, 하나로 돌아가는 도리를 알 수 있다 이래서 하나님이라고 그랬습니다, 또. 내가 없다면 하나님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하나로 돌아가는 원리도 없으니까요.
나는 이렇게 말하죠. 예수께서 “각자 너를 믿지 않고 타인을 믿는다면 도깨비장난이요 귀신 놀음이니라.” 이런 말을 한 것을 ‘각자’라는 소리를 안 해서 모두 편집이 잘못됐다고 나는 생각하죠. 부처님은 똑바로 말씀해 놓으셨는데…. 부처님께서도 “각자 너 자체를 모르면서 타인을 믿는다면 안 된다.” 타인은 따르라고 그랬지 믿으라고 한 건 아니다 이겁니다. 고깃덩어리를 믿어서 될 수 있겠느냐? 그러니 타인을 믿어서 되는 게 아니고 타인을 믿어서 깨닫는 게 아니니 타인을 믿는다면 바로 도깨비장난과 같고 그건 귀신 놀음밖에는 되지 않는다 하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랬는데 예수께서도 자기네들이 각자 모두 잘 알아들을 줄 알고 “바로 나를 믿지 않고 타인을 믿는다면 귀신 놀음이요, 도깨비장난이니라.” 이렇게 말했을 텐데 말입니다. ‘각자’란 말을 안 했기 때문에, ‘나’라고 했기 때문에 그냥 전부 예수만 찾는 거죠. 자기가 자기 마음을 알아야, 영을 알려면 영이 돼야 영을 알죠? 영세계에 가려면 내가 영세계에 들어가야 영세계를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수많은 일체 만물만생을 다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가 않고, 일체 만물만생을 다 꺼낸다 하더라도 줄지 않는다. 그 가운데에 그대로 내 마음 쓰는 게 법이니라.” 하셨습니다. 마실 수도 있고 꺼낼 수도 있고 두드러지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그런 것과 같이, 예수도 그랬겠죠. ‘너를 믿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야 되는데 ‘나를 믿지 않는다면’ 했으니 그 ‘나’가 ‘각자 나’라고 한 소린데 잘못 들어서들 그럴 거예요, 아마. 그랬을 리가 없죠.
하여튼 여러분이 모두 지금 이 나라에 태어났으니 이 나라 사람들 아닙니까? 이 나라에 태어나서 이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국민으로서 잘 이끌어 가야 하고 발전이 되더라도 진실하게 발전이 돼야 하고 진실한 국민이 돼서 또 자녀들도…. 그래서 이런 말을 해요. 아이, 학교를 안 가고 온통 나가서 자고 나쁜 사람들에게 모두 얽매여서 다닌다고 울고불고 어머니들이 그러는데 내가 그랬죠. “아무리 요놈의 자식 저놈의 자식 하면서 때리고 그래도 안 된다, 그건. 마음에서 고장 난 거니까 마음으로 고쳐야 되는 거지.” 하고요. 육신이 들어오면 “요놈의 자식아, 너는 배울 시기에 배우지 않고 요다음에 깡통을 차련?” 하고 그냥 뭐 별소리를 다 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아주 모질게 그렇게 마음먹고 하는 대로 그대로 되는 거죠. 그러니 그 마음 하나 먹기가 그렇게 어려운 거죠. 어린애를 뱄어도 태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르고 별소리 다 하고 별 마음 다 갖고, 융통성 없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일러 줬죠. “그 마음과 내 마음이 부모 자식이라는 가설이 돼 있으니까 ‘그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닌 까닭에 너만이 걔 마음에 밝게 불이 들어오게 할 수 있잖아.’ 하고 진짜로 거기다 놔라. 그런다면 바로 불이 들어 올 수 있다. 그러면 저절로, 제 발로 그냥 들어오게 된다.” 하고요. 그랬더니 그렇게 실천해 본 사람이 “스님, 참 고맙습니다. 아유! 어저께 들어왔습니다.” 하면서 아들 이야기를 하는데, 하루는 김치 항아리를 닦는데 아들이 다가오더니 그냥 “어머니, 힘드시죠? 내가 좀 들어 드릴까요?” 하더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날부터 그렇게 좋아지더랍니다. 100% 효자는 되지 않았어도 반 이상, 삼분지이는 효자가 됐답니다. 그러니 효자가 되기 이전에 자기가 잘돼 나가려고 그렇게 된 거죠. 그러니 같이 불이 들어온 겁니다. 여기 스위치도 그쪽과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스위치를 누르니까 함께 불이 들어온 거죠. 만약에 가설이 안됐더라면 하나도 안 들어왔을 겁니다. 그러니 그런 것과 같이 어떤 자리이건 나라의 소임을 맡아서 일하시는 분들도 모두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항상 일을 해야 일하는 능률도 오를 뿐만 아니라 국민을 다 살리는 힘이 될 겁니다. 내가 했다 네가 했다 함이 없이 말입니다.
하여튼 그렇게 광대하고 무변해서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게 불교입니다. 불교는 그렇게 어떤 곳의 머리 깎은 스님네들만 하는 게 절대 아니라는 거를 아셔야 합니다. 집이 허물어지면 주인이 고치지 집이 서둘러서 고칩니까? 아, 생각들 해 보세요. 주인이 고치죠? 그러니까 나의 집합소인 껍데기, 내 집이 헐어지고 어디가 잘못됐다 하더라도 그 집에서 고장 난 건 그 속에서 작용해 주는 바로 자기네들이 해결해야 될 거 아닙니까? 지은 것도 그 속에서 지은 거니까 허물어지는 것도 그 속에서 고쳐야죠? 이열치열이란 말 있죠.
그러니 여러분도 앞날을 위해서 정신계를 소홀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항상 정신계와 물질 즉, 정신계와 이 몸이 둘이 아니게 움죽거린다는 거를 진실히 믿으시고 자기 몸, 자(子)는 보이지 않는 정신계의 자기 부(父)를 진짜로 믿어서 둘 아니게 평등공법을 쓰신다면 아주 좋으실 겁니다.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세세생생을 거쳐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지금 이 마음공부 하다가 그 몸을 벗는다 하더라도 그 차원은 그대로 가지고 요 세상에 다시 와서 또 공부하실 겁니다. 이 공부 하지 않는 사람들은 몰라서, 이 세상에서 살 때 원수를 지고 그런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혼란을 일으킬까 봐 아예 까맣게 모르게 만들어 놓은 거죠.
그런데 이 공부를 한 사람들은 우주 한울에서, 즉 도리천에서, 즉 말하자면 열쇠를 주는 것이 바로 해인(海印)을 받는다고 하는 거와 똑같습니다. 일체제불의 마음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이런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도 일체 모든 중심에서 증명을 받아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다 안 한다를 떠나서 그대로 자기 정신계의 자기 주처를 진짜로 믿고, 자기 주인공을 진짜로 믿고 세상을 한번 새롭게 걸어 보세요. 그럼 실험도 되고 체험도 되고, 눈이 밝아져서 바다를 내다볼 수도 있습니다. ‘바다에 물고기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아하! 자동적으로 그 물 밑까지, 태양력이 들어가지 않으니까 물 밑까지 살리게 하기 위해서, 또 먹을거리를 주기 위해서 물 밑까지 파도를 치고 그냥 돌게 하는구나.’ 하고 알게 될 겁니다. 파도가 치고 온통 모두 물이 뒤집히면 ‘왜 그런가?’ 그렇게 생각되지만 그것이 아니라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니까요. 여러분도 지금 고생하는 것이 고생을 하다가 보면 느끼는 점이 있고 그래서 그다음에는 그 고생한 게 계기가 되어서 그게 참 큰 재산이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니 오늘 요것은 말로는 어떻게 다 할 수 없고요, 여러분이 스스로 해 보시도록 하세요. 그러면 체험도 되시고 또 자기가 진짜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자기는 의식적으로 그냥 사는 거니까요.
2008-09-06 오전 8: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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