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께서 이렇게 모두 한마음으로 동참해 주셔서 너무도 감사합니다. 여러분께서 여기 동참해 주신 그 선후에 대해서는 회장님께서 말씀해 주신 바와 같습니다. 이 안양시의 귀빈 여러분께서 오신 것도 회장님이 다 말씀하셨으니까 저는 그냥 생략하겠습니다.
우리가 소년 소녀 가장 돕기라고 했지만 가장 돕기는 이런 자리를 마련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수억겁을 거치면서 미생물에서부터 수없이,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면서 진화되고 화해서 인간까지 이렇게 왔고, 인간이 돼서도 또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면서 헤아릴 수 없는 광년을 거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습니다. 그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신다면 어떤 게 내 부모고 어떤 게 내 부모가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는 얘기며, 어떤 것이 내 자식이 아니고 어떤 것이 내 자식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평소에도 모두를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또 내 한도량으로서 내 몸과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요, 또는 자(子)와 부(父)가 둘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불교(佛敎)가 어떠한 것인가? 불(佛)이라는 것은 일체 만물만생의 생명의 근본입니다. 그리고 교(敎)란 우리가 못났든 잘났든 이 세상에 나서 배우고 느끼고 아는 것을 말하는데, 또 물리가 터져서 과학을 발전시키고 문화 문명을 발전시키는 여건이 되는 마음들이 생기는 것도 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란 진리인 것이지 어디 한 군데 국한된 종교가 아닙니다. 이 우주와 더불어 삼라만상 자체, 만물만생이 전부 직결돼 있고 가설이 돼 있습니다. 심지어는 내 몸속에 있는 생명들도 내가 마음 쓰는 대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네 종교, 내 종교 하고 싸울 겨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기들이 물 바깥으로 나오면 죽듯이, 인간도 공기주머니 속에서 한 발짝도 에누리 없고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만약에 지구가, 그 공기주머니가 버스라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오는지 그것도 모르면서 네 걸상 내 걸상 하고 싸우고, 네 걸상이 옳으니 내 걸상이 옳으니 하고 싸우는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게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머리 깎은 사람이나 목탁 치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일체가 다 만물이 다, 같이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면서 이심전심으로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도 새 한 마리도 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나와서 볼 때에 시급한 문제는, 어떻게 해야만이 그 광대한 진리, 불교라는 그 언어 없는 언어를 성실히 실천해 갈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못났든 잘났든 이 세상에 났다면 우리가 바로 ‘불(佛)’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이 상대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있음으로써 상대가 있고 부처님도 계시고 부모도 있고 가정도 있는 것인데 ‘나’는 버리고, ‘나’는 생각지도 않고 항상 이름과 형상에만 매달려서 모두 밖으로 찾으면서 기도한다면 아무리 보기는 좋고 멋은 있을지언정 참자기는 발견을 못할 겁니다.
우리가 내세울 게 없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도 몸속에 헤아릴 수 없는 생명과 의식과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억겁 전으로부터 우리가 진화돼서 형성됐다는 증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몸이라고요. 그 속에 천차만별의 모습들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까? 그런데 몸속에 있는 그 모습들 중의 하나가 만약에 큰 물체로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들이 축소돼서 모두 여러분의 몸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인과성 업보성 유전성 영계성 세균성, 이 다섯 가지로 주둔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주둔하고 있는데 어떻게 여러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마음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인과로서 나의 몸에 모두 주둔이 돼서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에서 생각난다고 해서 생각되는 대로 ‘내 마음에서 나오지.’ 이렇게 생각은 마세요. 그거는 의식 속에서, 그 다섯 가지의 의식 속에서 다 나오는 것입니다.
진짜 자기의 심봉이라는 선장은 바로 불이라고도 하고 부처라고도 하고 자아라고도 하고 주인공이라고도 하고, 여러 이름이 많습니다마는 그 선장은 바로 움죽거리지도 않으면서 중심에 끼워져 있는 심봉과 같은 겁니다. 수레 중심에 끼워져 있는 그 중심축입니다. 그걸 주장자라고도 합니다. 그 심봉은 힘을 배출해 줄 뿐이지 부동한 것인데 바퀴가 모두 거기에 의지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몸 자체가 수레라고 본다면 우리 부처님 자체, 근본이 바로 그 심봉과 같은 겁니다.
그러니 ‘시공이 없이 돌아간다’고 하는데 이 뜻은 뭐냐? 우리가 생각할 때에 보는 거 듣는 거 말하는 거 가고 오는 거 만나는 거 먹는 거 싸는 거 자는 거, 일거수일투족이 모두가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고정되게 하는 게 하나라도 있나. 그렇기 때문에 내가 했다, 내가 들었다, 내가 망했다, 내가 잘되게 했다, 이렇게 내세울 게 하나도 없다 이 소립니다. 어떤 거 할 때에, 어떤 거 볼 때에 내가 봤다고 하며 내가 했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가정에서도 본다면 때에 따라서 “여보!” 하면 남편이 되고 “아버지!” 하면 아버지가 되고 “얘, 아무개야!” 부르면 바로 아들이 되고…, 이렇게 찰나찰나 나투어서 돌아가듯이 인생살이는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이니라. 그 공마저도 공했느니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불교라는 이 자체가 광대하고 어마어마해서 말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위치에 있고, 말로는 어떻게 헤아릴 수가 없고 셀 수가 없어요.
여러분이 수없는 진화를 해 왔습니다만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바로 자기 모습, 자기 차원이 주어지곤 하죠. 인생이라는 것이 망망대해에 배 띄워 놓은 거와 같고, 살얼음판을 딛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어떡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구덩이에 빠질 수가 있고 물에 빠질 수가 있고 어떡하다 보면 배가 뒤집힐 수도 있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부처님께서는 여러분의 몸을 배로 비유했고 몸뚱이 속의 생명들을 중생이라고 했습니다. 마음들이 의식적으로 모두 한 심봉의 선장으로다가 합쳐 주지 않는다면 배는 뒤집히게 돼 있죠. 한마음이 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체 만물만생 중에 무정물이든 식물이든 간에 뿌리 없이 사는 싹은 하나도 못 봤어요. 그렇듯이 여러분도 영원한 자기 선장의 뿌리가 있는데도 그 선장을 믿지 않고 타의에서 자기 자신을 구한다면 백 년 만 년이 가도 자기를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어떠한 마음을 쓸 때에 내가 올바로 했느냐, 어떠한 마음을 쓸 때에 내가 했느냐,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했느냐에 따라서 내 마음 그 자체도 천차만별로 하는 사이 없이 나갑니다. 고정됨이 없어서 하는 사이 없이 하고, 가고 오는 사이 없이 가고 오고, 보는 사이 없이 보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내가 했다’ 하는 생각도, ‘내가 안 했다’ 하는 생각도 그냥 묵묵히 놓고 가라는 겁니다. 바로 자기 몸뚱이, 생명의 집합소가 하는 게 아니라 생명 속에 그 생명을 리드해 나갈 수 있는 그 주인이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 주인을 바로 부처라고도 하고 자기 주인공이라고도 합니다. 타의에 있는 게 아니라 모두 자의에, 나로부터 세상은 있는 겁니다. 사대 성인들이 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부터 믿고 너부터 알아라. 너를 알아야 하나로 돌아가는 이 우주의 섭류도 다 알 수 있느니라. 너를 모른다면 어떻게 남을 알 수 있으며 우주의 섭류를 알 수 있겠느냐?” 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마음이 묘하고 광대한 것을 여러분은 모르고 착각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신도님들한테 이렇게 말하죠.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좋다. 일거수일투족 들어오고 나가는 거, 내고 들이는 거, 그것을 하는 놈이 누구냐? 네가 하지 않느냐. 바로 네가 한다면 네가 어떤 거 할 때 너라고 할 수 없으니 바로 주인공이다. 그러니 주인공에다 모든 걸 맡긴다면 일체가 무너진다.”라고 합니다.
이런 게 있어요. 우리는 고등 동물이기 때문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됩니다. 그런데 불가에서는 오신통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심안으로 보는 거, 마음의 귀로 듣는 거,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거, 남의 마음을 아는 사이 없이 아는 거, 자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아는 거, 그래서 숙명통 천이통 천안통 신족통 타심통, 이 다섯 가지를 오신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그것이 말입니다, 시쳇말로 다섯 가지가 갖추어진 컴퓨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다 할지라도, 자기가 하고 가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고 가는 그 자체가 입력이 되어서 입력된 것이 현실로 나오는 겁니다. 어저께도 과거고 일 초 전도 과거입니다마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과거에 있는 것이 현실에 모두 나오니까 말입니다. 컴퓨터에 입력이 되면 그대로 현실로 나오죠? 그런 거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리에다 놔라 하는 것은 뭐냐? 그 입력된 것이 나오는 자리에다 되입력을 한다면 앞서 입력된 게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만이 과거의 모든 유전성 업보성, 그 다섯 가지가 없어질 수 있고 또한 거기는 팔자 운명도 붙지 않는 자리다 이겁니다. 바로 입력된 게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말로 하든 상식으로 하든 지식으로 하든 어떠한 걸로 해도 그거는 절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 자리에다가 다시 입력을 해야만이 그거는 없어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 아니라면, 타의에서 구해서는 자기가 깨달을 수 없느니라.” 하신 겁니다. 여러분한테 이런 말 하죠. 여섯 가지 대신 못해 주는 게 있습니다. 밥 먹는 거 똥 누는 거 자는 거 아픈 거 죽는 거 깨닫는 거, 이 여섯 가지를 누구도 대신 못해 줍니다. 대신 못해 주는 이 자체가 바로 ‘인생은 홀로 와서 홀로 간다. 그런데 가는 곳이 있느냐? 바로, 가는 곳도 그 자리요 오는 것도 그 자리요 사는 것도 그 자리!’란 말입니다.
만약에 과거가 있다고, 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일 초 전에 과거였는데 현실로 오느라고 과거라고 했습니다. 현실로 오기 위한 방편에 의해서 과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로 인해서 현재로 오려면 그 사이가 미래죠. 그러니까 과거도 현재고 미래도 현재란 얘깁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현재도 공했느니라.” 하셨습니다. 공했다는 그 말을,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란 말을 아까 얘기해 드렸죠.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서 내세울 게 없기 때문에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고 그런 가운데에 있느니라. 이 줄이 말입니다, 전력을 가져오려면 이쪽 줄과 저쪽 줄이 한데 합쳐져야 하고 그래서 불이 들어올 뿐입니다. 어느 누가 “스님, 참 이런 공부를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기에 내가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너의 줄과 내 줄이 한데 합쳐져서 불이 들어올 뿐이지 네가 한 것도 내가 한 것도 바로 둘이 아니다.” 이런 말을 했죠.
그러니 지금 과학이 발전됐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마음이 터지지 않는 이상 진짜 실천할 수 있는 과학을 연구 못할 겁니다. 무(無)의 세계, 정신세계 50%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의학계도 그렇습니다. 50%를 모른다면 그 반만 가지고는 사람을 100%로 건질 수가 없습니다. 모두 살고 있는 것도 99%지 100%라고는 말할 수 없겠죠. 그래서 죽는 것도 건지는 거요 살리는 것도 건지는 겁니다. 헐었던 옷을 벗어 버리게 하고 진화해서 다시 새 옷을 입게 되니까 그것도 건지는 겁니다. 건지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여러분은 모르실 겁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차원도 모습도 가져올 수 있고, 어느 집에 인연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바로 자기 인생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이미지를 끝까지 어떻게 남기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세세생생에 주어진다고 봅니다.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세세생생 주어지는 것이니까, 세세생생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헤매고 돌게 될는지 어떨지는 자기의 소관입니다, 모두.
우리가 지금 잘 알아야 할 문제는, 소년 소녀 가장 돕기라고 하지마는 이 외에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런데 한생각의 보시가 있습니다. 이 한생각의 보시라는 것은 자기 몸같이 생각하고 자기 아픔같이 생각하고, 자기 부모같이 생각하고 자기 자식같이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만 하라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현재의 부모만 부모가 아니고 현재의 자식만 자식이 아닙니다. 수억겁을 거치면서 그렇게 해 왔는데 어느 때의 내가 인생으로 출현됐을 때에 나라고 하겠습니까? 내 부모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그저, 등록금을 못 내서 학교를 못 가는 애들을 봐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이 스스로 생겨야 되는 거죠? 억지로는 못하죠. 내 우물 안만 생각하지 마시고 바다를 보시란 얘기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주머니 속에서 허덕거리고 있는 인생살이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은 광대하고 무변하고 묘하니까 네 마음이 그 공기주머니를 뛰어넘어라, 그러면 자유권을 얻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더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이 뭐냐? 우리는 지금 이 몸뚱이 속에 있는 생명들의 집이 되죠? 이 집이 무너지면 안 되죠? 이 집은 안의 생명들을 보호하고, 안의 생명들은 작용을 해서 이 몸을 보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마음 씀씀이대로 바로 속에 통신이 돼서, 대뇌로 통신이 돼서 소뇌를 거쳐서 중뇌로, 중뇌에서 책정을 내려서 사대로 통신이 됩니다. 사대로 통신이 되면 거기에서 공장마다 바로 부족한 거를 메우면서 다 이렇게 튼튼하게 이끌어 갑니다. 이 대뇌로 통신이 안 되면 책정을 내릴 수가 없어서 몸속에서 작용들을 못하죠. (이마를 짚어 보이시며) 여기가 명령서인데요. 그러니까 의학도 심성의학이 돼야 하고 문화 문명을 잘 이끌어 간다 하더라도 이것은 심성이 트여져야 된단 얘깁니다.
마음은 창살이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몸은 놔두고 지금 댁들의 집을 다녀와 보세요. 멀든지 가깝든지 말입니다. 자기 회사를 갔다 오려고 해도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채 갔다 오실 수 있어요. 어디에 뭐가 놓이고 어디에 뭐가 놓인 것까지도 다 알고 있죠? 그것과 같은 겁니다. 우리가 이 마음 통 안에서, 즉 육통 안에서 벗어난다면 누진에서 자유권을 얻어서 마음대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육통에서 벗어나야 바로 이 속에 있는 천차만별의 의식들을 보살로, 천백억화신으로 화하게 해서 응신으로서 나투게 한다.” 하셨습니다. 그럼 지금 시쳇말로 한다면 ‘분자로 화해서 입자로 모두가 나툰다.’ 이 소리와 똑같은 얘깁니다. 그래서 입자로 나투어서 그 입자가 또 원자가 되고 이렇게 하듯이 말입니다.
길게는 얘기 못하겠어서 짧게나마 그냥 건둥건둥 해 나가는 겁니다.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몸속에서 움죽거리는 것과 우주의 섭류와 인간살이의 섭류가 다, 천지인이 움죽거리는 것도 모두가 일치합니다. 불법승이라고 하는 그 자리도 바로, 내가 생각이 없을 때는 부처요 생각을 냈을 때는 법신이요 움죽거렸을 때는 화신, 보현신이란 얘깁니다. 부처님의 마음 하나가 그렇게 광대해요. 부처님의 마음 하나가 깨달은 마음 하나라면 바로 부처님의 마음으로서 이름이 지어진 아촉이 있고 아미타가 있고 미륵이 있고, 또는 칠성부처가 있고 지장이 있고 관세음보살이 있고 용신이 있고 지신이 있고, 매사에 아니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걸 이름 해서 보살이라고 했지마는, 과학자들이 말하는 그대로 지금 현실에서 하나하나 실현되고 있습니다.
우리 자체를 모르고서야 어떻게 남을 알며 남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이끌어 갈 수 있겠습니까? 이 마음 하나가 그렇게 귀중합니다. 마음 하나를 이렇게 생각하느냐 저렇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자기 위치가 주어집니다. 자기 위치가 주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위치도 주어지는 거죠. 예를 들어서 내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의 주인공은 다 똑같습니다. 근본, 생명의 근본, 이거는 다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불을 켜면 거기도 불이 들어오게 돼 있거든요, 가설만 됐다면. 그래 자식과 부모, 형제가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또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니까 그것이 가설입니다, 무의 가설. 이 모두가 그렇게 연결이 돼서 우리가 이 지구라는 도량도 지킬 수 있는 겁니다. 도량이라 하면 우주 법계, 과거 현재 미래, 삼라만상을 다 한꺼번에 한도량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시급하다는 게 뭔가? 우리의 마음을, 정신계를 모르기 때문에, 지구라는 우리의 집, 공기주머니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들이 차원이 높아지지 못해서 지구에서 에너지가 부족하다 해도 그 에너지를 끌어 쓸 수 있는 그런 능력이 못된단 얘깁니다. 이 허공에도 모든 생명들이 꽉 차 있기 때문에 그 에너지를 끌어 쓸 수 있다는 사실은 부처님께서 여러분한테 벌써 미리 말씀해 놓으신 겁니다. 여러분이 아신다면 그대로 이 자리에서…, 삼천 년 전도 그대로 이 자립니다. 후도 없고 전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뿐만이 아니라 우리 한 가정을 지켜 나가고 우리 사회를 지켜 나가는 데도 이 마음이 둘이 아니라는 도리를 확고부동하게 알고 내 마음이 벗어나야 되는 겁니다. 벗어나는 마음이라야 체가 없는 데는 체가 없는 대로 용무를 하고, 용무라는 거는 보이지 않는 데서 작용하는 거를 용무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 작용도 할 수 있고 보이는 데서 작용도 할 수 있고 이래야만이 이게 평등하게 해 나갈 수 있는,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그릇이 된단 얘깁니다. 우리가 지금 국내에서 볼 때에, 전 세계로 봐도 그렇지마는 더더욱 한 가정과 같은 우리 국가에서 우리 국민들이, 그 중에서도 자녀들이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들 해 보셨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독교나 가톨릭교 불교, 모두가 타의에서 구하고 있습니다. 나도 전자에 천주교에 입교를 해서 좀 다녀 봤습니다마는, 자기가 잘못해 놓고서는 고해성사를 한다는 게 천부당만부당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건 어떨까 저런 건 어떨까 하고 발걸음을 걷다 보니까 이렇게까지 됐습니다마는 말입니다. 내가 만약에 타의에서 구한다면 내 어머니 못났다고 잘난 딴 어머니 찾는 거와 똑같습니다. 못났든지 잘났든지 자기가 자기 몸을 움죽거리게 하고 가게 하고 오게 하고 보게 하고 듣게 하고 만나게 하고 이러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억겁 동안 진화를 시켜서 형성시켰고요. 지금도 형성시켜서 이끌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자기, 참자기를 못마땅해하고 자기 심봉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아서 자기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한다면 그거는 손해도 아주 이루 말할 수 없는 손해죠.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이 오든지 불교인이 오든지 다 똑같이 대답해 줍니다. 내가 대답하는 거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내가 했다고 하는 거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다 더불어 같이 한 거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기 주님은 자기 주처에 있는 것이지 딴 데, 타의에 있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제 나무는 제 뿌리를 믿어야 제 나무에 모든 에너지를 흡수해서 올려보내고 또 태양력이나 공기력을 흡수해서 내려보내고 하는 것이지, 그래서 이익이 있고 공덕이 있는 거지 어떻게 이 뿌리가 저 뿌리를 믿습니까? 이 뿌리가 저 뿌리를 믿어서 에너지가 온다면 어유, 오죽이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렇진 못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선지식들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나무가 네 뿌리를 믿어서 푸르게 꽃이 피고 열매를 맺걸랑 제 나무에서 익혀라. 제 나무에서 익는다면 그 무르익은 과실의 맛은 일체 만물만생이 다 먹고도 되남느니라.” 과실 하나 가지고도 말입니다. 그거를 한번 가만히 생각을 해 보세요. 종자 하나를 심어서 그 종자가 한 나무에 얼마나 많이 열립니까. 열리면 다들 먹이고도 그 종자는 되남죠? 끝간 데 없이 먹이고도 되남죠?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