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무엇을 얻고 가야 할는지요?
문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한 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올 것도 갈 것도, 나마저도 없다고 하셨지만 없고 없는 그 가운데에서 정말 저희들이 무엇을 얻고 가야 할는지요? 새로운 한 해 동안 공부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덕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답
새해를 맞이해서 올해는 한층 더 분발해서 자유스럽게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냉정하게 따지고 본다면 어제도 없고 현실도 없고 미래도 없는 생활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왜 어제도 없고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항상 말씀해 드렸죠. 고정됨이 없고 찰나찰나 화(化)해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는 거를요. 발자국을 떼어 놓을 때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지고 하는 도리와 같이 우리 생활이 전체가 다 그렇다는 얘기죠. 고정되게 저기만 바라보고 있으면 미쳤다고 할 겁니다. 일체가 다 그러니까요. 모두가 다! 이거 보면 저거 봐야 하고, 이거 들으면 저거 들어야 하고, 이거 만나면 저거 만나야 하고, 이 길을 걸었으면 저 길을 걸어야 하고, 갔다 하면 와야 하고…. 그냥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 말씀을 여러분한테 많이 해 드렸죠. 고정됨이 없어서 그냥 그렇다고요. 그래서 삼세(三世)가 공했다고요. 삼세가 공한 반면에 자기조차도 공했다고요. 고정됨이 없다고 한 자체가 바로 나도 공하고 전체가 공했다는 얘기죠. 그래서 어저께도 없고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다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또 ‘같이 포용된 나는 내세울 것도 없고, 했다고 할 것도 없고, 한다고 할 것도 없다.’ 이렇게 나오죠. 고정된 게 없고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거를 생략해서 그전에도 말씀해 드렸죠. 내 몸뚱이 속에 생명들이 많이 들어 있는데 내가 목이 말라서 물 한 컵을 마셨다고 한다면 내가 마신 거겠습니까, 누가 마신 거겠습니까? 개별적으로 누가 마셨다고 할 수가 없죠. 그렇죠? 포괄적이죠. 공식(共食)이죠. 그러니까 어떤 거를 내세워서 내가 했다, 내가 먹었다 할 수가 없다는 얘기죠. 이런 거를 자세히 이해가 가게 얘길 해 드려야 놓고 맡기고 뛰어넘죠.
이 모습을 가지고는 뛰어넘을 수가 없죠. 그래서 지난번에도 얘기했죠. 컴퓨터를 잘하는 부부가 있었는데, 컴퓨터를 하다 하다 끝까지 들어가 봐도 자기 남편과 자기가 둘 아니게 될 수가 없더라는 거죠. 자기 모습이 없어져야만 둘이 아니게 하나로 될 수가 있더라는 얘기죠. 그 사람네들은 컴퓨터만 가지고 그랬지 부처님 법을 모르기 때문에, 부처님이 나오시기 이전에도 이 진리는 있었지만, 이 진리를 모르는 까닭에 자기 몸을 다 그냥 태워 버렸거든요. 태워서 모습을 없애고서야 하나가 됐어요.
그러나 살아 있으면서도 공한 도리를 알면 내세울 것도 없고, 또 공한 도리를 알면 지금 불가에서 말하는 소리로 하자면 ‘죽었다’ 이거죠. 죽은 거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공했다, 공했으니까 내가 살았다고 세울 것도 없고, 했다고 할 것도 없고, 내가 죽어서 갈 곳이 있다고 할 것도 없고, 온다고 할 것도 없고 그렇단 얘깁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그 공한 도리를 알았다면 죽지 않고도 하나가 되는 도리를 알았을 텐데 말이에요.
그런데 부처님의 마음은 일체 만물만생을 다 일대사의 인연으로 맺으셨어요. 그건 왜냐. 어떤 모습이라도 내 모습 아닌 게 없고 어떠한 생명이라도 내 생명 아닌 게 없고, 내 마음 아닌 게 없고, 내 부모 아닌 게 없고, 내 자식 아닌 게 없고 모두가 미생물에서부터 전체가 그렇거든요. 우리가 꽃나무를 ‘야! 넌 참 이쁘게 피었다.’ 이러고 볼 때는 둘이 아닌 거예요. 모습은 다를지언정 꽃나무와 내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찰나찰나, 꽃나무도 응해 주고 나도 응하고, 그래서 꽃은 시들다가도 좀 활기가 나서 ‘아이, 네가 그렇게 해 주니까 참 고마워.’ 하고 잎이 더 싱싱하게 된다 이런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이 둘이 아니게끔 돼 가지고 그냥 고정되게 있다면 그것도 안 되죠. 그러나 찰나찰나 둘이 아니게끔 되기 때문에 이거는 부처님께서 전체 다 먹어치운 거죠. 자기와 둘이 아니게 말이에요.
우리가 한 철 살면서 이렇게 그냥 수레바퀴 돌듯 하는 이 주머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내일이 있는 자유를 못 얻어요. 내일이 있는 자유! 여여한 자유! 세세생생의 자유! 그래서 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돌부처든 여자든 남자든 애든 어른이든 간에 그걸 탓 안 해요. 너는 여자가 돼서 성불 못한다, 너는 애가 돼서 성불 못한다, 너는 늙어서 성불 못한다, 너는 악해서 성불 못한다, 너는 선해서 성불한다 이런 게 없단 말이에요. 악이 돌아가면 선이 붙어 돌아가고 선이 돌아가면 악이 붙어 돌아가니까.
탤런트가 역을 맡아 가지고 나왔다가 역을 다하면 그냥 끝나듯이, 인간도 한 철 살다가 끝나면 그뿐이죠. 그런데 요 지구라는 이 주머니에서만 생명이 산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 주머니에서는 바깥을 영 내다보지 못하니까 우리는 좀 툭 틔어 가지고 바깥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하죠. 또 보는 것만이 도는 아니다 이랬어요. 내다보면 뭘 하느냐 이거죠. 이 물그릇을 보기만 하면 뭘 하느냐. 물그릇을 옮겨 놓아야 할 때는 옮겨 놓을 수 있어야지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죠. 실천이 없다면 이건 도가 아니다, 전부 아니다 이겁니다. 오신통(五神通)이라는 것도 여러분의 몸통이에요. 타심통(他心通)이니 천이통(天耳通)이니 숙명통(宿命通)이니 신족통(神足通)이니 이런 것도 전부 육체의 통 속이라고요. 마음이 통 속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는데 어떻게 지구 바깥을 나갈 수 있고 우주 바깥을 나갈 수 있느냐는 얘깁니다. 우주를 자유자재로 돌 수가 있겠느냐는 얘기예요. 그리고 어떻게 일체 만물만생, 생명체, 하늘과 땅, 또는 이 중세계를 다 포함해서 일대사로서 이렇게 흡수할 수 있겠느냐는 얘깁니다. 만나면 나 아님이 없이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죠.
그런 수준으로 어느 정도 가야만이…. 요새 컴퓨터 바이러슨가, 그것이 컴퓨터에 입력해 놓은 것을 다 없앤다고 그러죠. 그것도 걱정할 게 없는 겁니다. 그거는 이쪽에서 막아도 되고, 그쪽 사람을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는 거니까 걱정이 없는 거고,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연구할 수도 있는 거죠. 그런 거를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요, 참 세밀하게 생각돼요. 만약에 남의 회사 거를 훔쳐 온다거나 남의 나라를 집어먹기 위해서 자료를 훔쳐 간다고 한다면 어떡하냔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훔쳐 가지 못하게도 할 수 있고, 남을 망하게 하는 거는 할 수 없게 하고, 망하지 않게 하는 거는 그냥 두고…. 이렇게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죠. 바로 부처님의 그 말씀이 말씀으로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이렇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게 현실적으로 적용이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새해에는 더욱더 분발해서 국가적으로도 좀 더 발전이 되어야겠지만 우선 우리 신도님들이 앞으로 자녀들을 키우고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것도 그렇고 또 병고 액난에 휘달리는 것도 그렇고, 세균성이나 영계성 또는 유전성 업보성 인과성, 이런 것을 다 여러분이 처리하고 넘어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된다고 봅니다.
놓으려 해도 놓아지지가 않아요
문
스님께서는 내 앞에 닥치는 모든 것을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제 안의 너무나 괴롭고 막막한 마음을 놓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놓아지지가 않습니다. 그럴 때면 차라리 그 잡념을 놓기 위해서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계속해서 절을 합니다. 그러면 잠시 잊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스님, 어떻게 해야 제 안에서 물밀듯이 흘러나오는 업식들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답
물론 놔 버리는 것도 참, 단계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차원이 다 다르고 생김생김도 다르고 또 생활해 나가시는 방법도 다른 것입니다. 그 법은 똑같지만 생활 자체를 해 나가시는 것은 다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해 나가시는 분이 있고 저렇게 해 나가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걸 잡숫고 싶어하는 분이 있고 저걸 잡숫고 싶어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하는 데에 매달리지 마시고 아주 지극하게 일임해서 놓을 줄 아셔야 합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이, 이런 것이 우리 마음의 참선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괴로움이 생긴다고 해서 ‘이거 망상이니까 끊어 버리겠다.’ 이런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망상이 생기고 어떠한 생각이 나는 것은 유생 무생이 다 쉬는 사이 없이 자꾸 돌아가기 때문에, 자기 머리에서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이 다 잠재해서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발단이 돼서 자꾸 이렇게 생각이 나는 겁니다. 내가 먹어 본 것은 언젠가 또 먹고 싶어서 생각이 나듯이, 본 것도 언젠가 또 생각나듯이…. 그러니까 항상 생각나는 그것은 잠재의식의 작용입니다. 바로 우리 의식세계의 계발된 어떠한 유동성이라고 할까요?
그러니 그렇게 생각나걸랑 그것이 나온 거기다가 바로 놔 버리세요. 자기가 색(色)이자 공(空)이고 공이자 색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이 둘이 아니다라는 얘깁니다. 바로 자기 실상이라고 볼 수 있겠죠. 자기 실상이 공이니까 공에다 모든 것을 놔 버리세요, 믿고. 진실하게 믿고. 믿지 않으면 놔 버릴 수가 없어요.
믿어야 열쇠를 맡기죠? 믿지 않으면 열쇠를 맡길 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내가 ‘참나’인 주인공을 진실로 믿는다면 몸이 아프고 괴로워도 거기를 믿고 맡길 수가 있죠. 주인공이라는 그것 자체도 이름이고 실(實)은 아닙니다만. 그래서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라 실상 그 자체를 믿는다는 것인데 바로 거기다가 놓아 버린다면, 믿고 놓아 버린다면 해결이 될 수가 있죠.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차가 있고 기름이 있어도 차는 운전수가 끌고 다닌다 이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차와 운전수와 기름이 삼합(三合)이 되어서 돌아가듯이 그렇게 공존하니까 색이 공이자 공이 색이다 하는 거고 그렇게 공존하는 것을 공이라고 할 때 거기다가 몰락 놔 버리면 그대로 공존돼서 바로 일체 유생 무생이 한데 합친 그 능력의 의사가 되니 나는 손을 까딱 안 하고 해결을 할 수도 있는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여러분, 가난도 자기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당하는 거지 누가 가난을 주고 뺏어 가는 게 아닙니다. 옛날 말에 어느 부자가 복을 지은 거라고는 동네에서 누가 어린애 낳는 데 고작 짚 한 단 준 거밖에 없었답니다. 그랬는데 부자가 죽어서 가 보니까 부자 복(福) 창고에 짚 한 단밖에 없더란 셈으로 그런 마음을 썼으니 짚 한 단만 있을 수밖에요. 자기가 준 대로, 한 대로밖엔 안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생활을 해 보시겠지만 수많은 사람한테 속기도 하고 사기도 당하고, 또 안 당한 사람도 있고 사기를 친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주인공에 놓는, 방하착 할 수 있는 진실한 마음을 갖는 그런 분들은 나중에는 참자기의 감응이 와서 그걸 그렇게 하라 그래도 안 그럴 겁니다. 또는 안 그런다 하는 마음조차도 없고, 한다 하는 마음조차도 없이 슬그머니, 보이지 않는 데서 다, 오온에 칠보(七寶)가 가득히 차 있듯이 그 모든 것이 다 저절로, 가난도 면할 것이고 병도 물러날 것이고, 자기의 뿌리로서 모든 것이 해결될 겁니다.
문
외롭게 혼자인 것만 같아요!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이 마음의 도리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스님처럼 훌륭한 분을 만났는데도 공부가 부족해서인지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외롭고 이 세상에 나만 혼자인 것 같고 외톨이가 된 것 같습니다. 욕심이겠지만 영원토록 스님께서 저희들 곁에 머물러주셨으면 좋겠어요.
답
우리는 지구라는 주머니 속에서 항상 같이 한자리를 하기에 떠났다가도 다시 와서 만나곤 합니다. 이렇게 찰나찰나 만나는 진리를 참구하기 위해서 같은 자리에서 우리가 또 다시 만났으니 얼마나 반갑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보이는 모습으로만 만나는 게 아니라 항상 같이 한답니다. 우리는 혼자는 못 살아요. 물질계에서도 혼자는 못 살지만 정신계에서도 혼자는 못 살아요. 그 도리가 다 그러하죠.
우리는 때로 ‘무슨 죄가 많아서 이 세상에 나와 이렇게 고통스럽게 사나.’ 하고 생각하시죠? 그러나 그게 아니에요. 여러분뿐만 아니라 축생이나 아귀나 모든 미생물까지도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미 그렇게 살게 돼 있어요. 그런 걸 왜 한탄을 해요? 그러나 거기에서 좀 지혜가 있고 능가할 수 있는 폭이 넓으면 좀 낫게 지내고, 폭이 좁고 그릇이 작으면 아주 피곤하게 살고 이것뿐이지, 그렇게 돼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벗어나라 하는 거 아닙니까. 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만약에 식구들이 다 부황이 나서 굶어 죽게 되었는데 자식이 하나 나가서 ‘내가 죄를 걸머지더라도 할 수 없다.’ 그러곤 그냥 훔쳐 왔어요. 훔쳐 왔는데 그게 이 보이는 데서는 큰 죄라고 데려가서 가두겠죠. 그러나 부처님 법에서는 ‘야, 참 그래도 지혜가 있어서 그거라도 훔쳐서 먹여 살렸으니 너 참 장하다.’ 외려 이래 준다고요. 꽉 막혀서 도대체 오글락노글락이 없어서는 안 되거든요. 도둑질을 정말로 하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런 넓은 마음이 있다면 스스로 그런 거를 갖다가 그래도 생명은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소립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 마음이 좁으냐 넓으냐에 따라서…. 마음은 마음대로 쓰라고 마음입니다. 네 마음대로 써라. 그런데 그 마음을 가지고 주체를 못하고, 악하게도 쓰고 선하게도 쓰고 뒤죽박죽이 되죠. 그런데 뒤죽박죽하지 말고 원칙대로 살아라. 진짜 착을 두지 말고 욕심 부리지 말고 내 그릇을 내가 파악하고 건너뛰어라 이거거든요. 물을 건너뛸 때에도 내 다리가 그만큼 되느냐 안 되느냐 그거를 봐서 건너뛰어야지, 개천은 넓은데 내 다리는 거기 반도 안 가면서 건너뛰다간 물에 빠져 죽죠. 그렇게 번연히 알면서도 건너뛰다가 빠져서 허덕거리는 거를 어떡합니까? 부처님인들 어떡합니까, 그거?
그러니까 우리가 살다 살다 보면 내가 이 세상에 생긴 게 참 고맙고요. 아무리 잘생겼든 못생겼든, 또 잘살든 못살든 ‘내가 이 세상에 났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공부라도 하게끔 인연이 된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해 보세요, 얼마나 고마운가. 우리가 수없이 돌아가면서 별의별 일이 다 생기고 그렇습니다. 돈 걱정도 없고 옷 걱정도 없고 먹는 거 걱정도 없고, 돈 쓸 때는 그냥 척척 줘서 다 쓰고 이렇게 해서 기른 아이가 나가서 잘 이끌고 살 수 있을까요? 고생도 해 보고 배도 고파 보고 망치질도 해 보고, 그 아픔을 겪어 본 사람이라야 그 부하를 다 이끌고 살 수 있는 거죠. 배고파 보지 않은 사람은 남이 배고픈 걸 몰라요. 그것까지 생각 못하죠.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겁낼 거 하나도 없어요. 이 세상에 살다가 언젠가는 한 번 죽을 거, 죽는다는 거는 누구나가 다 똑같이 아시죠. 언젠가 우리 스님네들이 날더러 “스님, 오래 사세요!” 그러기에 그랬어요. “사는 날까진 틀림없이 살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하고요. 아, 그러지 뭐라고 말을 해요, 그걸? ‘너희들이 오래 살라고 하니까 오래 살 거다.’ 이럴 수가 있어요, 아니면 ‘빨리 죽는다.’ 그럴 수가 있어요? 이거는 말 못할 일이 너무나 많아요. 하여튼 죽든지 살든지 걱정하지 마세요.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생사도 벗어납니다. 그냥 열심히들 우리 해 봅시다. 아셨지요?
문
선법가를 불러야 하는 이유?
스님, 안녕하세요! 저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선원에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랍니다. 그런데 얼마 전 불교 텔레비전에서 선원 어린이회를 취재하러 왔답니다. 그래서 법당에서 불교 교리 맞추기도 하고 단체 줄넘기도 하고 법회 하는 모습도 찍고 선법가 합창도 했답니다. 그런데 스님, 질문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제가 가족들과 함께 집 근처 절에 다닐 때도 어린이 합창단에 가입해서 찬불가를 많이 불렀는데요, 선원에서 또다시 선법가를 불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답
이 마음의 도리를 진실하게 알아야 해요. 합창단이면 그냥 합창단이 아니거든. 그 마음을 같이 들어서, 주인공과 같이 들어서, 같이 돌아가는 걸 주인공이라고 하거든. 배가 없는 것이 주인공이요, 배가 없는 것이 한마음이요, 배가 없는 것이 부처라 이거야.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의 도리로 해서 참 진실하게 그 노래를 한마디 부를 때 우주 법계가 쩡 하고 그냥 두루 같이 그 음파가 돌아갈 수 있다 이 소리지. 그러니 우리는 이 몸뚱이 가지고 한 철 사는 거, 이 몸뚱이 있을 때에 전력을 다해서 이 도리를 배워라 이거지. 이 몸뚱이 떨어진다면 지금 물질적으로 살던 그 의식이 남아서 몸뚱이 떨어져도 그 의식이 그냥 어디로 들어갈지 몰라, 보질 못하고 듣지 못하니까. 그 의식만 남았어. 그래서 사람인지 뭔지도 모르고 아무 데나 들어가서 그 모습을 가지고 나올 때 다시 사람 되기가 극히 어렵다 이런 말이야.
그러니까 여러분이 전력을 다해서 하되 어린이들도 젊은 학생들도, 이 합창단에 들어서 활동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나는 어린이 노래 가사를 우리 스님네들이 지어야 되지 않나 이렇게 생각을 해요. 곡은 다른 선생님들이 하더라도 이렇게 스님네들이 가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은 그 가사가 법이 돼서 한데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스님네들이 지어야 되겠다는 얘기지요. 예를 들면 그냥 꽃이 피었네, 꽃이 피었네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되고,
꽃이 피었네.
꽃이 피었네.
내 마음에 꽃이 피었네.
두루두루 꽃이 피었네.
붉게 익는다면,
삼라만상 우주 법계
그리고 우리 생활면에 모두 선도자가 돼서
우리는 뿌리를 이어 가고 중용을 이어 가면서
앞으로 세세생생에 거룩한 길을 걸으리.
이러한 노래도 짓고 말이야. 그냥 모두 그렇게 해서 어린이가 불렀다 할지라도 이것은 진짜로 세계의 모든 마음을 조절해 돌아갈 수 있는 그런 법계의 아주 진짜 법이 되는 거지, 한마음으로 돼 주기 때문에. 그러니 열심히들 해 봐요.
그리고 내 마음의 나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다 이거예요. 내가 없다면 부처님 법도, 가톨릭교 법도, 기독교 법도 다 없는 거야. 그런데 요새는 보면 꼭 타의에 끄달려서들 찾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해! 기복으로 가서는 절대 나를 발견할 수가 없고 나를 이끌어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 나한테 재료를 다 두고도 먹고 싶은 대로 해 먹을 수 없다면 그거는 사람, 즉 말하자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없지. 그렇지?
인간으로 온 길에 그냥 갈 수는 없잖아? 그러니 열심히 한번 해 보도록 해. 주인공을 믿고 모든 거 내 공부하는 거, 노래하는 거, 모든 내 행동 하나하나 하는 거, 효도하는 거, 충성하는 거, 모든 것은 내 주인공에 있다! 내 주인공을 믿고 내 주인공에다가 맡겨 놓고, 급한 일이라도 내 주인공에다 탁 맡겨 놓고 ‘당신밖에 할 수 없어.’ 하고선 뛰어라 이거야. 그러면 그것은 그대로 돌아가.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거야.
여러분은 가만히 보면요, 자기를 자기가 못 믿어요, 상표는 믿어도. 종교의 이름이 상표예요. 상표는 믿어도, 또 형상은 믿어도 그런 거는 못 믿겠어요? 위대하다는 걸 보면 굽신굽신 절을 하고, 거지를 보면 탁 튕기고 고개를 반짝 들고선 그렇게 하는 그 습관도 좀 놔야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내 몸 아픈 것처럼 생각하고, 내가 전자에 수억겁 광년을 미생물에서부터 거쳐 오면서 쫓고 쫓기면서 얼마나 울었고 얼마나 아팠던가? 그리고 그 진화를 시키느라고 내가 나를 얼마나 아프게 했던가? 그러니 그때의 내 모습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여유 있는 마음을 가져야 우리는 성숙하게 익을 수 있다 이거예요.
그럼 그런 줄 알고 열심히들 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