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옹, 눈앞의 금덩이를 어찌 하겠습니까
경봉, 이 방석이 금덩이와 같은가, 다른가?
서옹(西翁, 1912~2003) 스님의 제자인 영흥 스님(진천 불뢰굴)이 통도사 극락암 경봉(鏡峰, 1892~1982) 조실스님을 뵙고 큰절 세 번 올리고 여쭈었다.
“눈앞에 금덩어리가 있는데, 큰스님께서는 어찌 하겠습니까?”
순간 경봉 스님이 깔고 앉았던 방석을 눈앞에 내밀며,
“이 방석이 금덩어리와 같은가? 다른가?”
하고 되물었다.
“같고 다르고 간에 눈앞의 금덩어리를 정녕 어찌하겠습니까?”
“그대는 정녕 어찌하겠는고?”
영흥 스님이 얼른 방석을 잡아 높이 들어 보이고 깔고 앉았다.
그러자 경봉 스님 특유의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역시, 사자새끼로구나!”
“해와 달을 띄워 온 시방(十方)을 행복케 하고 꽃과 열매를 뿌려 온 시방을 태평케 합니다.”
영흥 스님이 큰절 세 번 올리고 물러나왔다.
승조 법사는 “부딪치는 매사가 모두 진실한 것이다(觸事而眞)”라고 하였고, 마조 선사는 “서 있는 곳이 곧 진리이다(入處卽眞)”라고 하였다. 또한 석두 선사는 “눈에 보이는 대로 도를 만난다(觸目會道)”고 하였으며, 도오 선사는 “눈에 나타나 보이는 것 그대로가 모두 깨달음이다(觸目菩提)”라고 하였다.
이처럼 꿈에서 깨어난 조사들은 한결 같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진실이자 부처요 깨달음이자 마음이라 설했다. 하지만, 이를 투철하게 믿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직도 선법문을 건성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영흥 스님은 ‘눈앞의 금덩어리’를 화제로 거량을 시작하고 있다. 이 ‘눈앞의 금덩어리’란 말은 ‘눈앞의 부처이자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화두로 제시되었다. 이 눈앞의 금덩어리에는 TV도 해당될 수 있고, 컴퓨터도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눈앞의 진실을 깨달아 많은 선객들을 제접해 온 경봉 스님은 노련하게 눈앞에 있는 방석을 들고서, 이것이 금덩어리와 같은가를 되묻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금덩어리와 방석, TV와 컴퓨터는 분명히 사물로서는 같은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일체를 마음으로 보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의 도리에서는 다른 물건이 아니다. 뜰 앞의 잣나무도 부처요, 금덩어리도 부처요, 방석도 부처다.
그러나 금덩어리와 방석이 같다고만 해도 미친놈이고, 다르다고 해도 선리(禪理)에 눈을 뜨지 못한 멍청이가 되고 만다. 같다고 해도 틀리고, 다르다고 해도 틀린다(不一不二). 그래서 영흥 스님은 “같고 다르고 간에 눈앞의 금덩어리를 정녕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며, 예봉을 비켜가는 동시에 재차 반격을 가한다.
이번에는 경봉 스님이 “그대는 정녕 어찌 하겠는고?” 하고 묻자, 영흥 스님은 방석을 든 다음 깔고 앉는 행위로 답을 대신한다.
방석은 그냥 깔고 앉는 물건이지, ‘깔고 앉아야 하는 것’이라고 자세한 설명을 붙일 필요가 없다. 법당에 금부처가 있으면 먼저 절을 하고, 주인이 방석을 내오면 깔고 앉고, 차(茶)를 내오면 마시면 된다.
눈앞의 진실이 어쩌고, 마음이 어쩌고 하는 것은 모두 이해를 돕기 위한 어설픈 주석에 불과한 말이다. 금가루가 아무리 귀해도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될 뿐이다.
김성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