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일상에서 부처를 느끼다
196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박제천의 열두 번째 시집 제목은 <아,>이다. ‘아’는 무(無)의 산스크리트어 발음이다. ‘아’는 시인이 찾아낸 무자화두인 것이다. 시인은 시집 3부에 편집한 18편의 시에 ‘심우도’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다. 심우도는 불교에서 마음을 수양하는 방편으로 삼는 구도자와 소에 대한 짧은 비유로 된 이야기이다.
이를테면 ‘대추공양-심우도’에서 화자는 “온몸에 불광을 흠뻑 낸 대추알들”에게 군침을 흘리다가 발밑을 내려다본다. 화자는 다른 풀이나 생물들도 대추알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고 그 자리를 뜬다. ‘은하-심우도’에서는 나무를 만나 껴안으며 “내 몸 또한 저 나무의 뿌리와 수액, 나이테에 다름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달마 그림-심우도’에서는 화자가 달마 그림을 수묵으로 그리며 봄밤을 꼬박 새우며 “명사산 모래울음 소리”를 듣는다.
시인은 ‘관음찬-심우도’ 시화를 통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부하러 불영사를 찾아갔던 일화를 들려준다. 불영사에서 일박을 한 시인은 아침 불영 계곡에 나가 평생 “관음의 불도장”을 받게 된다. 그때의 희열을 “잠시, 아주 잠시/ 가슴 속에 회오리치던 눈보라가 개이고/ 청솔의 무수한 손가락들이 천개의 손가락으로 보이고/ 그 끝마다 보이는 햇빛의 눈이/ 서늘한 가슴의 바닥까지 비쳐왔다”며 천수관음을 보았다고 한다. ‘선묘-심우도’는 부석사 선묘각에서 창작 소재를 가져온 것이다. 다음 시에서는 곳곳의 자연과 생활에서 부처와 보살을 느끼고 보는 시인의 불교관이 구체화된다.
코가 깨진 미륵보살,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문둥이보살, 얼굴마저 지워진 크고 작은 돌부처, 나 몰라라 잠을 자는 기왓장보살이 모두 모이는 곳
부뚜막귀신, 대들보귀신, 보리뿌리귀신, 동서남북 오방신, 여기서는 모두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되는 곳
햇빛 좋은 입춘날, 눈이 부신 햇빛 거울로, 제 마음 속, 무덤 속 어둠을 불살라, 보살도 부처도 잿더미가 되고 마는 날
돌쩌귀 열고 나오는, 얼음장을 깨고 나오는, 겨우내 내린 눈을 가슴으로 껴안아 녹인 물로 가득가득 속을 채운 냉이며 달래, 움파며 승검초, 죽순이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되네.
-‘입춘날, 운주산 빈 터에 배를 띄우고 싶다’ 전문
이 시는 창작자가 직접 서술한 시화를 통해 입춘날 오래전에 다녀온 운주사를 기억하면서 쓴 시이다. 화자는 만물이 다 부처라고 한다. 돌로 만든 무생의 사물이든, 귀신 등 관념 덩어리든, 식물이든 가리지 않고 곳곳이 물물이 부처고 보살이라는 시인의 불교관을 화자를 통해 투영하고 있다.
시 ‘벌레의 집’에서 화자는 “벌레가 내 요즘 화두다”라고 한다. 화자는 자신이 살아서 남의 살을 많이 먹었으므로 죽어서는 흙속에 묻혀서 벌레들에게 되돌려주기로 하였으나 매장이 아닌 화장을 하려고 하니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목욕할 날만 기다려야 하는데/ 나를 기다릴 벌레들 생각만 하면/ 온몸이 따끔따끔하다/ 길가다 벌레와 마주치면 얼굴도 화끈 달아오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