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11월 20일 새벽,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은 경봉 스님은 용성, 한암 스님은 물론 만공 스님에게도 오도송과 보임(保任)의 길을 묻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만공 스님은 아무리 기다려도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어느 날 경봉 스님은 서울 선학원으로 만공 스님을 찾아가 따져 물었다. 그러자 만공 스님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막중한 일을 어찌 서신으로 전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경봉 수좌가 깨달은 경지를 잘 각찰(覺察 깨달아 살핌)하시오.”
이에 경봉 스님은 만공의 팔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팔목의 급소를 아프게 눌렀다. 만공 스님은 “아야!” 하고 소리를 냈지만, 잠시 후 미소를 지었다.
1912년 해담(海曇) 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한 경봉 스님은 해인사 퇴설당, 금강산 마하연과 석왕사 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면서 정진하였다. 그러던 중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 스님과의 법담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정진을 계속하였다. 이와 함께 화엄산림법회에서 법주(法主)겸 설주(說主)를 맡아 철야로 불사하고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물(一物)에 얽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 20일 새벽, 오도송을 읊었다.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我是訪吾物物頭)/ 눈 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目前卽見主人樓)/ 껄껄껄, 이제야 만나 의혹 없어지니(呵呵逢着無疑惑)/ 우담바라 꽃 빛이 온 누리에 흐르네(優鉢花光法界流).”
경봉 스님은 당대의 여러 고승들에게 오도송을 보여주고 점검을 겸한 깨달음 이후의 공부에 대한 가르침을 기대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대부분 답장을 받고 그 이후에도 수시로 서신을 통한 탁마(琢磨)를 이어갔다. 그런데, 유독 만공 스님만은 답장이 없었기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답장을 쓰지 않은 이유에 대해 만공 스님은 너무나 중대한 일이라 직접 만나서 대답하려 했다고 시치미를 뗀다. 여기서 ‘막중한 일’이란 일대사(一大事) 즉, 화두를 타파하여 깨달음을 얻는 일을 뜻한다. 하지만, 깨달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을 하고, ‘닦음이 없이 닦는(無修之修)’ 오후(悟後)공부에 대해 다시 첨언한다는 것이 이미 평지풍파(平地風波)와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공 스님은 ‘지금 당장 말해 달라’는 경봉 스님의 닦달에 마지못해 “깨달은 경지를 잘 각찰(覺察)하시오”라는 답을 하고 만다.
이에 경봉 스님은 만공 스님의 팔목을 누르는 지혜작용으로 자신의 견처(見處)를 다시 한 번 점검받으며, 한 마디 일러줄 것을 청한다. 하지만 만공 스님은 여전히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미소로 긍정하며 말을 아낀다. 말 밖에 따로 전해지는 깨달음에 대해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깨달음 이후의 보임공부 역시 말없는 언행일치의 실천행인 불행수행(佛行修行)만이 기다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김성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