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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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의 찰나생활이 그대로 역력하게 돌아간다! 육근으로 들어오는 그 모든 것을 놓으세요!
우리 사회가 밝고 건강해지려면…


2007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미혹한 중생으로서의 삶은 어려움도 많고 넘어서야 할 일도 무척 많습니다. 사회 경제적으로도 어렵지만 입시 문제, 취업 문제, 그리고 다음 달에 있을 대통령 선거도 잘 치러야 하고 물질로만 치달으면서 정신계는 등한시하는 젊은 사람들의 마음에 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종교마저 없어질 판입니다. 스님, 어떠한 마음으로 이러한 현실 사회의 문제점들을 관해야 우리 사회가 보다 더 밝고 건강해질까요?


우리는 일체 과거생이나 현재생이나 미래생을 포함해서 삼심(三心)을 일심(一心)으로 귀합을 시켜서 지금 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찌 현 사회의 모든 게 없겠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의해서 관해야 할 일들이 지금 급하게 닥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첫째는 우리 정치인들이 대통령과 더불어 폭넓게 그릇이 크게 만들어져야 세계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겠고, 받아들였으면 바로 세계적으로 내보내야 할 지혜로움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렇게 통하게끔, 통해서 그렇게 되게끔 이렇게 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지금 학생들의 문이 좁습니다. 그래서 왜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학교 문제 때문에, 시험 때문에 자기의 기상이 다 그냥 메말라 버리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해 나갈 수 있는, 뭐라고 그럴까요? 원력을 상실한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그거 하나 때문에 전체로 자기가 해 나갈 수 있는 어떠한 용도를 다 상실한다고 할 수밖에 없죠. 그리고 모든 거를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것대로도 못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나라에서 앞으로 전체적으로 대비 대책을 해서 학교에 들어가는 문은 넓히고 나오는 문은 좁힐 수 있도록 관하시면 어떨까요?
또 셋째, 지금 사업가들이 사업을 제대로 못하고 가는 형편이라고 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나라는 좀 더 마음이 넓지 못한 까닭인지 몰라도 모두가 제한이 돼 있습니다. 그 제한을 조금 풀어 줬으면, 외화도 어떠한 문제점만 거론해서 딱 자유롭게 할 수 있게끔 넓혀 주면 사업이 넓어지지 않을까. 또는 조그만 사업들을 하는 구성체를 그 큰 사업가들이 똘똘 뭉쳐서 돌봐 주는 마음과, 정부에서 좀 돌봐 주는 마음이 한 나라에 한마음으로써 구성이 된다면 그것도 앞으로 발전이 돼서 우리나라에 경제 혼란이나 또는 어떤 타격이라도 넘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거고요.
또 넷째, 사람들이 모두 정신계를 추구하고 가야 할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물질계에서 헤매고 온통 물질계로만 이론을 가지고 나간다면 절대로 이것은 성립을 못합니다. 왜 못하는 것이 나타나느냐? 모든 젊은이들이 늙었든지 젊었든지, 여자든 남자든 막론하고 자기를 돌볼 줄을 모릅니다. 자기를 들여다볼 줄 모릅니다. 자기가 어떻게 걷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자기 모습이 화려하고 아주 특이하게 발전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발전을 할 수 없는 처지니 이 마음의 공부를 모두 할 수 있게끔 되면 좋지 않겠는가. 즉 말하자면 물질계에서 정신계로, 정신계에서 물질계로 이렇게 둘 아니게, 선과 교 어떠한 것을 막론해 놓고 둘 아니게 이 도리를, 진리로 구성된 전체의 귀합이라고 생각하고 모두 이런 공부를 하게 했으면 좋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우리 한마음선원에 다니지 않더라도 그런 거를 모두 관해서 사람들이 바깥으로 찾지 말고, 배를 저어 가면서 바깥으로 살려 달라고 하지 말고 안으로 ‘너 가만히 있거라’ 하고 다스려서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해 나가는 공부를 제대로 하게끔 하면, 도둑이나 사기나 또는 강도나 어떠한 불상사도 아마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있다면 꼭 그렇게 해서 지켜보시도록 하세요. 모두 그런 마음으로써 지켜보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게 우리 사회도 우리 국가도 잘 살 수 있는 그런 기반이 다 될 것입니다.

이직도 실천이 부족한데


스님께서는 매일 일이 끝나면 저녁에 30분씩 주인공을 관하라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 봤는데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가끔씩 술을 마십니다. 술 마시면 부처님 얼굴도 안 보여요. 그래서 그날 못하면 그 이튿날 출근할 적에 차 속에서라도 꼭 하긴 합니다. 그런데 제가 실천이 부족해서 아직도 못 깨닫는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자 나왔습니다.


술을 마신 사람은 누굽니까? 술을 마신 사람도 선생님이고 또는 그렇게 주인공을 관하는 것도 선생님입니다. 나는 주인공을 이렇게 관하라고 합니다. “주인공, 네가 있으니까 네가 있다는 증명도 네가 할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네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면 이 세상에 너도 없고 내 모습도 없을 것이다. 네가 있기 때문에 내 모습이 있으니 네가 있다는 것을 네가 증명을 해야지. 그럼으로써 부(父)와 자(子)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건 아비가 증명을 하지 자식은 증명할 수 없다 그런 말입니다.
지금 육의 부모만 부모가 아닙니다. 내 영원한 근본은 정자 난자를 빌려서 삼합이 합쳐져야 육을 형성시킵니다. 지금만 육의 부모를 두고 이 세상에 나왔을까요? 천만의 말씀이죠. 수억겁을 통해서 아마 생존 경쟁을 했을 겁니다. 잡아먹히고 잡아먹고 이렇게 실랑이를 해 가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나를 그렇게 가깝게 두고도 모르는 겁니다.
나는 그 주인의, 즉 말하자면 종입니다, 종. 종 문서를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종입니다. 주인과 종이 둘 아니게 상봉을 해야만이 우리가 진짜 공부해 나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자기 주인을 이름 해서 부(父)라고 하고 자기는 자(子)라고 합니다. 자와 부가 상봉을 해야만이 그때서부터 무의 세계로, 유의 세계로 뛰면서 공부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하시는 분들이 잘못 생각을 하고 가시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요. 왜? 화두를 마음이 준 겁니다. 화두라는 이름을 준 거는 아니거든요. 안 그렇겠습니까? 화두라는 이름을 준 게 아니라, 이름이 없으면 줬다 안 줬다 할 수가 없으니까 화두라는 이름을 준 겁니다. 어느 스님네고 마음을 주었지 화두라는 이름을 준 거는 없거든요.
그러면 받아들일 때, 자기 영원한 근본이 물 한 방울이라고 치면 그 영원한 근본을 둘 아니게 수만 개를 넣는다 하더라도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그대로 영이죠. 그러니 그대로 한마음이죠. 그렇게 해서 그 한마음 가운데에 ‘너만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잖아.’ 하고 놓는 것입니다. ‘내고 들이는 것이 바로 너니까 네가 있다는 것을 네가 증명을 할 수 있잖아.’ 하고 자꾸 놓는 것이죠.
일거수일투족을 움죽거리게 하는 것도 너, 잘되고 못되게 하는 것도 너, 잠자고 깨어나게 하는 것도 너, 일체가 다 너죠. 너라고 해도 좋고 부처라고 해도 좋고,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고 부(父)라고 해도 좋고, 자기가 친근하게 닿을 수 있는 이름으로 방편을 대도 좋지요.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보살들을 자기가 생산시켰습니다. 한마음으로서 이 몸뚱이 속에 있는 그 생명체들을 전부 보살로 화하게 해서 털구멍을 통해서 들고 나게 만들고, 낮고 높고를 떠나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가리지 말고 모두 응신이 돼 줘라 하는 뜻에서 천백억화신이 그 모든 중생들에게 응신으로 나투어 주신다고 하셨던 겁니다.
그러니깐 거기다가 관할 때 단 10분이라도 좋으니 ‘내가 일이 할 게 많고 바쁜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좀 여유가 있을 때 그냥 자연스럽게. 뭐 어느 시간을 정해 놓지도 마시고 그렇게 하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망상을 끊지 않고 그대로 참선하라.”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망상을 끊지 않고’ 하는 것은 망상에 걸리지 마시라 이런 뜻이죠. 그러니깐 그렇게 열심히들 해 보십시다.

한마음은 어떤 마음인지요?


불교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인간 문제의 해결,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 고(苦)의 해결이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초기 경전에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진리를 설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체 법의 참된 모습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고, 집착함으로써 그것이 변하거나 사라질 때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기에 물질과 정신이 모두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스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시는 한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인지요?


한마음이라는 그 뜻은 열반으로 들어가는 길이며, 자유인이 되는 길이며 해탈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사대(四大)에 대해서 말입니다, 색(色)은 사대라고 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바로 정신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정신 내용, 수상행식 그 자체가 사대하고 같이 합쳐지니까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그 몸과 마음은 어디에 또 상대가 있느냐는 얘기죠. 눈이나 귀나 코나 혀나 몸이나 의식 자체, 여섯 가지가 거기에 대두되는 거죠. 요거를 말씀해 놓고 내가 얘기할 게 있습니다. 거기서 대두되는 것이 뭐냐 하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대두가 됩니다. 그 다음에 뭐가 또 대두가 되느냐 하면, 즉 말하자면 육식(六識)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시각이나 청각이나 후각·미각·촉각, 의식 자체 여섯 가지가 대두가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말로만, 이론적으로만 나누어서 생각하지 마시고 한번 제 얘길 들어 보시렵니까. 그게 네 가지입니다. 네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네 가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렇다면 우리가 개수가 없는 개수를 한번…, 숫자 없는 숫자요. ‘하나’ 하면 ‘몸’과, ‘몸’ 그러면 ‘하나’ 이렇게 합니다. 하나라고 치면 육근(六根), ‘둘’ 이럽니다. 내용적으로는 사대(四大)의 그 물질과 사람의 마음이니깐요. ‘하나, 둘’ 하면 이 하나는 과거로 벌써 돌아갔습니다. 예? ‘하나’ 하는 게 벌써 이 몸과 마음은 벌써 과거로 돌아가서, 즉 말하자면 절대적인 요소가 되는 거죠, 이 육근의. 안 그럴까요? 그래서 ‘둘’ 할 때 육근으로 와서, 벌써 이 하나는 둘에 포함이 되니까 하나는 없어지고 이게 하나가 되는 겁니다. 예? 아시겠습니까? 둘 하는 게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겁니다. 상대성이 절대성으로 들어오니깐 말입니다. 그래서 이게 도로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육진(六塵)이라고도 하고 육경(六境)이라고도 합니다만 육진으로 다시 들면 그냥 셋이 됩니다. 그런데 둘이 또 없어집니다. 둘이라는 언어가 없어지면서 셋으로 갑니다. 셋으로 가는데 이 셋은 또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아셔야 납득이 돼서 결정적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납니다. 육식(六識), 육식으로써 이것을 다시금 혼합을 한다면 십팔계가 되면서 이것도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게 한데 합쳐서 십팔계라고 했는데 십팔계는 무엇을 가지고 그러느냐 이런 겁니다. 십(十)은 언제나 여여하게 돌아가는 그대로를 말하는 겁니다. 팔(八)은 사무사유(四無四有)를 한데 합친 것을 말하죠. 여러분이 다 마음이 있죠. 여러분이 있으니까 있는 거지요, 불성이라는 그 자체가, 불(佛)이라는 자체가. 그것은 항상 움죽거리지 않기 때문에 십팔(十八) 하면 벌써 십구(十九)가 되는 겁니다. 하나가 언제나 거기 우뚝 서는 거죠. 그래서 사무사유가, 즉 말하자면 한데 합쳐서 팔로서 팔법륜(八法輪)으로서 그냥 돌아갑니다. 그게 우리 생활입니다. 십은 진리라고 하면 우리가 응용하는 이 중용은 바로 팔이죠. 이걸 그냥 납득할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어서 그냥 내 의견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완전히 벗어난다면 바로 벗어나는 그 자체가, 하나 없는 하나가 그냥 한마음입니다, 한마음. 하나라는 것도 세울 게 없기 때문에 그냥 한마음입니다. 대략 짐작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요걸 비유하건대 만약에 몸과 마음이 솥이라면 바로 거기에는 쌀도 있고 물도 있고 불도 있습니다. 요 네 가지를 또 한 번 표현해 보죠. 그런데 쌀을 씻어서 솥에 넣습니다. 물을 붓습니다. 불을 올립니다. 그러면 요것이 밥이 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밥을 먹게 되죠? 그렇죠?
그래서 그 육식(六識)의 깊은 속에까지도 우리가 들어가서 굴러 나와야 밥을 먹을 수가 있다 이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씻어 넣고 이거니 저거니 하고 이론으로 따져도 스위치를 꽂아서 밥을 다 익히지 않는다면 우리 입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묵조선이니 간화선이니 하는 것도 그게 둘이 아니건만 불 질러서 밥을 하는 과정과 딱 먹는 거와 혼합이 돼서 하나기 때문에 이것저것 따지지 말자 이겁니다, 싸우지 말고. 과정을 다 해서 솥에 넣고 스위치 딱 누르면 밥이 되는 그런 거하고 또 갖다 씻어 넣는 과정하고 뭐가 다릅니까, 예? 그러니까 지금 밥을 해서 먹는다, 불이다, 그런다면 우리가 솥에 그냥 하나 갖다 넣으니깐 또 하나 줄어들고, 하나 갖다 넣으니까 또 하나 줄어들고 다 넣고는 불 꽂으니깐 다 먹는다. 이것을 지금 배우는 겁니다.
스위치 꽂아서 밥 해서 그냥 먹는 걸 배우는 겁니다. 그 과정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라 모든 분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거기다 그냥 넣었으면, 한 솥 넣었으면 그냥 불 꽂아서 해 먹는 거를 우리가 배우자 하는 것입니다.
우린 공부할 수 있는 시기가 있고 바쁩니다. 우리 몸뚱이가 살아 있을 때에 이 뜻을 모른다면 천년만년 가도 이 윤회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겁니다. 고(苦)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배가 고파도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런 거와 같이 우리가 하나 넣어도 하나요, 하나를 또 넣어도 하나요, 그래서 한 솥을 밥을 해 놓고 먹어도 그 하나마저도 없더라. 모두 나눠서 먹으니까 말입니다. 그 하나마저도 없더라. 그리고 또 갖다 넣은 것도 여러 가지 재료가 같이 들어갔는데 어떻게 불만이, 불만이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이 나다’ 할 수가 없이 그것이 바로 한마음이요, 그 한마음마저도 집착을 하지 마라. 이거 될 때에 너라고 할 수도 없고, 쌀이 될 때 너라고 할 수도 없고, 불이 될 때 너라고 할 수도 없고, 솥이 될 때 너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한마음의 찰나 생활이 그대로 역력히 돌아가고 있으니 여러분이 그대로 자유스럽게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기르시라 이런 겁니다.

주장자를 뺏는 도리란?


임제 스님께서 ‘네가 주장자가 없다면 내가 뺏을 것이로되 네 주장자가 있다면 내 주장자를 너에게 줄 것이니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요?


지금 내 몸뚱이 속에 수많은 중생들이 들어 있는데 이 중생들이 누구냐 하면 자기입니다. 그렇게 숫자가 많다고 그래서 숫자가 많은 게 아니라, 숫자가 많으면서도 의식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숫자 없는 숫자죠. 그래서 그 하나마저도 없다고 하는 그 도리를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겁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 도리를 모른다면 내 중심이 없는 것이고 내 주인을 모른다면 이 껍데기가 빈 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전에 임제(臨濟) 스님이나 큰스님들이 ‘네 주장자가 있다면 내가 네게 주장자를 줄 것이로되, 네 주장자가 없다면 네 주장자를 뺏을 것이니라.’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 자기가 뺏는다는 문제를 덧붙인 게 아니라 방편으로 그거를 가르치느라고 했습니다. 왜? 모든 생명들이, 즉 말하자면 거기에 주인이 없다면 모두 세균성이나 영계성, 유전성, 업보성이 무조건 하고 거기 들어가서 그냥 막 뒤집어 놓습니다. 웃게끔 만들어 주기도 하고 울게끔 만들어 주기도 하고, 성나게 하기도 하고 모든 일을 그르치게 만들기도 하고, 아프게 만들기도 하고…. 여러 가지 과거에서부터 자기가 지은 대로 나온 거니까 어쩔 수가 없는 거죠.
숙명통(宿命通)이라는 게 바로 모든 것이 입력된 컴퓨터거든요. 컴퓨터에 입력된 대로 나오기 때문에 여러분이 안 받으려야 안 받을 수가 없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거를 팔자니 운명이니 하고 울고 야단법석들을 하는데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나온 거를 거기다 맡겨 놓으면 앞의 것이 다 무너질 텐데 왜 거기다 맡겨 놓지 않느냐 이겁니다. 이 고깃덩어리가 ‘나’가 아니라 바로 마음과 그 기관이 작용을 해서, 안에까지 들어가서 과거에 살던 그 의식까지도 다 하나로 뭉쳐져서 그냥 자동적으로, 거기다가 맡겨 놓으면 그냥 자동적으로 앞의 거는 없어집니다. 넣으면 넣는 대로 없어지고 또 넣으면 또 앞의 것이 없어지고 이러기 때문에 항상 그릇이 비어 있는 까닭이죠.
그래서 집이 비면 들어와서 그렇게 하는데 이거를 어떻게 감당해 나가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너를 먼저 알고 나면 둘이 아닌 도리를 아느니라. 둘이 아닌 도리를 알면 너 하나마저도 없을 때 비로소 이 속에 있는 그 의식 자체가 전부 천백억화신으로 화하느니라.’ 내 마음이 그렇다면 이 의식 자체들이 전부 아는 겁니다.
내 의식이 그렇다면, 내가 그런 마음을 쓴다면 그런 마음대로 이 속에서 다 같이 따라 주고, 내 마음이 좋은 마음으로 쓴다면 좋은 대로 따라 줍니다.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이 좋으면 남한테 말하는 것도 부드럽고 좋고, 내 마음이 신경질이 나고 언짢으면 남한테 괜히 신경질을 내게 되고 말도 올바로 나가지 않습니다. 부드럽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나로부터 먼저, 내가 있기 때문에 우주 천하가 있고 모든 게 있는 겁니다. 부처님 불(佛) 자라는 것도 생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로부터 그렇게 내 주인을 완성해야만이 내가 주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집이 아주 튼튼하고 광이 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십이상(三十二相)이 구족하다는 얘기죠. 그래서 이것이 구족함으로써 행하고 나가는 것이 모두 전부 중용으로서 부드럽고 아주 평등하고 그리고 모든 걸 안아서 응해 줄 수 있는 그런 아량과 지혜 즉, 해탈지견(解脫知見)으로서 그렇게 쓸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더 넓게 생각을 한다면, 사회도 반쪽만 가지고 운영하려니까 힘들죠. 즉 말하자면 육근(六根)을 가지고 그냥 하려니까 안 되니까 육근으로 들어오는 그 모든 것을 놓으세요. 맡겨 놓으셔야 되는데 바깥에서 들어오는 경계를 안에다 들여보낼 사이도 없이 바깥으로 그냥그냥 모두 내놓는다면 그게 마(魔)가 되는 거죠. 말 한마디가 꼬리에 꼬리를 붙이고 말입니다. 일하는 게 전부 새끼 꼬이듯 꼬이고 말입니다. 하나서부터 열까지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그렇게 나가니까 보이는 구석이 전부 걸리는 겁니다.
그것을 안으로 놓으랬는데 바깥으로 그냥 전부 그러니까 어떻게 육식(六識) 자체로 들어서 그 모든 것을 십팔계에, 해탈로 들어갈 수 있는, 열반으로 들어가는 그런 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우리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치가 있죠.
그래서 나부터 알아서 내 주인이 완벽하다면 전자의 조사들도 네가 크게 쓸 때는 내 주장자로 한데 모아 주고, 작게 쓸 때는 네 주장자로 그냥 쓰고,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아주 더 크게 쓸 것 같으면 우주와 인간 근본의 마음과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의 모든 살림살이는 가설이 돼 있는 겁니다. 그래서 위도 하나, 아래의 모든 가설이 돼 있는 것도 근본은 하나입니다, 여기. 위로도 하나 아래로도 하나. 그러니 이게 중도(中道)입니다. 중심, 중도. 중심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거지만 ‘중도’ 이런다면 다 포함된 겁니다.
2008-08-12 오후 10:5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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