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랑을 이야기하자면 젊은 사람들의 몫으로 치부된다.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로 취급되지만 기실 사랑이란 연령에 구애 받지 않을 것이다. 대상에도 구애 받지 않을 것이다. 시간에도 구애 받지 않을 것이다. 공간에도 구애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들의 사랑만 부각되는 뜻은 그만큼 사랑이 지니는 표재적인 특성이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갖추고 있는 조건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가장 보편적인 뜻은 사전적인 의미일 것이다.
“이성의 상대에게 성적으로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의 상태” 란 설명이 있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의 몫이 틀림없겠다. “부모나 스승 또는 신이나 윗사람이 자식이나 제자 또는 인간이나 아랫사람을 아끼고 소중히 위하는 마음의 상태”라고도 설명한다. 그렇다면 한 차원 높은 것으로 젊은이들만의 몫은 분명히 아니다. “남을 돕고 이해하고 가까이 하려는 마음”을 사랑이라고도 했다. 봉사하는 마음일 것이다. 이런 마음은 누구나 지닐 수 있는 마음은 아니다. “사람이 가치 있는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하게 여기는 일”이라고도 한다.
얼마 전 미국 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77)의 사연이 보도돼 황혼의 사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7년째 치매를 앓던 남편의 간병을 위해 2005년 7월 종신직 대법관을 사직한 오코너는 남편이 다른 여성(치매환자)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지만 행복해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함께 행복하다”는 말로 심경을 밝혔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황혼의 사랑이 아름답다거나 순애보라고 포장한 것이다.
‘황혼의 사랑이 더 아름답다’란 주제의 이 보도는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 부모님들의 세대에선 뉴스거리가 될 소재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그랬으니깐.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엔 아름다운 순애보란 이름을 붙여 보도할 만큼 희귀하다는 뜻일 것이다.
“사랑에는 연령이 없다. 그것은 어느 때든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갈파한 말이다. 흔히 사랑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처럼 묘사되지만 팡세의 말처럼 사랑은 생명력이다. 아주 좁은 의미의 이성적 사랑에서 넓은 우주적인 사랑에 이르기까지 자기초월의미를 지닌 생명력의 원천이다. 무엇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생명력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니 그 생명력만 보아도 행복하다는 오코너 부인의 말에 동감이다.
우리들이 유의해서 보아야 할 쉽지 않은 부분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남편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한 부인의 결단, 치매가 걸린 오코너의 병동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지켜본 오코너 부인의 사랑 표현이다. 민감한 감정의 극단을 치닫는 젊은이들의 사랑처럼 증오를 지닐 법도 한 남편의 병동 사랑을 행복해 하는 남편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하는 것이 오코너 부인의 사랑 표현이다. 치매가 걸린 오코너의 사랑도 기억을 잃어도 사랑은 잃지 않는 그 생명력에 순애보란 포장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젊은이들의 사랑과 노년기의 사랑이 서로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는가가 다를 뿐 그 근원적인 본질은 같다. 파이퍼 박사는 “서로를 위해 헌신하고 공동의 선을 위해 일하는 문화를 원한다면 나이든 이들의 사연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일생을 두고 연령구분 없이 사랑할 능력을 가진다. 그리고 여러 형태로 사랑을 실천한다. 그 사랑이 바로 우리들의 생명력임을 다시 한 번 인식해 본다. 나이에 따라서 사랑을 인식하는 내용이나 실천하는 방법 등이 다를 뿐 노년기에는 사랑이 없다거나 사랑이 주책스럽다는 편견은 없어져야할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