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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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 스님(4)
영산, 어떤 것이 화두입니까
혜암, 봄날에 닭이 우느니라
영산, 어떤 것이 禪입니까
혜암, 신령스런 거북이가 날개를 펴느니라

영산(靈山) 스님이 하루는 수덕사로 혜암(惠菴, 1886~1985) 조실스님을 찾아왔다.
-문:어떤 것이 화두입니까?
-답:봄날에 닭이 우느니라.
-문:어떤 것이 선(禪)입니까?
-답:신령스런 거북이가 날개를 펴느
니라.
-문:어떤 것이 성인(聖人)의 말입니까?
-답:옛 부처(古佛)가 지나간지 오래
니라.
-문:어떤 것이 사구(死句)이며, 어
떤 것이 활구(活句)입니까?
-답:벌써 죽었느니라.
영산 스님은 절하고 물러갔다.
<벽암록>에 ‘청풍은 땅을 두루 도니 무슨 한계가 있으랴(靑風 地有何極)’ 하는 구절이 있다. 청풍은 걸림이 없고 한계가 없어서 한정도, 차별도 없이 누구의 창문에도 불어들고 있다는 말이다. 수행자는 진리의 암호인 화두를 깨닫지 못해 끊임없이 찾고 구하지만, 진리는 ‘봄날 아침에 닭이 우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자명해서 누구의 눈이나 귀에 뜨일 수 있고,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실상(實相)을 보고 듣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로지 자아로부터의 인식, 즉 자기 본위의 소견인 아견(我見) 때문에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극락은 십만억토(十萬億土)의 피안에 있다’고 하지만, 분별ㆍ망상을 여읜 무분별지(無分別智)로 보면 극락은 바로 눈 앞, 최단거리에 있다. 경봉 스님의 “눈을 떡~ 들어서 보마 다 아는기라!” 하신 말씀처럼, ‘목격도존(目擊道存)’인 것이다.
이처럼 ‘신령스런 거북이가 날개를 펴는’ 진공묘유(眞空妙有)한 세계, 즉 진여실상의 세계는 언제 어디서나 천기(天機)를 누설하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면 이를 알 도리가 없다. 수행자가 위에서 ‘화두나 선(禪)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의 문을 여는 암호나 열쇠를 찾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인 셈이다.
장졸수재(張拙秀才) 선사는 “광명이 고요히 온 법계에 두루 비춰, 성현과 범부중생이 한 집을 이루었네(光明寂照遍河沙 凡聖合靈共一家)”라고 노래한 바 있다. 이 광명이나 청풍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고루 불어오고 비치고 있기에 성인이나 범부라는 차별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영산 스님의 질문처럼 굳이 ‘성인의 말’을 따로 찾는다면 이미 분별심에 떨어진 것이다. 사구와 활구 즉, 죽은 말과 깨달음의 말을 분별하는 질문 역시, 이미 중생심에 떨어진 죽은 말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상(相)에 걸림이 없어야 한다. <금강경>의 말씀처럼, ‘모든 상을 떠난 것을 이름 하여 부처라고 하기(離一切諸相 卽名諸佛)’ 때문이다. 혜암 스님은 성인이니 범부니, 사구니 활구니 하는 상(相) 즉, 한 생각을 일으켰을 때 이미 십만 팔 천리나 어긋났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스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것을 알아내려는 성성(惺惺)히 깨어있는 의심으로 ‘돌이켜 보면(廻光返照)’ 된다. 방법이라 하여 따로 찾게 되면 결국 분별심만 늘어나게 되지만 ‘다만 의심하는 곳’에서는 일체가 그대로 소멸되고 만다”고 당부하였던 것이다. 김성우 객원기자
2008-08-12 오후 7: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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