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한자리에 같이 하면서도 한 달 동안에 몇 번 못 본 분들도 있고, 처음 오신 분들도 있으실 테고 또 가끔 뵌 분들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거나 미물 사는 거나, 사람들은 차원이 높아서 임신을 해도 하나만 낳고 그러지마는 사람의 차원까지 이르지 못한 미물의 짐승들은 많은 자식들을 낳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 인간도 한생각을 잘못해서 어떻게 행동이 돌아가고, 어떠한 인연에 따라서 삶의 고(苦)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 한번 그런 일들을 검토해 볼까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벌레의 세계든 짐승들의 세계든 인간의 세계든 또 우주의 모든 섭리든 그 살림살이가 다 똑같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살림살이가 즉, 과학이며 천체물리학이며 또는 진리며 도며 불교라고요. 조그마한 데다 신경쓰지 마세요. 기독교다 카톨릭교다 불교다 이런 이름에 끄달리지 마시고, 어느 종교라는 것을 갈라놓고 끄달리지 마세요. 사람은, 아니 사람뿐만 아니라 일체 생명들은 다 생명이 있겠지요. 불성은 다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크고 작은 걸 알게 되고 진화되고 창조되겠죠.
오늘은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종합해서 본다면 그런 이치가 한두 건이 아닌데 옛날에 어느 한 동네에 만석꾼이 살았더랍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비유인데 진실이라고 믿으셔야 합니다. 거짓이 아니니깐요. 만석꾼이 살았는데, 그 양반은 자기집 노비들을, 종들을 너무도 학대를 했습니다. 동네 일판에서 만석꾼이라면 아마 그 이웃은 다 자기의 노비로서 살고 있다고 봐도 됩니다. 이거 옛날 얘기가 아닙니다. 옛날 얘기로 비유할 뿐입니다. 잘 들으세요.
그래 한 동네가 그렇게 살고 있는데, 노비들을 너무 잔인하게 부렸습니다. 돈만 알고 농사를 짓는다 하더라도 그저 먹는 거라도 넉넉히 주고서 들여놨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배고프게 먹으며, 농사를 지어주는데 피와 땀이 흐르면서 병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소와 무슨 다름이 있겠습니까? 조금만 잘못해도 “왜 더 들여오지 않느냐?” 하고 두 부부를 묶어놓곤 때리고 하니 그건 뭐, 돌아가면서 그 고통이 너무도 많았었습니다. 그랬는데 어느 날 매를 맞고도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그날 나무를 안 해오면 주인한테 또 얻어맞을 테니까 고만 나무를 하러 갔죠, 아파도.
나무를 한 짐 해서 지고 내려오다가 그 매맞은 다리가 너무 아파서 쉬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젊은 스님이 다가오더니 “그 왜 그렇게 울고 있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물었더니 그이가 하는 소리가 “참, 무슨 죄를 많이 짓고 났던지 이렇게 노비로서 태어나서 그저 걸핏하면 때려서 건강치 못한 몸으로 나무도 못하게 만들었으니 이 노릇을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젊은 스님한테 말했단 말입니다. 젊은 스님이 하는 소리가 “여보시오, 어차피 한 번 죽을 건데 몸뚱이 태어나서 얼마나 가리까?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어차피 노비로 태어난 거 그대로 그대로 마음을 안유시키면서 조금만 더 살면 죽을 텐데 뭘 그러시오.” 하고 가거든요.
그 소리 들으니까 너무나 더 슬펐습니다. 한 세월을 노비로 태어나서 이렇게 산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부모도 불쌍하지마는 자기의 동생들도 불쌍하고 자기도 불쌍했더라는 얘깁니다. 동생이 있어도 이웃에 살면서 또 노비 노릇을 하니 말입니다, 응! 자기 자식을 낳았어도 또 노비 노릇을 해야 하니 이 노릇을 어떡합니까? 지금같이 먹고 죽을 약이라도 있으면 그냥 몽땅 다 먹고 죽을 텐데 말입니다. 아, 그때야 양잿물밖에 더 있습니까? 그러나 양잿물도 맘대로 못 먹고 죽습니다. 종이기 때문에요. 남의 노비인데 만약에 자살했다면 그냥 둡니까, 그 가족을.
그래서 더욱더 슬퍼서 울다가 할 수 없이 눈물을 씻고 다시 나뭇짐을 지고 내려왔습니다. 지고서 참 근근이 내려왔는데 그 맞은 독도 있고 하니깐 병이 들어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죠. 앓다가 죽어서는 양반집 주인의 손자로 태어나고, 또 그 양반은 죽어서 그 노비의 손자로 태어났더란 말입니다. 아마 누구나가 이렇게 태어나서 같이 산대도 모를 겁니다.
내가 그런 얘기 잘 하죠. 구더기는 자기가 파리가 된 줄 모르고 파리는 구더기였다는 걸 모른다고요. 매미는 또 굼벵이라는 걸 모르고 굼벵이도 매미라는 걸 모르고 말입니다. 이렇게 하고 가니, 정말로 자기 부모가 이 세상에 자기와 연결이 돼서 십대 종손 십일대 종손으로 나올 수도 있는데, 그걸 통히 모르거든요. 당대에 나올 수도 있죠. 그래서 나쁜 것에도 착을 두지 말라는 얘깁니다. 좋은 것도 착을 두지 말고, 이 공부하는 데는. 그렇게 엇갈려서 바뀌었습니다. 사연은 많지만 간단하게 그냥 넘어갑시다.
그렇게 엇갈려서 양반은 종이 되고 종은 양반이 되었죠. 양반이 종 노릇을 하려니까 양반으로 살던 습이 남아서 아상이 많아. 아무리 종놈으로 태어났을지언정 이건 아만이 머리끝까지 있단 얘깁니다. 그러니 종으로 태어난 것도 그렇지만 한술 더 떠서 매를 더 맞게 됐단 말입니다. 그리고 종으로 살던 사람은 또 종의 습이 있어가지고 항상 자기가 높은 줄 몰라. 항상 눈물이 잦고 노비들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들어, 남도 모르게 자기도 모르게. 그러나 형님들도 있고 아우들도 있는데 그렇게 되나요? 양반 상놈은 나라에서 정한 법이요, 종이라는 건 때려죽여도 살인도 아니었죠.
종으로 태어난 그 사람은 난 척을 하니까 몰매를 맞고 지내다가 어느 날 그만 헛간에 불이 났단 말입니다. 불이 났는데 그 양반 노비는 소를 끌어내려다가 그만 불에 데었단 말입니다. 소도 데고 자기도 데었는데 그거를 다 끄고 보니까 서너 군데나 데었단 말입니다. 소도 엉덩이가 데어가지곤 그냥 훌렁 까지고 그랬으니 주인집에서는 “소도 돌볼 겸 외양간에서 같이 자거라.” 이랬답니다. 그러다 보니까 소하고 서로 둘이 끙끙대고 앓고 또 소는 소대로 송아지들을 두어 마리 낳아가지고선 새끼들도 있는데 어미가 엉덩이가 그렇게 데었으니 그냥 앉기만 해도 아프거든요. 또 지푸라기가 닿으면 “음매” 하고 소릴 지르면서 울어요.
그렇게 지낸 지 며칠 후에 어느 스님이 한 분 오셨어요. 스님이 오셨는데 시주를 하라니까 그 양반의 집에서는 쌀 한 됫박 갖다가 부으면서, 우린 만석꾼인데 만오천 석이 되게 해달라고 스님한테 빌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돌아서다가 외양간을 보시고는 그리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니깐 그 전생 양반 노비는 말입니다, 이생에서는 종이죠. 종이 하는 소리가 “무슨 팔자가 이래서 종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는지 나는 나를 낳은 우리 부모도 죽이고 싶도록 원망스럽고, 자기 주인 양반도 어느 때든지 그냥 불에 태워 죽이고 싶다.” 그러거든요. 전생에 양반이었을 때 성질이 그대로 남아서 말입니다. 전자의 각본대로 나오니까.
아, 그렇게 성질을 피우니까 “허허!” 웃으면서 스님이 하는 소립니다. “내가 여기 들어온 것은 자네 때문에 들어온 것만은 아닐세. 저 소로 인해서 들어왔네. 소의 얘기는 이렇다네. 저 묘향산 상원사에 어느 행자로 들어와서 살던 스님일세. 그러나 수좌(首座)가 돼가지고 부처님 앞에 놓는 돈만 그저 긁어가고 여자를 좋아했어.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몰래 산을 내려가서 어린애를 낳아놓고 살지도 못하고는 그냥 또 올라오고 올라오고 했기 때문에, 원한을 사고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승려의 본분을 지키지 못해서 소가 됐다네.” 그러거든요.
“그래, 저것 보게. 송아지를 낳아놓고도 엉덩이가 아파서 저렇게 앉지도 못하면서 꾸부정하게 젖을 먹이고 있는 걸 좀 보게. 얼마나 고통인가? 그래도 인제 울면서 뉘우치기 때문에 내가 한 일주일만 있으면 데려가려네.” 하거든요. 또 “자네는, 이 소의 인연으로 인해서, 소를 이렇게 극진히, 자기의 아픔과 같이 잘 거두기 때문에 자네도 인연 따라서 앞으로 법도를 닦아서 나라에 크게 이바지하기를 바라네.” 했거든요.
그러고 간 지 삼일 만에 그만 그 사람도 죽고 소도 죽었더랍니다. 그러니깐 양반의 집에서는 야단이 났죠. 하지만 어떡합니까? 소도 죽고 그 종도 죽고. 더 기막힌 건 그 일이 있고 일주일이 지나자 송아지 두 마리조차 다 죽었더랍니다. 그런데 그 이웃의 어느 집이 참, 가난한 집이지마는 남의 노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집으로 인도를 해서 형제로 태어났습니다. 형제로 태어나서 그 스님의 불씨가 그래도 인연이 있어서인지 다시금 스님네 노릇을 하면서 도를 닦았답니다.
그러니 도를 닦을 때에 어떻게 닦았겠습니까? 산중에서 도를 닦을 때는 새 한 마리 빼놓지 않고 곡경을 당하게 한, 잠재의식 속에 있었던 것이 스스로 마음 속에서 나와, 이제는 그러한 일이 없으리라고 다짐하고 중노릇을 잘해서 앞으로 모든 생명을 건지고자 하는 원이 뚜렷하게 섰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여자를 봐도 나무토막 같아, 그렇게 한 번 겪어서. 그 얘길 다 들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생명을 죽이지 않으려고 짚세기에다가 떡 하니 새끼 오락지를 매되 방울을 달고, 어디든지 산길을 걸을 때는 반드시 휘휘 젓고선 다녔단 말입니다. 팔자 걸음으로 슬슬 떼면서, 생명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벌레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 그러면서 벌레 하나하나도 내버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친구를 만들었습니다. 날아다니는 새도 자기 친구를 만들었고, 모두 친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친구를 만들었다는 뜻을 한번 얘기해 볼까요?
여러분! 여러분 몸 하나하나에, 즉 말하자면 화생(化生)이라든가, 태생(胎生)이라든가 또는 습생(濕生)이라든가 난생(卵生)이라든가 이러한 사생(四生)이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사생이 다 들어 있다는 그 묘한 법을 어떻게 일러드리나 하는 생각에 이런 말을 지금 합니다. 그 사생의 인연은 어떻게 지어진 인연일까? 자기가 수없이 겪어 나오면서 살아나가던 습으로 인해서 알로 낳고 태로 낳고 습한 데서 낳고 또는 화(化)해서 낳고 하는 그 인연들을 자기가 몽땅 가지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닙니다.
악한 것을 내가 먹었다, 악한 것을 하나 살생을 해서 먹었다 합시다. 벌 하나라도, 벌도 여러 가지지만 독이 들은 벌이라고 할 때는 벌 하나 먹어서, 내가 주장자가 완벽하게 서지 않은 빈 집이라면 독 있는 벌 하나를, 생선 하나를 잘못 먹어도 그 생선 속에 들은 사생이 다 내 인연이 된단 말입니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독이 들은 물체 하나를 먹으면 그 물체 속에 사생이 우리와 같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악의 씨는 악의 씨를 낳고 선의 씨는 선의 씨를 낳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종류의 습을 가진 것을 먹게 되면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사생이, 전부 수십억 마리에 관한 건이 전부 악으로 이루어지고, 악으로 낳게 되고, 악으로 행동을 하게 되고, 끝간 데 없이 그렇게 굴러갑니다. 그러다가 어떠한 인연을 만나면 그 악이 없어질 수 있겠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사생을 다 가지고 있어서 남의 악한 종류를, 독을 먹는다면 그 모두가 독의 물이 든단 얘깁니다. 모두가 흡수가 되는 거야. 기능이 마비가 되고 무슨 독한 약을 먹으면 그렇듯이, 내가 악한 것을 먹으면 그 악한 피가 흘러서 내 피가 오염이 되니 그 생명들이 전부 마음 씀씀이를 악하게 쓴다 이겁니다.
그러나 그뿐인가요?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만다면 별 문제가 아니죠. 한생각으로 사생의 모든 모습을 바꿔가지고 모습 모습이 다 다른 수십억 마리의, 모습도 다르지만 마음도 다 다른 그것이 한꺼번에 지금 오장육부에 다 있으니 그게 오염이 된다면 얼마나 숫자가 많겠습니까? 그러면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마음이라는 건 체가 없어서 오염된 악의 씨는 마음 하나에 의해서 수천수만으로 금세 늘어갈 수가 있는 씨가 나옵니다. 그러니 오염된 그 씨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것을 해치는 겁니다.
모습으로 나오는 것만 많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안 보이는 데서 즉, 영령(英靈)의 씨가, 악한 씨가 보이지 않는 데 수없이 피를 타고 돌면서 또는 전파를 타고 돌면서 나가서는 어디에고 다 퍼집니다. 사람이 숨 들이쉬고 내쉬는 데도 나고 듭니다. 이 여러 가지 문제를 어떻게 다 말로 하리까? 시급한 문제는 우리 마음으로서 어떻게 한생각을 잘해서 아까 얘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하다못해 애벌레 하나 버리지 않고,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버리지 않고 친구로 만드느냐 이겁니다. 체가 없는 마음은 체가 없는 마음을, 의식적으로 식(識)이 식을 먹고 식에게 식이 먹힙니다.
그러면 식과 생명, 영원한 나의 주인공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한 의식에 이렇게, 여러 가지 마음 나는 그 의식 자체가 바로 한 의식이란 얘깁니다. “한 의식 속에 수천수만 가지가 나고 드니 그것을 조절해서 전부 그 자리에 놔라.” 이 소리를 항상 하고 있죠? 그러면 때에 따라서 모든 친구들이 내 몸속에 들은 친구와 더불어 같이 둘이 아니게, 외부적으로도 내부적으로도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물질들이 나 아님이 없을 것이요, 마음들이 나 아님이 없을 것이요, 아픔이 나 아님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모든 게 동시에 어떠한 일을 한다면, 나라에 무슨 큰 문제가 나도 이걸 들어야만 나라가 융성하고 또 편안하고, 또 어떠한 문제가 있어서 팽창될 때 나쁘게 될 때는 좋게 조절을 하고 좋을 때는 또 좋은 대로 평등하게, 즉 말하자면 위로 너무 솟아오르는 건 탁 쳐서 내리고 또 너무 내려가는 건 위로 올리면서, 평등하게 두면서 나라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겁니다. 굳이 그런 공헌을 세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다함이죠.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대통령 자리도 싫다 하고 이 세상을 다 준다 해도 아마 마다할 겁니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있을 때엔 때에 따라 어떤 일이 벌어져도 모든 일체 만물이 다 내 친구라면 어떠한 분야의 어떠한 용도에서는 두루두루 쓸 수 있습니다. 내가 항상 그러죠? 자가발전소에서 전력이 나오는데 용도대로, 회사는 회사대로, 집안은 집안대로, 또 공중에서 쓰는 건 공중에서 자기 마음대로 지금 쓰고 있다고요. 그와 마찬가지로 용도대로, 즉 말하자면 발전소는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굴러가면서 자동적으로 에너지가 나가서 용도대로 일을 처리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한 몸뚱이가 한 몸뚱이가 아닙니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했듯이, 하화중생 하면 상구보리, 상구보리 하면 하화중생이듯이. 내 몸속에 지금 수십억 마리의 중생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하화중생이라고 하기도 하는 겁니다. 몸뚱이 하나로 비유해서 세상에 탁 나왔을 때는 그 많은 중생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그걸 생각해서라도 선장님들은 배를 잘 가지고 다니셔야 됩니다. 모든 배 밑에는 수레바퀴가 달려서 지금 팔방으로 고정됨이 없이 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몸뚱이가 배고, 발은 배 밑의 바퀴라고 해도 돼요. 그러니 평발이지.
여러분은 ‘나 아닌 나’가 그렇게 많은 숫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습 없는 나’가 그렇게 많아서 나고 든다는 걸 잘 아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바깥에 모습 없는, 바로 타인의 모습 없는 세균이 나한테 들어온다 하더라도, 이게 나한테 들어오면 그냥 하나가 돼버려야 탄로가 나지 않는데 하나가 되지 않고 둘이 돼버린다 말입니다. 너도 주인이고 나도 주인이고 이렇게 되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이 몸뚱이를 건강하게 끌고다닐 수가 없습니다. 뱃속에 타인이 하나 들어왔으니깐요. 그러니 뱃속에서는 싸움이 벌어지게 되죠.
그러니까 싸움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분한테 꼭 주인공에서 나오는 건 주인공에다 맡겨놓으면 주인공에서 어떤 세균이든지 영계성이든지 유전성이든지 어떠한 문제가 다가오더라도 다 해결을 한다고 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는 보이지 않게 해결을 하고, 보이는 데선 보이는 대로 해결을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질서정연하고 역력하고 묘하고 광대무변합니까? 내 몸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거부터 알아야 의학적으로도 그렇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 할지라도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주 광대무변한 법을 가지고 있고 또 광대무변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대 의학으로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여러분 자체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목에 탈이 생겨서 말이 잘 안 나온다면 목을 자기가 스스로 수술을 하고 또 간이나 심장도 그렇고, 자동적으로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또 보이지 않는 자기 자체는 타인도, 그 타인도 주인공은 둘이 아니라서 내 전화통과 그 전화통과 벨이 같이 울리기 때문에 ‘내가 저 사람을 꼭 안다, 저 사람은 참 안됐는데 내가 저 사람을 건져야지.’ 하는 생각만 하면 언젠가는 건져질 수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한 사람을 망하게 하려면 뭐, 한순간입니다. 이 도리가 그렇게 무서운 도립니다. 여러분이 욕심 착, 이런 걸로 벌어지게 해서 남을 망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요소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욕심이나 착이나 남을 망하게 하는 그러한 마음을 가졌다면 어디서든지 샘이 나올 듯하다가도 한울에서 열쇠를 맡기지 않습니다. 한울이라면 한마음 말입니다. 개별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앞에는 한마음의 열쇠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한마음이 돼야 한마음의 열쇠가 나옵니다.
만약에 한마음이 되지도 못한 사람이 열쇠를 받았다면 그 재주를 이용해서 ‘에이! 너 맛 좀 봐라!’ 대번에 이러한 마음이 나오니, 자동적으로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는데 어떻게 자신이 자신에게 열쇠를 맡깁니까? 자신이 아비고 지금 현재 자신이 아들이라면 어떻게 그런 아들한테 열쇠를 맡기겠습니까? 아들이 아버지하고 둘이 아닐 때에 비로소 열쇠는 받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디 한생각에 그러한 기운이 깃들어져 있는 사람은 ‘너 맛 좀 봐라!’ 하고 망하게 만들면 아주 즉석에서 부서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는 놈이 있으면 나는 놈이 있다는 얘깁니다. 고런 버릇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느 때인가 또 걸립니다. 나는 놈한테 걸려요. 그래가지고 톡톡히 당하죠. 그렇듯이 여러분은 그러한 데서 마음 하나하나를 낼 때 남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나를 깨우쳐 보지 않는다면 내 몸과 둘이 아님을 몰라요. 또 내 자리 네 자리가 둘이 아니라는 걸 모르고, 내 아픔 네 아픔이 둘이 아니라는 걸 모르고, 니 아비 내 아비가 둘이 아니라는 걸 모르고, 니 자식 내 자식이 둘이 아니라는 걸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겁니다.
참 간절하게 자식이 없어서 우는 부모가 있고 부모가 없어서 우는 자식이 있습니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닙니다. 저런 벌레들도 짐승들도, 저런 섬 같은 데 한번 마음의 눈으로 스르르 좀 봐보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연구해 보십시오, 좀 여유있게. 쫓기고 쫓고, 피를 내고 울고, 즐거워하고 괴로워하고 하는 것을 보십시오. 쫓기고 쫓다가 먹히고, 부모는 자식이 없어져서 울고, 자식은 부모가 없어져서 우는 그 꼴을 둥글리면서 보십시오. 짐승들만 그런 게 아니라, 벌레들만 그런 게 아니라, 개미들만 그런 게 아니라, 벌들만 그런 게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그 모든 생명들의 모습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신다면 어떠한 생각이 드십니까? 아까 얘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이 집에 태어났다가 저 집에 태어나고 저 모습으로 태어났다 이 모습으로 태어나고 합니다. 이렇게 둥글리면서 끝간 데 없이, 종점이 따로 없고 시발점이 따로 없이 돌아가면서 자기 마음 씀씀이에 의해서, 생활에 의해서, 행동에 의해서, 욕심에 의해서, 자기가 모습을 자꾸자꾸 바꿔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한다면 그 모두가, 애벌레든 짐승이든 할머니든 할아버지든 애든 어른이든, 남의 집의 아버지든 남의 집의 할아버지든 남의 집의 자식이든, 어찌 내 자식이 아니며 내 부모가 아니며 어찌 그것이 내 생명이 아니며 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다음 호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