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의 이론적 체계를 정립한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1088∼1163) 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는 육왕준박, 개선도겸, 설봉온문 등 무려 110인을 넘는다. 그런데 이 제자들 가운데는 재가자와 비구니스님들이 적지 않았다. <인천보감>에는 대혜 선사의 걸출한 비구니 제자인 묘총(妙總) 스님에 대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임제종 대혜파인 자수사(資困寺) 묘총 선사는 소씨(蘇氏)이며 원우(元祐: 1086∼1093)년 간에 승상을 지낸 고위관료의 손녀다. 열다섯 살 때 선(禪)이 무슨 뜻인지는 전혀 몰랐으나, 철이 들면서 ‘생(生)은 어디서 오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유독 의심을 냈다. 그 생각만 하다가 홀연히 느낀 바 있었으나 스스로 별것 아니라 여기고, 사람이면 다 그런 줄 알고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부모의 명을 받들어 서서(西徐)의 허수원(許困源)에게 시집갔는데, 얼마 안 돼서 세상살이가 매우 싫어졌다. 계를 지키고 몸가짐을 깨끗이 함으로써 자족했으며, 세속에서 벗어나 노닐고자 하였다. 뜻을 세워 옛 사람을 흠모하다가 마침내 천엄사의 원(圓) 선사를 찾아뵈니, 원 선사가 물었다.
“규중의 숙녀가 어떻게 대장부의 일에 끼겠는가?”
“불법에서 남녀 등의 모습을 나눕니까?”
원 선사가 다시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니 ‘마음이 부처’라고 하였는데,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오래 전부터 스님의 이름을 들어왔는데, 겨우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덕산 스님의 문하에 들어간다면 몽둥이를 맞겠구나.”
“스님께서 만일 그러한 법령을 시행한다면 인천(人天)의 공양을 헛받는 것은 아니겠습니다.”
“아직 멀었다.”
이에 묘총이 손으로 향로 탁자를 한번 때리니, 원선사가“향로 탁자가 있으니 마음대로 치라만, 없었으면 어찌하였겠나?” 하고 물었다.
묘총이 밖으로 나가버리자 원 선사가 부르면서 말했다.
“그대는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이러는가?”
“밝고 밝게 보니 한 물건도 없습니다.”
“그 말은 영가(永圈玄覺) 스님의 말이다.”
“남의 말을 빌어서 내 기분을 나타낸들 무엇이 안 될 것이 있습니까?”
“진짜 사자새끼로구나.”
묘총은 강절(江浙) 지방의 큰스님들을 거의 다 찾아뵈었지만, 오직 묘희(妙喜: 대혜 선사의 아호) 선사를 만나뵙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 마침 묘희 선사가 풍제천(馮濟川)과 함께 배를 몰고 가화성에 도착하니, 묘총이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이튿날 묘총의 남편 허수원이 묘희 선사에게 설법을 청하니, 선사가 대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이 가운데는 어떤 경계를 본 사람이 있다. 이 산승은 사람을 간파할 때 마치 관문을 맡아보는 관리와 같아서 누가 오는 것을 보자마자 세금을 가져왔는지, 안 가져왔는지 알아차린다.”
그리고는 법좌에서 내려오자 묘총이 마침내 법호를 지어달라고 하여 묘희 선사는 ‘무착(無著)’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다음 해에 묘총은 경산총림(徑山叢林)에서 하안거를 보냈는데, 하루 저녁은 좌선을 하다가 홀연히 깨닫고 게송을 지었다.
“갑자기 본래면목에 부딪히니/ 온갖 재주가 얼음녹듯, 기와장 무너지듯 했네/ 달마는 하필 서쪽에서 와가지고/ 2조의 헛된 삼배를 받았는가/ 여기에 이걸까 저걸까 물어본다면/ 좀도둑 한떼거리가 대패했다 하리라.”
묘희 선사가 이 게송을 보고 “그대는 이미 산 조사의 뜻을 깨달았으니 단칼에 두쪽내듯 당장에 알아버렸다”며 인가하고, 묘총을 입실(入室) 제자로 받아들였다.
묘총 선사는 ‘생(生)은 어디서 오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하는 큰 의심이 저절로 화두가 되어 생사의 일대사를 해결하고 자유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성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