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行者 若於行時 應作是念 我今爲何等事欲行 爲煩惱所使 及不善無記事行 卽不應行 若非煩惱所使 爲善利益如法事 卽應行 云何行中修止 若於行時 卽知因於行故 則有一切煩惱善惡等法 了知行心 及行中一切法 皆不可得 則妄念心息 是名修止 云何行中修觀 應作是念 由心動身 故有進趣名之爲行 因此行故 則有一切煩惱善惡等法 卽當反觀行心 不見相貌 當知行者 及行中一切法 畢竟空寂 是名修觀
“나는 지금 무슨 일을 하려고 길을 가려고 하는가.”
첫 번째로 길을 가려는 사람은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을 해야만 한다.
번뇌의 지배를 받아 선하지 못한 일, 무기의 일 때문에 길을 간다면 그 길은 가지 말아야만 한다. 그러나 번뇌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선한 이익을 여법하게 하려 한다면 마땅히 길을 떠나야만 한다.
그러면 길을 가는 도중에 지 수행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길을 가는 것으로 인해서 일체 번뇌와 선법ㆍ악법 등이 일어난다는 것과, 길을 가는 마음과 길을 가는 도중에 일어나는 일체 모든 법은 실체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명료하게 안다면 망념의 마음이 쉬게 된다. 이를 두고 지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길을 가는 도중에 관 수행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몸은 마음을 따라서 움직인다. 그로 인해 길로 나아가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을 마음이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한다. 길을 가는 것으로 인해 일체 번뇌와 선법ㆍ악법 등이 일어나기 때문에 길을 갈 때의 마음을 돌이켜 관조하여 길을 가는 모습에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알아야할 것은 길을 가는 도중에 일어나는 일체 모든 법이 끝내 공적하다는 점이다. 이를 관 수행이라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행 주 좌 와 등 열 두 가지 일 가운데서 차례로 낱낱이 지관수행을 하는 모습에 대해 해석하였다.
첫 번째로 길을 갈 때 수습해야하는 지관에 대해 설명하겠다.
“나는 지금 어떤 일 때문에 길을 가려고 하는가.”
길을 떠나려할 때는 출발하기 전 마땅히 이와 같은 생각을 일으켜야만 한다. 이번에 길을 떠나는 것이 번뇌의 지배를 받아 살생, 도적질, 음행, 망어 등 선하지 못한 일이나 무기의 일 때문이라면 즉시 중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계 정 혜를 닦고, 향을 사르고, 부처님에게 예배를 하고, 꽃을 뿌려 부처님에게 공양을 하고, 경전강의를 듣고, 법문을 듣는 등 선한 이익을 여법하게 하려고 길을 떠날 경우엔 즉시 실행에 옮겨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모든 악업은 짓지 말고 뭇 선업을 받들어 행하는 일이라면 즉시 길을 떠나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떠나지 말아야 한다.
다음으로 길을 가는 도중에 지 수행하는 것에 대해 말해보겠다.
내가 길을 떠나는 일 때문에 현재 일체 선악법이 일어난다는 것과, 길을 떠나지 않는다면 길을 가는 도중에 일어나는 모든 일도 없다는 것을 명료하게 알아야만 한다. 이것을 두고 “만법은 오직 행하는데 따라서 일어난다”라고 하였다.
또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길을 떠나고 떠나지 않는 것은 오직 내 마음에서 나타날 뿐이므로 마음으로 인해서 있다”는 점이다.
만일 길을 가야겠다는 일념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즉시 길을 떠나는 일도 없고 가야할 길도 없다. 이런 마음을 보면서 길을 떠나야만 된다.
경계는 본래 일어남이 없이 내 마음으로 인해서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만법유심이라고 한다.
일체법은 마음으로 귀결하기 때문에 일체만법은 내 마음으로 귀결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또한 마음은 본래 일어남이 없는데, 대상경계 때문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만법은 오직 내 행동하는 모습일 뿐이다. 따라서 일체법은 행동으로 귀결하는 데에 불과한 것이다.
그 최후까지를 추구해보면 행동하는 주체의 모습도 없고 행동할 대상도 없다. 주체와 대상은 본래 고요하다. 이를 안다면 지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 수행이 이와 같다면 관 수행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옛날 조사스님들께서는 오로지 길을 걸으면서 항상 삼매를 닦았다고 한다.
二住者 若於住時 應作是念 我今爲何等事欲住 若爲諸煩惱及不善無記事住 卽不應住 若爲善利益事 卽應住 云何住中修止 若於住時 卽知因於住故 則有一切煩惱善惡等法 了知住心 及住中一切法皆不可得 則妄念心息 是名修止 云何住中修觀 應作是念 由心駐身 故名爲住 因此住故 則有一切煩惱善惡等法 則當反觀住心 不見相貌 當知住者 及住中一切法 畢竟空寂 是名修觀
두 번째로 안주하는 문제에 대해 말해보자.
“나는 지금 어떤 일 때문에 머물려고 하는가.”
머물 때에는 반드시 이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이때도 역시 모든 번뇌로 인해 착하지 못한 일과 무기의 일 때문에 머문다면 머물지 말아야만 한다. 그러나 선으로 이익된 일이라면 반드시 머물러야만 한다.
안주할 때엔 지 수행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안주하는 것으로 인해서 일체 번뇌와 선악법 등이 있다는 것을 알고 머무는 마음과 머무는 가운데 일체법은 그 모든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명료하게 안다면 망념이 쉬게 된다. 이를 두고 지 수행이라고 말한다.
안주하는 가운데 관 수행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내 마음을 따라서 몸이 안주하기 때문에 그것을 머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음은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이 머무는 것 때문에 일체 번뇌와 선악법 등이 있다면 마땅히 안주하는 마음을 돌이켜 관찰하여 그 모습을 분별하지 말아야만 한다. 알아야 할 것은 안주하는 것과 안주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체법은 공적하다는 점이다. 이를 관 수행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안주하는 가운데 지관을 닦는 것에 대해 말했다. 안주라고 하는 것은 정지하여 머문다는 뜻이다. 마음을 따라서 몸이 안주한다고 하는 것은 몸이 마음의 지배를 받아서 마음이 몸을 머물게 한다는 뜻이다.
만일 마음을 안주하지 않으면 몸도 역시 안주하지 않는다. 모든 법이 끝내 공적하다고 하였는데, 머무는 마음과 머무는 대상으로서의 법이 낱낱이 당체가 본래 고요하여 진공의 이치와 서로 호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끝내 공적하다고 하였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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