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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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아닌 지혜로운 마음으로 근본에 맡겨 놓고 지켜보라!
신의 길, 인간의 길
요 근래에 SBS 방송에서 “신의 길, 인간의 길”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상영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인간이 본래 신인데, 인간이 만든 신에 의해서 인간이 구속되어 살아가는 모습들이 못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자각의 종교인 부처님법을 만난 저희들 중에도 진정한 부처님의 삶과 깨달음의 길을 찾기 보다는 자신의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타력의 종교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믿고서 기복과 발복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자신의 근본을 믿고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기복으로만 헤매이게 되는 것일까요?
말끝에 이 말이 지금 생각납니다. 나는 그전에 이런 일 때문에 많이 울었습니다. 왜 열 사람이라면 꼭 다섯 사람이나 여섯 사람만 완쾌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고 항상 떨어지는가. 그것이 내 탓이라고 돌리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말도 못합니다. 이렇게 똑같이 불쌍하고 그런데 왜 한꺼번에 다 똑같이 되지 않느냐고 울었죠.
그런데 하루는 달이 그믐달이었는데 어느새 초승달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걸 쳐다보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러자 달이 둥글었다가 반쪽이 됐다가 점점 점점 줄어들더니 나중엔 아주 실낱같이 적어졌다가 또다시 둥글어지고 그러더군요. 새삼스럽게 지금만 있었던 게 아니라 예전에도 있었건만 그걸 쳐다보고 ‘옳지, 세상은 이렇기 때문에 진리가 끊임없다고 말을 했구나. 그 사람네들이 그렇지 못한 거를, 거기에 어떠한 문제가 걸려 있는 거를 내 어찌하겠는가? 보름달이 있으면 그믐달이 있듯이 마음과 마음이 차이가 나고 그렇게 되니 어찌하겠나?’ 하고 그땐 눈물을 닦으면서 싱긋이 웃고 들어갔습니다만 웃음은 잠시 잠깐이고 생각에 잠겼었습니다.
지금도 답답한 게 아니라 담담합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요지경 속으로 돌아가나!’ 하는 생각에서 담담하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답답해하고 방황하는 것도 아니고 불쌍해서 애를 쓰는 것도 아니고 안 불쌍해서 덜 애쓰는 것도 아니고 쾌활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항상 담담하단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언짢지는 않으나 ‘하이구, 요지경 속이구나!’ 이러고 어떤 때는 길을 가다가도 그냥 너털웃음으로 웃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게 어떠한 웃음이겠습니까? 웃음도 천차만별입니다. 우스워서 웃는 웃음이 있는가 하면 기가 막혀서 웃는 웃음이 있고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전자에 형상을 모셔 놓고 제자들을 가르친 것도 아닙니다. 또는 선방을 만들어 놓고 앉아서 너희는 시간을 정해서 해라 하고 가르친 것도 아닙니다. 나는 경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당시에는 자유스럽게 놔두면서도 자기가 스스로 계율을 지키게끔 이끌어 주는, 바로 그런 길을 부처님께서는 인도하셨던 겁니다. 몸으로써 고행을 한다고 해서 부처를 이루고 또는 고행을 안 한다고 해서 부처를 못 이루는 건 아닙니다. 첫째 마음입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이 참 중요하죠. 이런 문제가 역력하게 있습니다. 집안에서 한 사람이 그 도리를 알았는데 그저 언짢은 말은 하지 않고,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가 막말도 뱉지 않습니다. 자기 말이 한 번에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도리를 아는 사람의 한생각은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그것을 자비하게 돌려서 생각을 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 향기로운 마음의 에너지는 한 방에 있는 자기 식구들을 얼마나 밝게 비춰 주겠습니까?
이렇게 성스럽고 이렇게 묘하고 이렇게 생활에 즉각적인, 즉각적으로 감지되는 생활 속의 근본적인 진리인데도 우린 그걸 모르고 항상 그저 산에 올라가서 빌고, 일 주일이고 삼 주일이고 백 일이고 천 일이고 목욕재계하고 그저 멸치도 안 먹고 고기도 안 먹고 남편도 멀리 해 가면서 올라다니는 사람이 지금도 많습니다. 그것을 나쁘다고 하는 게 아니라 가정을 돌보지 않으니까 하는 소립니다. 내가 없는데 어떻게 부처가 있습니까? 내 가정을 파괴하고 어떻게 부처님을 이룬다고 합니까? 내 앞의 것을 모르고 어떻게 저 먼 데 것을 잡습니까? 그것도 다 욕심이거든요. 허황된 욕심이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래서 이렇게 가르쳐 주셨죠. ‘문전에서, 너희들이 정성을 들이려고 이고 나올 때 벌써 정성은 받았느니라.’ 그게 무슨 소린 줄 아십니까? 자기가 벌써 알고 있기 때문에 부처도 일체 신도 알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알고 있으니까. 그 뜻을 왜 모르십니까? 예전에 그렇게 명백하게 가르쳐 주셨는데 그 뜻을 왜 모르십니까? ‘네가 아는 것이 부처가 아는 것이다. 일체 신이 알고 있다. 일체 신이 알고 있고 일체 심(心)이 알고 있고, 만물이 같이 돌아가고 이렇게 행하고 있거늘 어찌 그것을 모르고 너희들은 타의에서 바라는 게 항상 그렇게 많으냐?’ 하시고 말입니다. 네가 해 먹지, 네게 있으니까 네가 퍼다 먹지 왜 남의 걸 바라느냐 이겁니다. 네 안에 바로 네 것이…, 이 우주 공간에 꽉 찬 것이 다 네 건데 어째서 남한테 바라는 마음을 갖느냐 이거죠. 그런 마음을 갖기 때문에 네 것이 다 못되느니라 이겁니다.
그래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배가 고프다 하는 것은 밥을 못 먹어서만이 배가 고픈 게 아닙니다. 일체 만법의 생활이 어떤 게 부족하든지 다 배고픈 건 배고픈 겁니다. 그러면 배고파도 내가 배고픈 걸 알기 때문에 배가 안 고프게 할 수 있다는 거를 또 알아야 되죠. 그것은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진실하게 가지면 벌써 그런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 내가 배고프면 벌써 여기서 해 주겠지.’ 이런 생각이 안 들어도 벌써 알고 있기 때문에 그건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것도 없어요. 그리고 편안한 겁니다. 자기가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서 돌아오는 것을 왜 내가 걱정을 하고 ‘배가 고파! 배가 고파! 부처님, 배 좀 부르게 해 주시오.’ 하고 애원을 하고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그렇다면 영원히 노예가 돼서 항상 배고프다고, 항상 남의 집 머슴 노릇만 할 겁니다. 남을 주고 살아야지 만날 노예가 돼서 남의 심부름이나 하고 얻어먹기나 해서 되겠습니까? 이건 비유입니다만 진실입니다.
모두가 살아나가는 데 급급해서 그냥 애를 쓰고, 이름을 배우려고 애를 쓰고, 이론을 배우려고 애를 쓰고, 지식으로 사는 거 이런 거. 남의 거를 갖다가 빼서 어떡하든지 내 걸 만들어서, 그저 좋게 얘기해 주면 될 줄 알고요. 그렇게 하는 마음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진실하고 그 진실한 도리를 앎으로써 진실하게 행하고, 진실하게 말하고, 진실하게 뜻을 지니고, 진실한 그 뜻을 지녔기 때문에 자기가 익게 되고, 익게 되면 고개가 숙여지고, 고개가 숙여지면 언제나 나 아님이 없고 전부 둘이 아니게 되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그런 도리를 우리는 모른다는 얘기죠.
하여튼 바깥으로 끄달리지만 않으신다면 빌지 않을 겁니다. 또 안으로도 빌지 않을 겁니다. 왜? 안으로 둘로 본다면 기도를 해야 하지만, 둘로 보지 않는다면 ‘관(觀)하라’ 이런 소립니다. ‘색(色)과 공(空)이 둘이 아닌 까닭에’ ‘마음과 내 몸이 둘이 아닌 까닭에’ 이 소립니다. 마음과 이 몸이 둘이 아닌 까닭에 이것도 아니고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이런다면 그 무엇이 있었던가? 그냥 주먹으로 이걸 하나를 집어서 한 번 친다면 쩡 울리는 그 뜻! 두 손으로 그냥 두 개를 집어서 팍! 친다면 번쩍 불이 일어나는 찰나 이겁니다, 모두가. 이 공부가 참 재미있고, 생활 속에서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찰나의 생활을 그냥 여여하게 사시라고 그렇게 가르쳐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빌어먹으려고만 하고 빌고 있으니 이걸 어떡합니까, 글쎄.
이렇게 밝고 밝은 세상에서 우리가 왜 그렇게 미(迷)하게 돌아가야만 합니까? 그러니 불법을 배운다는 분들이 아직도 정신을 깨지 못하고 자기의 옷깃을 여밀 줄 모르는 그런 분들이어서는 아니된다고 봅니다.

정신계의 50%를 충당할 수 있으려면…
저는 정신과에서 근무하고 있는 의사입니다. 이렇게 마음공부를 하다 보니 보이는 물질계의 50%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정신계의 50%를 거기에 충당을 해야만 정말 환자를 치유할 수 있는데 제가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지 마음으로 한다고 하지만 많이 힘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걸 알려면요, 그거 한 가지만 알아서도 아니 되니까 여러 가지 다 알려면 열심히 공부해서 나부터 알아야 돼요. 당신이 당신부터 알아야 앞으로의 전체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불교라는 것은, 불(佛)이라는 것은 일체 만물만생의 생명의 근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종교를 막론해 놓고 다 생명 없는 것이 없으므로 불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말과 말로 전달해서 돌아가게 했고 천차만별 생명들의 모습들이 다 그 나름대로 전달하고 돌아갑니다. 우리가 미국 사람이면 미국말 하고 일본 사람이면 일본말 하고,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말 하듯 다 자기네들끼리는 말을 하는 겁니다. 말을 못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일체 만물만생이 다 말을 하고 전달하고 돌아가는 겁니다. 그 가운데 특출한 거는 뭐냐? 말 없이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하는 도리입니다. 이게 정신계의, 바로 중용의 진리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전달돼서 돌아가는 이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의사나 과학자나 천체물리학자가 자기 소임을 행하는 데 있어서 모든 문제들을 걸림 없이 타개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이 되는 거는 일체 우주 삼천대천세계 모두가 가깝고 멀고가 없이 전달이 됩니다.
그런데 병원만 하더라도 마음과 마음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학술 이론 등 지금의 지식이나 의학계의 모든 거를 동원해서 아무리 연구해도 100% 해결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 사람이 어디서 온 줄을 알아야 그 병도 어디서 온 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정신계의 50%를 충당할 수 있고, 거기에 물질로써 커버하고 뒷받침을 해 줄 수 있는 의료상의 50%가 종합돼야 우리가 100% 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기술 분야도 그렇고 어떠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어도 다 그러합니다. 기계 하나를 만들어 놔도 그 사람의 혼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것도 바로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장승을 하나 세워 놔도 장승 세워 놓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혼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가고 오면서 보고 생각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이 거기 투입이 돼서 다 신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조성을 해서 저렇게 모셔 놓으면 그 모습만 봐도 부처님이라고 생각을 하고 모든 마음을 거기다 다하기 때문에 여래라고 하기도 하고 부처님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없다면 부처님도 안 계신 거고 부처님이 안 계시면 우리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내는 것이 없다면 목석이 될 것이고, 체가 없다면 무효일 것이고, 정신계의 근본이 없다면 바로 또 무효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지금 제일 시급한 문제는 아주 높은 데고 낮은 데고 다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나부터 알아야 된다는 얘깁니다.

무엇이 무엇을 지켜보는가?
관한다고 함은 곧 지켜보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무엇을 지켜보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생각, 자기의 마음이 현재 상태를 지켜보는 것인가, 마음으로 마음을 지켜보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놓고 가는 것인가요?
마음이라는 건 허공과 같아서 마음이 요거 한 가지를 생각했다면 고정되게 그거 한 가지만 딱 물려서 있는 것이 아니죠? 요 마음으로도 화할 수 있고 저 마음으로도 화할 수 있죠? 금방 딴 사람 만났으면 금방 화하고, 또 딴 사람 만났으면 금방 화하고, 이렇게 화해서 돌아가지요? 그러니까 그 마음이 바로 자기 주인공에게, 자기 마음 근본에다가 딱 놓고 자기가, 자기 마음이 지켜보는 거예요. 마음이라 그러는 건 이름이에요. 그러나 수천수만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마음이죠. 그러니까 그거를 지켜보는 것이 참 선(禪)이에요. 그리고 관법이에요.
그러니까 물건을 한번 실험하려면, 밥을 짓는 것도 그렇고, 하다못해 무엇을 하나 해도 실험해 보려면 한번 넣고 지켜보지 않아요? 그렇죠? 그와 같이 모든 것을 그렇게 거기 맡겨 놓고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든지, 어떠한 문제든지 거기 놓고 지켜보는 마음을 가지면 바로 그게 실험이요, 그것이 지나가면 바로 체험이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 놓고 관하고 지켜보고, 관한다는 게 지켜보는 거니까 둘 아닌 지혜로운 마음으로 거기다 맡겨 놓고 지켜본다. 지켜보면 체험이 되고 체험이 되면 ‘아, 고놈이로구나! 고렇게 되는 거로구나!’ 하고 그때는 놓치지 않고 갈 수 있죠.

이익과 욕심에 끄달릴 수밖에 없는데
선원에서 스님께 배울 때는 모든 것을 놓으라고 배우지만 직장에서 일할 때 또 가정에서 문제에 부딪칠 때는 자기에게 이익 되는 것에 너무 집착을 하게 되고, 그래서 실제로 우리가 마음을 제대로 마음자리에 두지 못하고 이익과 욕심에 끄달려 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한순간도 이익과 욕심에 끄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수행과 생활의 양극단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그래요. 근데 여러분이 좀 어리석은 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회사에서 직원들을 데리고 일을 하거나 장사를 할 때 사람이 안 온다 온다 이런 문제들, 뭐 잇속을 찾는다, 이익이 부진하다 이런 문제들이 있을 때 ‘아, 이런 공부를 하면서 내가 어떻게 이익을 취할 수 있을까?’ 이러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진짜로 믿는다면, 고꾸라지든지 가든지 오든지 그런 걸 상관 안 하고 거기다가 턱 맡기고 그냥 진짜로 내가 한다는 생각 없이 한다면 아무 괴로움이 없어요. 돈이 많이 벌려도 걸림이 없고요, 돈이 안 벌려도 ‘너만이 할 수 있다.’ 하고 거기다 놓기 때문에 괴로운 게 없어요. 그런데 믿지 못하는 까닭에 그렇지 않을까요?
간단히 생각하세요. 돈을 수만억을 번다 하더라도 걸림이 없어야 돼요. 왜냐하면 그것도 자기 혼자 갖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 혼자 번 것도 아니고 혼자 가질 것도 아니고 혼자 쓸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거기 걸려요? 내가 또 많이 번다고 하는 ‘내가’라는 생각이, 나를 내세우는 게 있기 때문에 그게 걸리는 거지 내 한마음이라는 주인공에서 본다면 아이, 그렇게 나가 많은데, 일체가 다 나 아님이 없는데 구태여 왜 거기 걸립니까? 그러니까 선지식들은 개구리 하나를 죽여도 죽인 사이가 없고, 깨치지 못한 자는 개구리 하나를 죽여도 살생이 된다 그랬어요.
그거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음을 증득해야 알아져요. 그러니까 열심히, 무조건 믿고 거기 맡겨 놓고 지켜보시고 그러세요. 그리고 거기에 걸림이 없어야 됩니다. 몇만 냥을 벌더라도, 또 욕심을 내서 생각을 내서 ‘저걸 벌어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이 나도 당신 혼자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에요. 수십억의 의식들이 한데 모여서 그렇게 생각을 한 거지요. 그러니까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돼요. 그 묘한 법은 여러분이 아마 열심히 해야 아실 겁니다.
지금 내용을 가만히 들어 보니까 ‘야, 나가서 장사를 하거나 회사에 다니거나 또는 회사를 경영하더라도 남과 같이 돈을 벌어야 살 수 있고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는데, 다 놓고 어떻게 돈을 벌어서 가정을 이끌어 나갑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여러분이 한번 뒤바꿔서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기 걸어오실 때에 그냥 서서 걸어오라는 게 아니거든요. 걸어오긴 했는데 발자취를 하나도 짊어지고 온 게 없죠? 아니, 생각해 보세요. 내가 하지 말라는 게 아니거든요. 돈벌이하지 말라는 게 아니잖아요. 여러분이 저 아래에서 걸어오실 때에 발자취를 걸머지고 오셨습니까? 걸어오긴 틀림없이 걸어왔는데 걸어온 사이가 없다. 내가 짊어지고 온 게 아니니까. 벌이는 했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있는데, 이게 우리가 걸어온 거와 똑같아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하시되 자기가 했단 말 하지 마라, 자기가 했다고 생각하지 마라, 모두가 공용으로 했다고 생각하라 이겁니다. 주인공에서 모든 것을 공용으로 한 것이지 자기 개별적으로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동시에 우리가 걸음을 걸어왔는데, 한 발 떼어 놓고 한 발 떼어 놓고 걸어오긴 했는데 걸어온 자취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도 혼자 걸은 게 아닙니다. 여럿이 작용을 해 주기 때문에 여러분이 걸어왔지 아마 위 공장 하나만 그냥 파워가 일어나도 다리도 떼어 놓지 못하고 걸어오지도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같이 한 거니까 내가 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걸림이 없어요. 그게 참 묘하죠. 말로는 할 수 없는 묘한 도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잘 생각해서 알아서 하세요.

칠석과 백종에 대한 신도와 스님의 역할
얼마 전 현대불교신문에서 그토록 활발했던 부산지역 대학생 동아리들이 숫자가 줄어서 전체 인원이 20명밖에 되지 않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렇듯 젊은 세대들에게 불교와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이 전무한 이런 시기에 칠석과 백종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그리고 신도들은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스님들은 어떤 역할을 하셔야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을 구현할 수 있을는지요?
해마다 ‘칠석(七夕)’이 돌아옵니다. 칠석날! 일체 만물만생이 둘이 아닌 고로 종합적으로 여래라고 하는 거와 같이, 칠석이라는 이름은 종합된 이름입니다. 칠석! 그러면 또 칠성은 무엇인가? 그거는 개개인들의 성을 말하는 겁니다. 성을 항상 가지고 있으면서 떼려야 뗄 수 없듯이, 성 자체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성입니다, 그대로. 그래서 칠성은 개개인의 성일 뿐만 아니라 그 이름과 성을 종합해서 칠성이라고 이름을 해 놓은 겁니다. 그래서 북두칠성도, 어떠한 별성도 이 우주 천체가 우리 마음에 직결이 돼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있어서 마음대로 살 수 있게끔 하는 도리를 지금 배우는 겁니다. 여러분이 제가끔 자유스럽게 쓸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도, 자유스럽게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자유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못 쓰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칠석날 촛불을 켠다 이런 것은 우리가 마음의 밝음을 그대로 연결해서 내가 밝아짐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칠석날은 산 사람이 촛불을 밝히듯이 내 마음을 밝혀서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땅에서 싹이 났는데 그 싹은 뿌리를 모르기 때문에 칠석날을 만들어 놓고 누구든지 자기 뿌리와 더불어 마음을 밝혀라 이런 뜻입니다.
백종(百種)은 왜 생긴 건 줄 아십니까? 백종이라는 것은 그 말 그대로 백종입니다. 씨가 아직 땅속에 들어가지 않은 관계상 여러 신도님들은 부모를 위해서나 자기를 위해서나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씨는 다 마찬가집니다. 싹은 났으되 자기의 그 씨를 모르니까 말입니다. 살아 있을 때에 그 씨를 몰랐기 때문에 자기가 싹으로 그냥 있는 줄 알고 허공중에 헤매는 조상들이,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스님네들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신도님들이 밭을 갈고 흙을 고르고 물을 촉촉하게 해 놓으면 스님네들은 씨를 심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 씨가 바로 싹이 되고 할 때에, 또 이런 점이 있습니다.
천도재들 많이 하시죠? 그런데 염불만 해서 천도가 되는 게 아니고 씨가 심어지는 게 아닙니다. 씨를 어디다 심느냐에 따라서 또 결과가 달라지죠. 또 씨를 심었다 하더라도 자기 씨에서 싹이 났다는 거를 그 조상의 영이 스스로 알 수 있게끔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스님네들의 소임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분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도 은연중에 자기 뿌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 자손들이 그렇게 해 놓으면 스스로 자기 마음의 뿌리도 알게 될 것이며 조상들도 마찬가지여서 양면이 다 알게 됨으로써, 즉 말하자면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얘깁니다.
그냥 절에 와서 촛불이나 켜고 향이나 피우고 물이나 떠 놓고 꽃공양이나 하고 “난 절에 갔다 왔어.” “나는 불교를 믿어.” 이렇게 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자기를 알고, 자기로부터 이 세상이 벌어진 걸 알고, 자기로 인해서 공용을 하고 돌아간다는 거를 알아야만이 제대로 불교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기 뿌리와 자기 싹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스님네들은 스님네들대로 물을 촉촉히 주면서 ‘마음을 밝혀서 네 뿌리를 보아야 된다. 네 뿌리가 일체 살림을 하고 가는 것을 알아야 한다. 들어야 한다.’ 이렇게 가르치는 겁니다.
2008-07-21 오전 9:4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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