復次 第二明歷緣對境修止觀者 端身常坐 乃爲入道之勝要 而有累之身 必涉事緣 若隨緣對境而不修習止觀 是則修心有間絶 結業觸處而起 豈得疾與佛法相應 若於一切時中常修定慧方便 當知是人必能通達一切佛法 云何名歷緣修止觀 所言緣者 謂六種緣 一行 二住 三坐 四臥 五作作 六言語 云何名對境修止觀 所言境者 謂六塵境 一眼對色 二耳對聲 三鼻對香 四舌對味 五身對觸 六意對法 行者約此十二事中修止觀故 名爲歷緣對境修止觀也
앞에서 정수행을 크게 두 가지 과목으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첫 번째는 앉아서 하는 수행이었고 두 번째는 인연을 따르면서 그 경계와 마주하고 수행하는 것이었다.
먼저 앉아서 수행하는 것은 거친 마음을 대치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에서부터 정혜를 평등하게 수행하는 것까지 다섯 종류로 분류하였다.
이 다섯 가지 수행 가운데 각각 정수행과 조수행으로서 닦는 지관은 동일하지 않았다. 지를 수행하는 것은 어느 한 곳에 마음을 매달아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인데, 즉 마음을 제어하는 체진지(體眞止)이다.
관 수행으로는 부정관ㆍ자비관ㆍ수식관ㆍ개분별관 등 보조수행이 있다.
정식으로 관 수행하는 것은 삼지삼관을 의미하는데, 지금은 두 번째로 외부조건을 따르면서 그 경계를 마주하고 닦는 지관에 대해 말하겠다. 그러나 그 이치를 밝히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반드시 대의를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만이 수행마다 곳곳에서 부처님과 서로 호응하게 된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목전에 나타나 있는 갖가지 경계가 자기 마음속에서 나타난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이라는 점이다.
마음은 인식의 주체로서 견분이라고 하고, 인식대상경계는 상분이라고 한다. 인식주체로서의 견분은 인식대상으로서의 상분을 인식한다. 여기에서 상분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대상경계로서 물질적인 자연현상계를 말한다.
견분과 상분은 본래 실체가 없고 모두가 자증분(自證分)으로 자체를 삼고 있다. 자증분은 심왕을 말하는 것이고, 견분은 심왕을 따라서 일어나는 심소를 의미한다.
심왕 자증분에서 동시에 일어난 견분과 상분은 그 당체가 바로 공가중이어서 불가사의한 원융삼제의 이치인 것이다.
이를 따라 관찰해보면 두두물물 모두가 오묘한 원융삼제이다. 그 때문에 “산하 대지가 법왕신을 전체로 드러낸 것이며, 나는 새, 달리는 짐승, 물고기, 갑각류까지도 모든 삼매를 보편하게 드러낸다” 고 하였다. 또 “한줄기 풀로 장육금신을 만들고 푸른 대나무와 누런 국화꽃 등이 반야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다.
능엄경에서는 “육근ㆍ육진ㆍ육식이 낱낱이 여래장 묘진여성 아님이 없는 청정본연으로서 법계에 두루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범부의 마음이 성인의 마음이며, 오음경계가 바로 불사의 경계이다. 이를 두고 법화경에서는 “법이 진여법 위치에 안주해서 생멸하는 세간의 모습이 그대로 상주진여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치의 측면에서는 이와 같다고 해도 속제 현실의 측면에선 반드시 점차 수행을 거쳐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인연의 경계를 마주하면서 낱낱이 실제와 같이 닦아야만 바닷물 속에 들어가 모래 수를 세고 끝없이 질펀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탄식을 하는 일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 두 번째로 인연을 따라서 경계와 마주한 상태로 지관을 닦는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연(緣)은 현실 생활 속의 인연이고 경계는 육진경계를 말한다.
항상 몸을 단정히 하고 앉아서 수행하는 것이 도로 깨달아 들어가는 가장 뛰어난 요점이다.
모름지기 알아야 할 것은 육도범부만이 처음 공부할 때 몸을 단정히 하고 고요히 앉아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방제불도 최초에 수행할 땐 역시 단정한 몸으로 올바르게 앉아서 도를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몸이 청정해지기 때문이다.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마음의 인식대상으로 떠오른 경계도 청정하여 마음이 공하고 경계도 고요하여야만 생각 생각 신속한 깨달음의 세계로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앉아서 수행하는 것이 도로 깨달아 들어가는 가장 뛰어난 방법”이라고 하였다.
“번뇌에 쌓여있는 몸은 반드시 현실 생활 속에서 일의 인연을 만나야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항상 단정한 몸으로 좌선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인생이 허깨비 몸을 가지고 세간에 살아가면서 종일토록 의식주 등에 핍박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세간 육진경계 속에서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항상 앉아서 도를 닦고자 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생활 속에서 그때그때 인연을 따라 그 경계를 마주하면서 지관을 닦는다면 부질없는 인생을 보내지 않게 될 것이다.
수행과 세간의 일은 상대적인 두 쪽으로 구분되기 때문에 지관을 수행하면 세간의 일을 하지 못하게 되고, 세간의 일에 몰두하면 또 지관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 마음을 닦는데 있어서 간격과 단락이 있게 되어 부딪치는 일마다 업을 짓게 된다.
청정한 세계에 높이 오르고 신속하게 불퇴전의 경지를 증득하고자 한다면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일체 시간에서 일체 세간의 인연을 따르고 일체 경계를 마주하는 가운데 수시로 간단없이 지관을 수행해야만 한다. 이렇게 항상 마음을 정과 혜에 안정되게 하여 이와 같은 방편으로서 어떤 경계, 어떤 인연을 마주하는 것을 따로 논할 것 없이 자기 마음을 돌이켜 관찰해야만 된다.
경계와 인연은 어느 곳에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떠나가는가를 추구하여 시시로 관찰하고 끝까지 추구해보면 모든 것은 원래 실체라고는 없을 것이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이와 같이 수행하는 사람은 세간에 있어도 육진에 오염되지 않고 뒤섞여 있다 할지라도 세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속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세간의 일이 불법이고, 육진경계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 불사가 된다. 이는 진제와 속제가 하나의 이치로 융합 소통하는 삼매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종일 밥을 먹는다 해도 쌀 한 톨을 씹는 일이 없고 종일 옷을 입는다 해도 실오라기 하나 걸친 일이 없이 오직 도만을 구하는데, 이것도 현실 속에서의 지관수행일 뿐이다.
이와 같이 하게 되면 종일토록 지관수행을 통해서 일심으로 도를 구한다 해도 세간의 일이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아 무애자재한 경지에 오르게 된다. 이를 두고 “산은 그대로 산이고, 물은 역시 물일뿐이다”라고 하였다.
비록 삼라만상이 역력하게 목전에 나타난다 해도 마음속엔 끝내 한 물건도 없어 마음을 일으킨다 해도 따로 안주하는 집착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인연을 따라 경계를 마주한 상태에서 수행하는 지관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지견을 열고 모든 법문을 증득하려 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중앙승가대 교수
cafe.buddhapia.com/community/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