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징 자 칼럼니스트
‘아름다움’의 어원을 ‘앎’ 즉 이미 ‘알고 있는 것’, 그 알고 있는 것 ‘다움’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었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 가운데에서 나온다는 해석일 것이다. 이런 어원해석에 무리가 있다는 결론이 나와 있으니 올바른 해석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그러나 전혀 설득력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것, 낯선 것을 보면 일단 불안감과 함께 거부감을 보인다. 인류가 처음 낯선 다른 인종을 보았을 때 그들을 괴물로 보지 않았던가. 해방 후 한국인이 처음 보게 된 ‘양코배기’가 그렇고 ‘니그로’가 그랬다. 괴물 같았던 그 ‘니그로’도 이젠 세계적으로 ‘Black is Beautiful’로 통하고 있으며 우리도 이에 긍정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 바깥쪽에 존재하는 것을 처음부터 아름답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눈에 보이는 세계뿐 아니라 문명, 문화, 관습, 과학이론, 이데올로기, 의식세계의 변화나 진화 역시 처음은 모두 낯선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모든 낯선 것들은 우리의 경험 속으로 녹아들면서 차츰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한 달 넘어 밤마다 서울 중심가를 가득 메웠던 촛불시위도 우리에게 낯선 것 가운데 하나였다.
사회적 현장에 처음 촛불이 상징성을 드러낸 것은 물론 서구사회다. 그들은 여러 만행의 현장에 촛불을 켜 말없이 만행을 규탄하고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 촛불이 한국에 들어와 보다 강력한 메시지 전달 도구로 진화했다. 세계인의 눈들도 이 경이로운 현상을 보며 놀라워하고 있다. 한국인들도 이를 두고 의견과 견해들이 분분했다. 어떤 이는 혼란하고 불안한 시선으로 또 어떤 이들은 희망적인 시선으로….
변화의 과정에 혼란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난 10년 넘게 ‘변화와 개혁’이라는 구호가 한국사회 중심에 있으면서 혼란 또한 계속되고 있음을 보지 않았는가.
그 혼란의 한 가운데 우리가 앞으로 반드시 그 수준을 높여가야 할 대중(大衆)이라는 존재가 있다. 대부분 이성 아닌 감정이 중심에 놓이게 되는 대중도 성숙의 단계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성숙 이전의 대중은 선동이나 부추김에 휩쓸리기 쉽고 이런저런 슬로건에 도취되어 정신적 좀비 상태가 되기 쉽다. 인류 역사 이래 교묘한 선전 선동이 없었던 시기는 없었으며 그 때마다 대중의 역할은 때로는 현명하게 때로는 어리석은 우중(愚衆)의 역할을 해 왔다. 대중이 시대에 등장한 슬로건을 가려 평가할 줄 알게 된 현명했던 시절의 역사는 발전했고, 좀비 같은 우중이 활개 쳤을 때 역사는 퇴보했다.
대중이 성숙하려면 주어진 슬로건을 스스로 검증할 줄 알아야 한다. 유언비어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다.
문화제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그리고 놀랍게도 감성적인 청소년들이 대거 참가했던 촛불시위를 대중 메시지 전달의 새로운 표현으로, 그리고 이것이 폭력화 되지 않는 이상, 희망적인 시선으로 보아 넘겨야 할 것이다.
문제는 촛불시위에 뒤따른 각 분야 이익 집단들이 참가하는 폭력시위다.
촛불문화제가 시위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한 것이라면 폭력시위는 지난 세기의 낡은 선동으로 한 때 재미 봤던 일부집단의 구태에 다름 아니다.
인도 땅, 2500여 년 전, 코살라 국이 부처님의 나라 카필라로 쳐 들어오고 있을 때 부처님은 저들이 오는 길에 고요히 앉아 그들을 기다렸다. 단지 고요히 앉아있던 부처님 모습으로 하여 전쟁은 두 번이나 미루어졌다.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가 인도에서 싹틀 수 있었던 배경이었을 것이다.
지금 한국 국민의 성숙도로 보아도 폭력시위는 이미 청산되어 있어야 마땅한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