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일아함경> ‘비구니품’에는 “앉아 참선해 선정에 들어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 이는 사마(奢摩) 비구니요”라는 부처님의 평이 나온다. 이 사마 장로니는 불과 1주일만에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경전에 묘사되고 있다.
<장로니게>에 따르면, 사마 장로니는 이전의 부처님들 아래서 공덕을 짓고, 이런 저런 존재로 태어나 해탈을 위한 토대인 공덕을 쌓으며 윤회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시에 꼬삼비(Kosambhi) 성의 부유한 거사집에 태어나 사마라 불리었다. 그녀는 결혼 적령기가 되어 우전왕의 세 명의 왕비 중 하나인 사마와띠(Samavati)의 사랑스러운 친구가 되었고, 그녀가 죽었을 때 삶에 대한 혐오심이 생겨 출가했다.
하지만 그녀는 출가하고도 사마와띠 때문에 생긴 슬픔을 잊을 수가 없어서 성스러운 도(道)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후, 강당에 앉아 아난다 장로의 훈계를 듣고 위빠사나를 확립하여, 그로부터 7일째에 분석적인 통찰과 더불어 아라한과를 성취했다.
그녀는 아라한과를 성취하고 자신의 성취를 통찰하며 이렇게 게송으로 노래했다.
“네 번, 다섯 번 나는 마음의 평온을 성취하지 못하고, 마음에 대해 자재하지 못하여 정사에서 나왔다. 갈애(渴愛)를 완전히 제거한 이래로 나에게 8일째 밤이다. 많은 고통스런 대상 때문에 경계함을 즐기면서, 나는 갈애의 멸함을 성취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이 게송에서 ‘마음의 평온’이란 성스러운 도와 삼매에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 마음에 대해 자재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균형잡힌 정진이 없기 때문에, 수행하는 마음에 자재하지 못하여 그녀는 더욱 더 정진에 힘썼다. 사마 비구니는 아난다 장로의 훈계를 받은 때로부터 밤낮없이 계속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8일째 밤에 균형잡힌 정진을 획득하고, 도의 성취로 번뇌를 소멸했다는 의미이다.
사마 장로니의 구도역정을 보면, 한결같은 위빠사나 수행으로 불과 7일만에 깨달음을 증득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선(禪)에서 자나 깨나 화두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한 일여(一如)의 경지가 되면 1주일안에도 화두가 타파된다고 하는 이치와 같다. 깨달음은 얼마나 오랜 시간 닦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한결같이 수행의 대상에 집중(止)하고 또렷또렷하게 마음챙김 또는 주시(觀)하느냐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가 똘똘 뭉쳐 하나가 될 때 세계관이 뒤집어져 ‘거꾸로 된 꿈같은 생각(顚倒夢想)’에서 깨어나는 일대 전환이 이뤄지는 것이다.
사마 장로니의 수행과정에서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은, ‘갈애(渴愛)를 완전히 제거했다’는 표현이다. 그 어떤 수행법이든 탐진치 삼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참된 깨달음이 아니기에, 탐진치의 원인이 되는 ‘갈애’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필요하다.
느낌(受)이라는 감각을 통해서 일어나는 갈애는 범부가 목마르게 갈구하는 것이다. 육입(六入)이 육경(六境)에 부딪쳐서 생기는 현상으로서 사물, 소리, 냄새, 맛, 접촉, 마음 등 여섯 가지 대상에 대한 갈애가 있다. 이 갈애를 다시 분석하면 세 가지로 나뉜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갈애, 영원히 살고 싶다는 상견(常見)과 결합된 ‘존재에 대한 색계ㆍ무색계의 갈애’,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하는 단견(斷見)과 결합된 ‘비존재에 대한 갈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갈애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특징이 있다. 갈애가 존재하면 집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반면, 갈애가 없으면 집착이 없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한다. 오온의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집착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윤회를 끝내는 출세간으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매우 중시한다. 이는 <금강경>에서 설한 여실지견(如實知見)과 같은 것으로, 선(禪)에서 ‘산은 산, 물은 물’ 있는 그대로의 실상(實相)을 깨달으라는 가르침과 같다.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늘이지 말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려 하지 말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 등 일체의 분별심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보라는 법문이다.
김성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