若於坐禪時 雖爲對治心浮動故修止 而心不住 亦無法利 當試修觀 若於觀中 卽覺心神明 寂然安穩 當知宜觀 卽當用觀安心 是則略說隨便宜修止觀相 但須善約便宜修之 則心神安隱 煩惱患息 證諸法門也
앞에서는 편의를 따라 지 수행하는 측면에서 밝혔으므로 편의를 따라 관 수행하는 것에 대해 밝히겠다.
수행자가 좌선할 때 지 수행을 닦아 들뜨고 혼침에 빠지는 병마를 대치했는데도 여전히 마음이 들뜨고 안주되지 않으면 그 때엔 시험 삼아 관 수행을 닦아야만 한다.
관 수행을 닦을 때에 마음과 정신이 맑고 청정하고 담적하고 안온하다는 것을 자각해서 안다면 관 수행과 서로 호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 수행으로서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데, 이것이 편의를 따라 지관을 수행하는 모습이다.
지관을 수습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훌륭한 솜씨로 편리하고 알맞은 곳에 합치하여 수행을 하면 마음과 정신이 안정되며 번뇌의 환란이 식멸하여 마하반야바라밀문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
四對治定中細心修止觀 所謂行者先用止觀對破亂 亂心旣息 卽得入定 定心細故 覺身空寂 受於快樂 或利便心發 能以細心取於偏邪之理 若不知定心 止息虛 必生貧著 若生貪著 執以爲實 若知虛不實 如愛見二煩惱不起 是爲修止 雖復修止 若心猶著愛見 結業不息 爾時應當修觀 觀於定中細心 若不見定中細心 卽不執著定見 若不執著定見 則愛見煩惱業悉皆滅 是名修觀 此則略說對治定中細心修止觀相 分別止觀方法 同於前 但以破定見微細之失爲異也
네 번째로 오랜 수행을 닦은 사람이 대치하는 것에 대해 밝히고 있다. 처음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병통이 일어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종류의 경계는 가장 미세하여 거친 마음으로는 쉽사리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거칠고 혼란한 망상을 타파하면 들뜨고 요동하는 망상이 소멸된다. 이때에 편안한 마음으로 선정 속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선정 속의 마음은 미세하기만 하다. 따라서 공공적적하여 쾌락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이롭고 편리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여 끝내는 선정가운데서 종횡으로 망상의 헤아림이 일어나 지견이 무더기로 일어나게 된다.
미세한 마음은 선정경계와 서로 호응하기 때문에 미세한 마음으로 산을 생각하면 즉시 산이 보이고, 미세한 마음으로 물을 생각하면 바로 물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사람은 이것을 특수하게 뛰어난 경계로 여기고 편협하고 삿된 이치를 취하여 그것을 실제라고 집착하면서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것이 선정의 마음에 머무는 한 점의 허망한 경계로서 법진의 그림자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 만일 이를 실제라고 고집하면 끝내 사견의 재앙에 떨어지는 것을 면치 못하게 된다.
이 문제를 두고 능엄경에서는 “지견에 아는 마음을 수립하면 그것이 바로 무명의 근본이다”라고 하였고 또 “성인의 마음에 그친다면 훌륭한 경계이겠지만 성인이라는 견해를 일으킨다면 뭇 사견을 받아들이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 같은 경전의 내용은 모두가 좌선하는 사람을 훈계하는 진실한 말씀이므로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만일 이 허망한 경계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명료하게 안다면 탐심을 일으키지 않고, 분별마저 일으키지 않으면 견혹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탐욕의 오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혹의 번뇌가 일어날 곳이 없는 것이다.
견혹과 사혹을 일으키지 않으면 마음이 안정되는데, 이것이 지 수행이다.
그러나 다시 지를 닦아 망상을 정지했다 해도 자기 마음속에 허깨비 경계를 제거하지 못하고 생각 생각 집착심을 일으키면 사혹과 견혹으로 업이 맺히고 사혹과 견혹으로 맺힌 업의 번뇌가 그대로 쉬지 않는다.
수행자가 지 수행을 하기 어렵다면 반드시 관 수행을 해서 관조해야만 한다. 관조를 통해 선정 가운데서 일어나는 미세한 마음을 돌이켜 관찰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신을 밝히고 고요한 가운데 관조를 일으키기를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듯 빈틈없이 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간단없이 은미하게 관조하고 나면 선정 속에서 미세한 마음은 끝내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두고 미세한 마음 가운데서 관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간의 외도들은 약간의 선정 맛을 보면 바로 공부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사견을 일으켜 인과를 무시하며 지관수행을 통해서 대치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실제라고 집착하게 된다. 이는 미혹한 가운데 갑절이나 미혹한 사람이다.
五爲均齊定慧修止觀 行者於坐禪中因修止故 或因修觀 而入禪定 雖得入定 而無觀慧 是爲癡定 不能斷結 或觀慧微少 卽不能發起眞慧 斷諸結使 發諸法門 爾時應當修觀破析 則定慧均等 能斷結使 證諸法門 行者於坐禪時因修觀故 而心豁然開悟 智慧分明 而定心微少 心則動散 如風中燈 照物不了 不能出離生死 爾時應當復修於止 以修止故 則得定心 如密室中燈 卽能破暗 照物分明 是則略說均齊定慧二法修止觀也 行者若能如是於端身正坐之中 善用此五番修止觀意 取捨不失其宜 當知是人善修佛法 能善修故 必於一生不空過也
다섯 번째로 닦는 지관에 대해 말해보자. 번뇌를 끊지 못한 사람은 번뇌의 결사(結使)를 끊어 제거하지 못하지만 모든 법문을 증득한 사람은 즉시 원교ㆍ돈교의 바라밀법문을 증득하게 된다.
관찰하는 지혜가 희미하고 적은 사람은 지 수행만 있고 관 수행이 없으며 선정이 지혜보다 많다. 반대로 선정의 마음이 희미하고 적은 사람은 관 수행만 있고 지 수행이 없어 지혜가 선정보다 많다.
선정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이것은 바짝 마른 선정이며, 지혜만 있고 선정이 없으면 이것 역시 미친 지혜이다. 번뇌 결사를 끊어 제거하고 모든 법문을 증득하려 한다면 지관을 쌍으로 일제히 수행하지 않으면 선정과 지혜가 평등하지 못하다.
수행지에 있어서는 지관이라고 부르고, 깨달음에 있어서는 정혜라고 한다. 지관 이라는 두 가지 법은 새의 두 날개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불리하면 양쪽이 다 손상되고 합하면 쌍으로 아름답다. 따라서 밀실 속의 등불로서 비유하여 지관을 평등하게 닦아야만 생사고해에서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지관을 쌍수하여 정혜가 평등한 사람은 어떠한 경지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한 구절의 아미타불이 여기에 해당된다. 아미타는 번역하면 시간적으로는 무량수불이고, 공간적으로는 무량광불이다. 여기에서 광명은 지혜에 해당되고, 수명은 선정에 해당된다.
광명과 수행이 둘이 아니라면 그것이 바로 선정과 지혜가 평등하고 오묘한 지관이다. 가령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한 구절을 염불할 때에 염불하는 마음과 염불대상으로 떠오른 부처님을 끝내 얻지 못하는 것은 지 수행에 해당되고, 염불하는 마음과 대상으로 떠오른 부처님이 분명하게 떠오른 것은 관 수행에 해당된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역력 분명할 때에 그 자체를 끝내 얻지 못하며, 그 자체를 얻지 못할 때가 원래 역력 분명하여 그 자리가 지에 상즉하고 관에 상즉하며, 관에 상즉하고 지에 상즉하여 지와 관이 평등하고 정혜가 둘이 아닌 무량광수불이 된다는 점이다.
수행자가 훌륭하게 염불법문으로써 지관수행을 하여 일생을 부질없이 보내지 않는다면 현재나 사후에 결정코 성불하게 될 것이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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