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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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拜) 제대로 해야 한다
법현 스님
태고종 교류협력실장

이미 20년 전에 민주화를 이룩했다는 우리나라에서 단체들의 의사표시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불교에서 나온 삭발과 몇 걸음 걸으면서 절하기이다. 삭발은 어리석음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마음 닦는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하는 몸 가다듬기이다. 사명 대사는 “머리를 깎는 것은 어지러운 마음을 잘라내는 것이요, 수염을 기르는 것은 스스로 대장부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자신의 행위를 설명했다. 사명 대사의 이야기를 설명으로 이해할 것인가, 변명으로 오해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그 글을 읽는 이의 마음에 달렸다고 할 것이다. 삭발과 몇 걸음 걸으면서 절하기에 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몇 걸음 걷고 한 번 절하기(○步一拜)’는 절의 원칙이라기보다는 먼 길을 가면서 절을 하다 보니 한 걸음 보다는 세 걸음이, 세 걸음 보다는 열 걸음이 목표지점에 이르는 시간이 빠르기 때문에 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정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없다.
우리나라 시위현장에는 새만금 간척 사업을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움직임이 막 힘을 모으고 있을 때 수경 스님이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하고, 그 곁에 문규현 신부 등 이웃종교의 성직자들이 함께하면서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때 스님과 신부님, 목사님과 교무님들의 묵직한 움직임이 우리의 미래와 관련이 되는 새만금에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게 했다.
그들의 삼보일배는 새만금 간척공사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의사표현의 중요한 방법으로 뜻매김해 추미애씨는 민주당을 살리는데 쓰기도 하는 등 삼보일배는 저항운동의 트렌드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스님과 불자뿐 아니라 좋게 말할 때 이웃종교요, 싸우면서 말할 때는 우상의 종교요, 무너뜨릴 대상이라고도 험하게 말하는 기독교의 목사까지 삭발을 하고 삼보일배를 하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열 걸음 걷고 한 번 절하기(十步一拜)’로 봉정암에 오른 보광 스님이 한 말이 불교계를 울리기 시작했다. 걸어서도 가기 힘든 설악산 봉정암을 열 걸음에 한 번 절하면서 오른 그 열정으로 순수한 신앙행위인 절하기를 정치 선전용이나 데모 수단으로 쓰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 그 의미를 곱씹을 필요가 생긴 것이다.
무릇 절하는 것이야 전 세계인이 나름의 예절 차리는 방법일 따름이다. 그런데 절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인 ‘몸의 다섯 부분 땅에 대기(五體投地)’는 가장 공손한 절하기이다. 본디 절은 해칠 의사가 없음을 표현하는 원시적 인사법이다. 이마와 양 팔꿈치 그리고 두 무릎을 땅에 댐으로써 도저히 다른 존재를 해칠 수 없는 동작이 되어버린 오체투지는 종교적 신성성이 가미되면서 아름다운 뜻과 상징성을 가지게 됐다.
천태종의 수행법 중 하나인 상행삼매(常行三昧)는 마음집중의 상태인 삼매를 걸어 다니면서도 이뤄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절을 하면서 걷는 수행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교리적 배경은 모든 부처님이 보살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오랜 생을 거치면서 존재의 여러 형태를 띠게 되었고, 윤회의 현상으로 살펴보면 삼라만상이, 풀과 나무에 이르기까지 불보살이 아닌 존재가 없다는 데까지 이르게 됐다. 이른 바 초목성불론(草木成佛論)이다. 그래서 부처인 삼라만상에게 절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톨릭)의 천지가 하나님의 몸 아닌 곳이 없다는 것과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다. 교황이 어느 나라를 가든 그 나라의 첫 방문지에 입을 맞추는 의식인 친구(親口)를 하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절이라는 동작을 누구는 하고 누구는 못하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할 때는 본디 불교의 예절인 절이며, 저렇게 할 때는 동작만 절이지 내용은 다른 것이라고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불자는 바람직한 절하기를 가려내고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절하기를 제대로 하는 것인가? 절을 하는 장소가 법당이든 아니든 대상은 법당 안의 불보살님과 같기 때문에 부처님을 대하듯이 공손하게 하여야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얼굴은 평화롭게 그리고 마음은 공손하게 존경의 마음을 가득 담아서 절을 해야 한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절을 하거나, 숫자에 매달려 대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부수효과인 건강을 강조하면서 절하는 방법을 바꿔서 하는 것도 같은 절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하물며 가장 존경하는 분에게 가장 공손한 마음과 몸으로 하는 성스러운 공양법인 절을 온통 저항의 마음과 몸짓을 표현하는데 이용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꼭 절하기를 방법으로 써야 한다면 그 뜻을 헤아려서 평화롭고 공손한 몸과 마음가짐을 미리 가져야 할 것이다.
2008-06-30 오후 5: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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