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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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정수행(正修行) ⑥
如經偈中說
諸法不牢固 常在於念中 已解見空者 一切無想念
경전 게송에서는 “제법은 견고하지 않고 항상 마음속에 있다”라고 하였다. 제법이 인연을 따라서 일어났다면 다시 인연의 소멸을 따라서 없어진다. 따라서 “제법은 견고하지 않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생멸하는 인연은 그 자체가 본래 공이어서 항상 나의 마음 가운데 환하게 나타나 있다. 가령 마음이 없다면 상대적인 경계도 따라서 없어진다. 왜냐하면 마음이 일어나면 제법도 일어나고, 마음이 소멸하면 제법도 소멸하여 일체 모든 법은 자기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능엄경에서도 “제법이 일어난 것은 내 마음 분별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며 일체 인과와 세계 미진까지도 자기 마음을 자체로 해서 이뤄진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라는 점이다.
또 “이미 공의 이치를 이해하고 깨달은 사람은 일체의 망상관념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 두 구절의 문장의미는 매우 심오하기만 하다.
이미 이해했다는 것은 일체 만법이 공으로서 무소유라는 점을 명료하게 깨달았다는 뜻인데, 수행이 이 경지에 이르면 일체 망상 잡념이 없어지며 망상 잡념이 없어지면 그 마음 자체는 자연스럽게 청정해진다.
“공의 이치를 본다고 하는 것은 단지 제법이 공하다는 쪽만 보는 것이 아니고 마하반야는 필경 공의 이치라는 것을 통달한 것이며, 망상의 관념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망상의 관념이 없는 정도일 뿐만 아니라 있어도 실제 있지 않고 없어도 정말로 없지 않다[非有非無]는 관념까지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체 망상의 관념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 “제법은 견고함이 없이 항상 망념가운데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지 수행으로는 체진지에 해당되고 관 수행으로는 공관에 해당되며, 이미 공의 이치를 이해하고 본 사람은 지 수행으로는 방편수연지이며 관 수행으로는 가관에 해당된다. “일체 망상의 관념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지 수행으로는 식이변분별지에 해당되고 관 수행으로는 중도관에 해당된다.
만일 이상에서 열거한 삼지삼관의 이치를 심오하게 참구한다면 다음에 나오는 문장의 내용을 이미 절반 이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二對治心沈浮病修止觀 行者於坐禪時 其心闇塞無記 或時多睡 爾時應當修觀照了 若於坐中 其心浮動輕躁不安 爾時應當修止止之 是則略說對治心沈浮病止觀相 但須善識藥病相對用之 一一不得於對治有乖僻之失
두 번째로 마음이 혼침하고 들뜬 병통을 대치하는 지관수행에 대해 밝히고 있다. 수행자가 고요히 앉아 참선을 할 때 마음이 혼침으로 껌껌해지거나 또는 들뜨고 요동치거나 또는 무기로 멍한 상태가 되는 등 갖가지 병통이 일어나게 된다.
무기(無記)란 뚜렷하게 기억하여 구별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무기에는 개부무기(蓋復無記)와 명료무기(明了無記) 등 두 종류가 있는데, 제팔식은 명료무기이기도 하고 개부무기이기도 하다.
처음 발심한 사람은 수행할 때 마음이 산란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기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도에 마음을 두고 노련하게 수련한 사람은 수행할 때마다 밝은 마음을 덮어버린다는 개부무기가 있기 마련이다.
거친 번뇌인 혼란한 망상은 잠시 잠복된 상태로 있으나 그 가운데서 일종 뚜렷하게 기억하고 구별하는 마음이 없이 애매모호하게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밝아도 밝지 않고, 어두우면서도 어둡지 않는 마음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망념이 일어난다는 것도 역시 지나치게 어둡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 기억이 분명하지 못한 것이다.
수행인은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명료하게 모르고 그것을 도인줄 집착심을 일으키게 된다. 이 때문에 세월이 애매모호한 상태로 흘러가면서 그동안 쌓아왔던 공부를 잃게 되는데, 이는 진실로 애석한 일이다.
무기의 해로움은 혼침과 산란의 병통을 능가한다. 수행자는 고요히 좌선하는 가운데 이 같은 개부무기가 발현할 때는 반드시 관조의 수행을 하면서 그 마음이 항상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
혼침에 빠지지 않았다면 수행경계가 분명하지 못한, 껌껌하게 덮어버리는 무기가 나타나지 않게 해야 한다.
좌선 중에 이상에서 설명했던 무기와 혼침의 병통이 없어졌다 해도 마음이 들뜨고 불안한 것도 역시 좋은 일이 아니다. 마음이 들뜨고 요동치는 것은 마음이 산란한 것이고, 경솔하게 들뜨고 불안한 상태는 몸이 산란한 경우이다.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이 산란하고 안과 밖이 불안하여 마음이 들뜨면 법신에 손해를 끼치고 공덕을 잃게 된다.
수행 중에 들뜬 병이 발동할 때는 반드시 급하게 버리고 지 수행을 통해서 그 마음을 그치게 하여 들뜨고 요동치지 않게 해야만 한다. 이는 지관수행으로 들뜨고 혼침한 병통을 대치하는 모습을 간략하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약과 병이 서로 걸맞게 대치할 줄 알아야만 하는데, 그것을 말해본다면 지 수행으로서 산란을 대치하고 관 수행으로서 혼침을 대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지 수행을 해야 할 경우는 지를 닦고, 관 수행이 마땅하다면 관을 닦는 경우이다.
요컨대 병과 약을 알아서 병에 따라서 약을 투여해야만 하며, 혼란하게 약을 투여해서 반대로 병환을 증가시켜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러므로 “혼란하고 치우치게 수행하는 잘못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三隨便宜修止觀 行者於坐禪時 雖爲對治心沈 故修於觀照 而心不明淨 亦無法利 爾時當試修止止之 若於止時 卽覺身心安靜 當知宜止 卽應用止安心
세 번째로 편의를 따라서 지관을 닦는 문제를 밝히기로 한다.
편의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편의를 따라서 지 수행을 하는데도 구애받지 않고 관 수행을 하는데도 국한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따라서 수행하면서 오직 수행의 적당함만을 추구하여 이익을 얻는 것으로서 요점을 삼는다.
비록 마음의 들뜬 병통을 대치하기 위해 지 수행을 하여 대치하였어도 마음이 그대로 밝고 청정하지 못하면 역시 불법의 이익을 얻지 못한다.
이러한 때는 시험삼아 관 수행을 통해서 망상을 그쳐야 한다. 시험을 해본 뒤에 그 상황이 자기 마음의 편의와 서로 호응하면 그 편의를 의지해서 수행하는 것도 괜찮다.
좌선을 할 때 잠이 오는 마구니가 많다. 이는 본래 관 수행을 통해서 대치해야만 하지만 단지 관 수행을 오랫동안 해도 이익을 얻지 못하면 다시 지 수행을 의지해서 수마를 조복 받는 것도 무방하다.
이렇게 하기를 오랫동안 하다보면 수마의 병통이 자연스레 소멸하게 된다. 이를 두고 독으로서 독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면 이는 지 수행으로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공부가 된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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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30 오후 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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