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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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정수행(正修行) ⑤
慈心觀 對治瞋 界分別觀 對治著我 數息觀 對治多尋思等 此不分別也
다음으로 진심의 망념이 많은 사람은 반드시 자비의 마음으로서 관찰하고 대치해야만 한다.
수행인이 좌선으로 관법을 행할 때 마음속에서 갖가지 진심과 원한심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는 과거에 내 감정을 위배한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는 진심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은 채 아무런 까닭 없이 번뇌를 일으키는 진심도 있고, 또는 과거에 어떤 사람이 나를 괴롭히고, 내 친구를 핍박하고, 나와 원한이 맺힌 집안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칭찬했던 일을 되새기면서 이를 따라서 진심이 일어난다. 또는 자기는 옳고 타인은 틀렸다는 생각에서 시비 논쟁의 진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내 감정을 위배하는 경계에서 일으키는 갖가지 진심과 원한심은 일체 중생이 내 과거에 부모나 친척 등이었다고 상상으로 관찰해야만 한다. 나의 부모와 친척이었다면 항상 그들을 안온하고 즐겁게 해주어야만 되며, 진심의 번뇌를 일으켜서는 안된다. 이것이 자비의 마음으로 관찰하여 불처럼 일어나는 진심을 대치하는 수행이다.
그 다음으로 나에 대한 집착의 망념이 많으면 내 몸의 한계를 분별하는 관법으로서 대치해야만 된다. 여기에서 말한 분별이란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나의 몸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근(根) 식(識) 등 칠대(七大)가 임시로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칠대는 각자마다 한계가 있어 그 성질이 동일하지 않다. 지대는 견고한 성질이고, 수대는 젖는 성질이며, 화대는 뜨거운 성질이고, 풍대는 움직이는 성질이며, 그 나머지 공과 육근과 육식은 이에 준해서 유추하면 된다.
자신에 대한 집착이 지중한 사람은 반드시 나의 본모습을 미세하게 관찰해야만 된다. 즉 지대가 나일까, 수대가 나일까.
만일 지대가 나라고 한다면 화대와 수대는 내가 아니며, 화대가 나라고 한다면 지대와 풍대는 내가 아니며, 또 칠대가 모두 나라고 한다면 일곱 개의 생명으로 나눠지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본래 하나가 아닌 것이어서 한량없이 많은 몸이 있게 된다.
이렇게 관찰하면 육근과 육진과 육식의 한계에서 나의 실제 모습을 찾으려 해도 끝내 찾지 못하며, 찾지 못한 것이 바로 내가 없는 곳이다.
중생은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내가 없는 가운데 내가 있다고 망상으로 집착한다. 사대가 자신의 몸이라고 망상으로 인식하고, 육진의 그림자를 분별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마음의 모습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실제로 오온은 본래 공이며, 사대도 내가 아니다. 이와 같이 분별하고 추구하면 나라고 집착하는 망념이 소멸하게 된다.
다음으로 사려심 때문에 산란한 마음이 자주 일어나는 사람은 수식관(數息觀)으로 대치해야만 한다.
수식관은 코로 호흡하는 횟수를 세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콧구멍에서 미미하게 있는 듯 없는 듯 내쉬는 호흡을 하나부터 열까지 세고, 열부터 다시 하나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또 호흡을 들이마실 땐 내쉬는 호흡을 세지 않는다. 면면밀밀하게 마음은 호흡을 의지하고, 호흡은 마음을 의지하여 따로 다른 인연이 없이 오직 호흡만을 따라서 그 횟수를 분명하게 기억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한다면 내 마음속에서 추구하는 사려가 남김없이 소멸하게 된다. 따라서 “분별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였다.
二者正觀 觀諸法無相 是因緣所生 因緣無性 卽是實相 先了所觀之境 一切皆空 能觀之心自然不起 前後之文 多談此理 請自詳之
이상에서 보조수행으로서의 관법인 조관(助觀)은 끝내고 지금부터는 수행의 주체인 정관(正觀)에 대해 밝히기로 한다.
일체 제법은 독자적으로 일어나지도 않고, 대상에서도 일어나지도 않으며, 자체와 대상이 공동으로 화합해서 일어나지도 않고, 아무런 원인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제법 그 자체는 바로 공[卽空]이고, 바로 가[卽假]이며, 바로 중[卽中]이다. 이를 두고 불가사의하게 원융한 일념삼제의 이치[一念三諦理]라고 하는데, 이와 같이 관찰해야만 한다.
삼관 가운데서 가장 닦기 쉽지 않은 것은 공관이다. 왜냐하면 범부중생은 무시이래로 무명번뇌에 가려 만법이 실제 있다고 집착하고 있어 공을 설해주어도 쉽게 공의 경지를 체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제법은 무상의 이치라는 것을 통달해야만 하는데, 무상은 바로 공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제법이 무상이라는 이치를 명료하게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을 예를 들어서 비교를 해보자.
가령 여기에 아름다운 꽃이 있다고 하자. 사람들이 꽃을 보고 좋아하고 기뻐하지만 꽃은 며칠 지나면 시들고 잎도 떨어져 버린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꽃은 끝내 소멸되기 때문에 원래 그 자체가 무상이라는 점이다.
꽃이 진실한 모습이 있었다면 변화하고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다. 꽃의 모습이 이와 같았을 때 일체 제법의 모습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제법은 무상한 이치라고 관찰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근기가 둔한 사람을 가르치는 말인데, 그 이유는 모든 법이 파괴되기를 기다린 이후에야 제법이 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근기가 영리한 사람이라면 제법 그 자체가 바로 공이어서 파괴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도 공이라는 이치를 통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법은 인연을 따라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일체가 이미 인연을 따라서 일어났다면 그 인연으로 일어난 모습은 있다 해도 실체가 없으며, 실체 없는 성품이 바로 제법의 실제 이치로서 오묘한 성품인 것이다.
실상이란 무상이다. 무상은 인연을 따라서 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를 제법의 실제 이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금강경에서는 “일체 존재해있는 차별적인 모습은 그 모두가 허망한 인연의 모습이다. 그 인연의 모습으로 떠오른 것은 있다 해도 실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본다면 그 즉시 제법의 실제 이치를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만일 이와 같이 여실하게 관찰대상 경계로서의 제법은 모두가 공의 이치라고 통달하게 되면 그 이치를 관찰하는 주관적인 마음까지도 자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 다시 말하면 마음은 본래 일어남이 없는데, 인식대상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며 대상경계가 없다면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마음까지도 역시 동시적으로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관의 이치는 앞에서 이미 설명을 끝냈으므로 거듭 덧붙이지 않겠다. 여러분 스스로 자세히 살펴보고 참구하기 바란다.
■중앙승가대 교수
cafe.buddhapia.com/community/song
2008-06-23 오후 1:5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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