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재세시에 급고독 장자의 집 하녀의 딸로 태어난 뿐나, 즉 ‘(아만이) 가득한 이’라고 불린 여종이 있었다.
어느 날 뿐나는 밤늦도록 주인집 쌀 방아를 찧고 있었다. 방아를 찧던 그녀는 너무 피곤하여 잠시 쉬고 있던 중, 답바 스님이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을 들은 뒤 여러 비구스님들을 인도하여 자기들의 수도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때 뿐나는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비구스님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밤늦게 다니실까? 나는 가난한 신세라 이처럼 밤늦도록 일을 해야 한다지만, 저렇게 의젓한 분들이 밤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녀야 하는 이유를 나는 통 모르겠어.”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 본 그녀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어떤 스님이 병이 났거나 뱀에 물려 돌아가신 거겠지.’
다음 날 뿐나는 싸래기 쌀을 물에 담가 불린 다음 떡을 만들었다. 그런 뒤 떡을 가지고 강가로 나가다가 부처님께서 탁발을 다니시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자기 떡을 부처님께 공양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보잘 것 없는 거친 떡을 잡수실지 걱정이 되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그녀의 생각을 아시고 다가와 떡을 공양 받으셨다. 그리고는 아난다에게 그 자리에 돗자리를 깔라 이르신 뒤 자리에 앉아 거친 떡을 잡수셨다. 공양이 끝난 뒤 부처님께서는 뿐나가 간밤에 의심했던 문제에 대해 이런 말씀으로 의심을 풀어주셨다.
“뿐나야, 너는 가난하여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열심히 일해야 하거니와, 여래의 비구 제자들도 밤에 잠자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마음을 집중하여 경각심을 갖고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항상 깨어 있어 살펴보는 사람들/ 밤이나 낮이나 계정혜(戒定慧)를 배우고/ 열반을 향하여 굳게 정진하면/ 마음의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
이 게송 끝에 여종 뿐나는 거기에 선 채로 수다원과(須陀洹果) 즉, 진리에 대한 그릇된 견해나 의심 따위를 버리고 성자의 길에 들어서는 첫 번째 과위(果位)를 성취했다.
뿐나는 뒷날 물에 의한 청정을 지향하는 바라문을 진리로 인도하고, 마침내 급고독 장자에게도 존경을 받아 자유민의 상태가 됨으로써 출가를 허락받았다. 그 후 그녀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머지않아 통찰력을 얻고 아라한과를 성취했다. 신통력을 얻고 마음의 흐름을 아는 지혜에 자재했던 뿐나 장로니는 훗날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을 <장로니게>에 남겼다.
“위대한 성자시여, 저는 전생을 알았고 천상의 눈은 청정해졌으며, 모든 번뇌는 단멸되었고 이제 다시 존재함이 없습니다. 의미와 법, 언어해석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이해에 더러움이 없고 청정한 지혜는 부처님 때문에 생겼습니다.”
<법구경>과 <장로니게>에 따르면, 뿐나는 지극히 평범한 한 마디 법문에, 일찍이 참선 한번 한 적 없는 여자 종으로서 생사해탈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이처럼 말끝에 단박 깨닫는 언하대오(言下大悟)의 사례는 초기불교에서 무수하게 나타난다. <법구경 주석서(Dhammapada-Commentary)>를 근거로 한 통계에 따르면 부처님 재세시에 최소 8353인의 아라한이 출현했으며, 2612명의 성자들이 법문 즉시 깨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마 선사 이래 무수한 역대 조사들이 말끝에 단박 깨닫는 언하대오가 가능했던 것이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증거다. 물론 문답을 통한 이러한 ‘단박 깨침(頓悟)’은 ‘나’라는 아집(我執)을 버리고 겸허히 불법과 수행법을 대신심으로 받아 지니는 하심과 텅 빈 마음을 전제로 한다. ‘도(道)의 근본이자 공덕의 어머니(信爲道元功德母)’인 바른 신심 없이는 그 어떤 수행법으로도 깨달을 리가 만무함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아직도 이런 돈오 법문을 믿지 못하는 수행자들이 있다면 돈오선의 주창자인 육조혜능 스님의 법문에 귀 기울여 보자. “선지식들아, 법(法)에는 단박에 깨침(頓)과 점차로 깨침(漸)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육조단경) 김성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