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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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삼보가 있는 것이니 나로부터 삼보에 귀의하라!
초발심의 경지가 어찌 바른 깨달음인지
초발심(初發心)이 곧 바른 깨달음이란 말이 있습니다. 제 자신도 부처님 가르침에 입문해서 수행해 온 지 오래지만 아직도 캄캄하기만 한데 초발심에 깨달을 수 있다니요. 어찌 초발심의 경지를 바른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그 말씀의 진정한 뜻을 일러 주십시오.
우리가 삼천 년 후나 삼천 년 전이나 그냥 오늘인 것입니다. 마음은 체가 없고 붙잡을 수도 없고 빛깔도 없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실히 믿고 진실히 놓는 작업을 할 때, 또는 진실히 구하고 물러서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자기가 아닌 자기와의 만남의 소식을 얻을 수 있는 거고, 한생각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은 그렇지 못합니다. 바깥으로 끄달리고 모든 행도 말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초발심에 깨치지 못하는 것이지, 초발심이 십 년이 갔든 이십 년이 갔든 하루가 갔든 일 초가 갔든 둘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초발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깨달음이란 한 찰나니깐.
그러니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동시에 뜻과 더불어 같이 진실하게 물러서지 않고 믿고 놓을 수 있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십 년이 갔다 하더라도 깨달음에 있어서는 십 년과 일 초가 맞먹습니다. 그러니 초발심이죠. 그러니 깨닫지 못하고 깨닫고 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겁니다. 마음먹고 행하고 말하고 뜻하고 모든 것이 결부돼야 되는 것이지, 이 컵 하나라도 그것이 빠지면 안 되죠. 결부됐으니깐 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생산이 된 겁니다. 지수화풍 그 자체가 결부가 됐으니까 이것이 나온 것입니다.
바로 이 컵도 흙과 물로 개어서 바람에 말려서 불에 굽는 겁니다. 그렇게 인연에 따라서 한데 결부가 돼서 작용이 되기 때문에 컵 하나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도 그냥 겉벌로 볼 게 아니라 우주의 개공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이 빈 그릇이 나와서만이 아니라 바로 이 컵에다가 물을 담아서 먹어야 이 컵이 컵이라는 빛이 있는 거지 뭐, 담아 먹을 수 없다면 아무 빛이 나지 않는 거죠. 그러니깐 물 담아 먹고 음료수 담아 먹고, 이렇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우주개공이 이 컵에도 있느니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초발심에 삼천 년이 갔다 하더라도 행하지 못한다면 초발심도 없는 것이고 행한다면 일 초도 안된다 이 소리죠.

잡념이 많은 학생들을 위해서
저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에는 지원에 가서 예불에도 참석하고 설법도 듣고 그러는데, 가끔 설법이 잘 들어오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것을 보고 잡념이라고 할지 망념이라고 할지…. 또 제가 애들을 가르치고 있는 도중에도 학생들이 잡념 즉,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같은 처지의 도반이나 학교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잡념이 많은 학생들이 일념 정진할 수 있도록 스님의 원력을 주십사 하고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건 선생님께서 그렇게 집중해서 모든 애들한테 에너지를 베푸세요. 그러면 아마 70%, 80%가 넘게 될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귀에 저절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물리를 틔워 주면 그냥 됩니다. 그것은 자기네들이 실천해 보고, 내가 이렇게 해서 저 애들이 얼마만큼 더 물리가 터졌나 하는 거를 가만히 지켜보시면 알 겁니다. 그러니까 댁에서 해 보고 댁에서 지켜보고 댁에서 느껴야지, 그게 바로 내 밥인 것이지, 내가 먹고 맛을 아는 것이지, 내가 아무리 해 줘도 그걸 댁에서 느끼지 못하고 맛을 모른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안 그럴까요? 그렇게 해 보세요. 작으나 크나 다요.
어떤 사람은 나한테 ‘스님은 용법(用法)만 가르친다’ 이러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 말하는 게 우습잖아요. 자기가 먹고 자고 깨고 하는 게 그대로 용인데, 그대로 여여한 우리들의 법인데 아, 용 빼놓고 송장이 되란 얘깁니까? 마음이 있음으로써 용이 있고, 생명이 있음으로써 이렇게 용이 있는 거지 아, 사람이 눈 하나만 치켜 떠도 용인데, 그거 빼놓고 저거 빼놓고 뭐 남는 게 있어서 송장 법을 가르칩니까? 그런 사람도 있습디다마는 용이다, 용이 아니다를 떠나서 생활 자체가 그대로 바로 부처님이 가르친 법입니다.
그러니까 실천해 보십시오. 내가 얼마만큼 진전이 되고 물리가 터져서 지혜롭게 학생들을 지금 가르치고 있을까? 내가 얼마나 지혜롭게 내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지혜롭게 무심으로써 무전여행을 하면서 우주의 법칙 그대로 진출할 수 있을까? 내 마음으로써 그대로 모든 국민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얼마만큼 무심법으로서 그 진실을 행할까 하는 거 말입니다.

불법승 삼보에 대해서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지 부처님께 지극하게 삼 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과연 내가 어디에다 절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러면서 ‘아, 불법승 삼보님께 하지!’라고 생각이 들지만 그것이 마음에 와 닿지가 않습니다. 불법승 삼보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디에다 절을 해야 하는지요?
여러분이 요만큼 알면 나도 요만큼밖에 모릅니다. 여러분이 이만큼 알면 나도 이만큼 알게 되고요, 여러분이 바다와 같다면 나도 바다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삼보에 귀의한다는 거, 그 움죽거리지 않는 힘을 배출해 줄 수 있는 그 자(自)의 근본에서 마음을 내는 것이 법이니까요. 마음을 내는 것이 법입니다. 자성삼보라는 것이 불법승, 그리고 승은 움죽거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에 따라서 움죽거린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자기 자성한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국은 육신이 있기 때문에 육바라밀이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삼보가 있고 삼심이 있어서, 삼심이 일심이 되고 이러는 거예요. 과거에도 내가 살았고 현재에도 내가 살고 미래에도 내가 살 거예요. 그러니 이것을 밤과 낮에 비유해서, 밤이면 저승이고 과거, 낮이면 이승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저승과 이승이 어떻게 둘로 나눠졌을까? 밤에 잠을 자야 낮에 일을 하고, 그러니까 밤이 오는 것이 바로 과거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낮이 오는 것이 현실이에요. 그래서 밤과 낮이 한데 합쳐져야만이 생과 사도 같이 구르면서 이게 진리의 끈이 되죠. 진리의 끈이 됨으로써 그냥 끝없이 돌아가듯 말이에요.
그래서 조금 아까 무엇을 어떻게 했든 무엇을 들었든, 모두 벌써 과거로 돼 버렸어요. 과거가 돼 버렸다고요. 그런데 과거로 생각을 하지 말고 내가 현실에 있으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과거는 벌써 없어졌지요. 그러니 과거도 현실이요 미래도 현실이란 말입니다. 현실의 내 한마음이 바로 삼심이요, 그것이 한데 합치면 삼보가 되고,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자기 전체 한마음으로써 더불어 같이 한가운데 삼보를 중시한다 이런 뜻입니다.
내가 없으니까 상대가 없죠. 내가 없다면 삼보도 없고, 상대도 없고, 세상도 없고 모두 없는 거죠. 그러니까 나로부터 삼보에 귀의하라, 나로부터. 나에게 삼보가 있는 것이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가만히 있다면,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다면 그때 부처인 것입니다.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리지만, 생각을 하고 움죽거렸다 하면 법신이자 화신이고, 화신이자 보신이에요. 보신이자 또 금방 화해서 응신이 돼 버리죠. 그래서 예전 공부한 선지식들께서 ‘그대로 여여하다.’ 이런 소리를 하시죠. 그러니까 이거니 저거니 이거니 저거니 할 거 없이 그대로, 생활 자체에 그대로 살아나가고 그대로 굴러 돌아가는 것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이고 생활이 그냥 여여하다 이런 겁니다.
여러분은 생각을 깊이 하셔야 합니다. 부처님은 자기 주인공 속에, 즉 말하자면 우주 섭류의 소용돌이, 법계의 소용돌이, 그 소용돌이 속에 나와 더불어 같이 돌아가고 있거든요. 한마음 속에 말입니다. 주인공이라는 것이 그것이거든요. 그러니 부처님을 믿고 다니더라도 둘 아니게 볼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법당에 오면 부처님 몸과 내 몸이 둘이 아니요, 부처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요, 부처님 생명과 내 생명이 둘이 아니니 어찌 일체 만물의 생명과 나의 생명이 다르며, 법이 다르며, 움죽거리는 게 다르겠습니까? 그래서 불과 법이 둘이 아닐지언댄 승보도 그러하니라 했습니다. 이건 그냥 따라다니는 껍데기입니다. 그런 껍데기 차와 같은 거죠. 운전수가 가자는 대로 가는 차.
그러나 그 껍데기도 소용없는 게 아니죠. 그건 화두예요!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 화두죠! 내가 없었더라면 우주가 있는지도 몰랐고 이 세상이 있는지도 몰랐고 상대가 있는지도 몰랐다 이거죠. 그런데 내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지수화풍의 근원이 있었기 때문에 생명체들이 나왔죠. 그렇듯이 지수화풍이 있기 때문에 일체, 물질적인 이 모든 것이 지수화풍이 모여서 움죽거리고 있거든요. 우리는 이 지수화풍이, 껍데기가 움죽거리는 것보다도 유(有)의 법과 무(無)의 법이 같이 움죽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겁니다. 마음 따로 있고 육체 따로 움죽거리고 이러는 게 아니죠. 마음내는 것 따로 있고 움죽거리는 육체 따로 있고, 마음내는 놈 따로 있고 마음내기 이전 놈이 따로 있고 그런 것도 아니고요. 그놈이 다 하는 거죠.
우리가 생활을 벗어나서 부처님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있기 이전에 여러분이 있고 여러분의 생활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 생명이 내 생명이요,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이요, 부처님 몸이 내 몸이니 둘이 아닌 까닭에 아무렇게나 아무 데나 놓고 절하고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고 세상과 나와 둘이 아닌 까닭에 일정례를 올리더라도 마음을 둥글려서 내가 정성스럽게 할 수 있다면, 어디다가 절을 해도 바로 자기 주인공에 자기가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편안한 경계에 대해서
주인공을 믿고 주인공에 모든 걸 놓아 가면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간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 자신이 어느새 편안한 경계(境界)를 구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믿고 놓는 마음 가운데 편안한 경계를 좋아하는 마음이 깃든다면 잘못 가고 있는지요.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편안하면 이 육체 안에 있는 중생들도 편안하기 때문이죠. 모두가 한데 뭉쳐서 놓을 수 있는, 주인공에다 놓을 수 있는 작업이 물러서지 않는 진실이라면 바로 그 마음은 한마음으로 돌아가니깐 편안함이 오고 끄달리지 않는 법이에요.
그럼으로써 이 우주 천체는 근본 하나로 돌아가지만, 평등하게 돌아가지만 용도에 따라서 끌어 쓰는 정도는 다 달라요. 그러니까 평등하게 둘로 보지 말고 주인공에다 모두 일임해서 놨을 때, 그리고 자기한테 용도에 따라서 다가오는 그 모두를 건건이 거기에다가 놓고 거기서만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진실하게 가질 때, 하늘이 무너져도 거기다가만이 놓을 수 있을 때, 죽고 사는 것을 탓하지 않을 때, 그런 때에 비로소 편안하면서도 그 모두를 커버할 수 있고 자유스럽운 대권을 얻을 수가 있다. 그것이 바로 항상 얘기하던 거와 같이 진실하게, 진실하게 믿고 진실하게 놓고 진실하게 행하고, 진실하고 부드럽게 뜻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마음 태세가 된다면 진실하게 구함도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하게 깨닫는 소식도 얻을 것이다라는 얘기예요.
그러니 그 편안함, 편안함도 여러 가지겠지마는 그냥 무조건 ‘옛다, 봐라! 죽기 아니면 살기지.’ 이러고 놓는 거하고, 믿고 놓고 편안한 것하고 다른 거죠. 항상 얘기했듯이 모두가 내 스승 아님이 하나도 없다고 했을 때 진실로 그렇게 감응이 된다면 나 아님이, 내 아픔 아님이 하나도 없어요. 그랬을 때에 그 한마음이라는 것은, 그거는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뜻이니까 그대로 거기에 맡기고 믿고 진실되게 가야 하는데, 믿지 않거나 설 믿는다면, 잘했을 때 ‘아! 감사하다’ 이렇게 했더라도 다음에 가서 안되면 아, 이건 또 도루묵이 돼 버려요, 안되니까.
이거 봐요.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에요. 그러니 선업 악업을 다 놔라 이겁니다. 만약에 회사를 경영한다면 높이 놓을 사람은 높이 놓고, 얕게 놓을 사람은 얕게 놔야 일이 되지, 그 작업을 못 한대서야 어떻게 회사를 경영할 수 있겠소.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부처님 법에도 악업 선업을 다 놓고 배워야 돼요. 그거를 비유해서 한번 얘기하죠.
어떤 사람이 승진을 시켜 달라고 아주 정성을 지극하게 들였어요. 그것도 뭐 이루 말할 수 없이 지극하게 들였어요. 그런데 그만 뒷걸음질이 돼버렸어요. 그러고는 남이 그 자리에 와 가지고 월남을 가게 됐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은 월남에 가서 그만 전사를 했어요. 그렇게 되고 난 뒤에 다시금 승진이 되니까 어떻게 됐겠어요? 처음에 진실히 했는데 후퇴가 됐으니 어떻게 됐겠소? 그 믿음이라는 게 산산조각이 났겠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뜻이 있으니깐 후퇴가 됐겠지요.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악업 선업을 다 놔라 하는 것은,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다 하는 것인데 어떠한 까닭이냐?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이거죠. 자유인의 대권을 얻었다면 불리하면 내려놓을 수도 있고 이익하면 올려놓을 수도 있어야 되는 거지, 이익하거나 해롭거나 올려놓을 줄만 안다면 그건 망하고 마는 겁니다. 전쟁에 나가서 싸울 때도, 후퇴할 때는 후퇴하고 전진할 때는 전진해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능수능란한 지혜가 없다면 어떻게 지휘를 맡아 가지고 일할 수 있겠어요? 그와 똑같은 겁니다.
부처님께서 자유자재한다는 뜻은 아픔을 똑같이 느끼면서 모든 거를 이익하게 이끌어 주는 것이지만, 얼른 쉽게 말해서 아주 권력을 남용하고 모든 일에 부정으로 가고 그러면 그냥 부정으로 가게끔 해 주는 겁니다. 자기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서 행해 봐야 ‘아이쿠!’ 하고 그때 가서야 아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려놓을 줄도 알고 올려놓을 줄도 알아야 자유자재의 대권을 얻었다 할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다 잘 추려서 듣기를 바랍니다.

물의 신에 대해서
얼마 전에 강에 가서 제사를 지내야 저의 앞길이 열린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보면 수없이 많은 자연의 신들이 있고 우리나라에도 예로부터 강과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복과 안녕을 빌고 있듯이, 저는 강이라고 하는 것을 대자연, 그러니까 저의 마음의 고향에다가 하라는 걸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물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인간의 삶이 바뀌고 재물과 복이 들어오고 이득이 생기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예전에는 열나흗날 저녁, 보름날 아침 사람들이 오곡 잡곡밥을 해 가지고 강가에 나와서 제를 지내는 걸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지내며 또 누가 동조해서 같이 거들어 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가서 지내면서, 또 스님네들이 그것을 호응을 해 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자기 주인의 은혜를 모르고, 여러분을 형성시킨 그 장본인인 주인의 은혜를 모르고, 이날까지 끌고 나온 그 은혜를 모르고, 웃게 하고 즐겁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움죽거리게 하고, 모든 매사 거를, 전체 그 만법을 알게 해 주신 그 은혜를 모르고 배반하고 또는 무시하고 그렇게 하고서 강가에 나와서 강신, 즉 말하자면 물신한테 제사를 지내는 이런 경향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러면 스님네들도 그걸 동조해서 그것을 지내 주곤 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어떠한 불화가 일어나느냐? 각자 자기 주인이 화해서 자기 마음들을 그렇게 쓰고 행동들을 그렇게 하니까, 자기 마음이 오방신장이 돼 가지고선 그 눈을 부릅뜨고 몽둥이로 치고 해도 모릅니다. 철퇴를 맞아도 어디서 맞는지도 모릅니다. 칼로 자르고, 에는 듯하게 잘라도 그것을 어디서 그러는지도 분간을 못합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서 그 만법을, 현재의 만법을 어떻게 다스려 나가는가. 유식으로서 만법을 다스려 나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유식으로서 만법을 다스려 나간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꾸 문이 막히는 겁니다. 우리가 나의 주인, 근본을 감사히 생각하고 믿고 물러서지 않고 거기에서 안으로 굴려서 해 나갈 수 있는 그러한 만법의 조절이 된다면, 바로 내 마음으로부터 나를 조절하는 만법의 근원이 돼서 그게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선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강제(江際)를 지내는 거뿐만 아니라 모든 이치에 어긋나게끔 모두 하니 동그란 그릇에 네모난 뚜껑을 덮는 거와 한가지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어긋나고 사는 게 어긋나고 불화가 생기고 가난하고, 가난이 줄줄줄줄 붙어서 돌아가면서 화근이 붙어 돌아가고, 이러한 문제들이 한두 건입니까? 한생각이 가난한데 어찌 행을 가난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저지르는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니기 때문에 일들이 벌어지는 것도 한두 건이 아닙니다. 그런다면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그걸 동조하는 사람이나 또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나 똑같은 바로 넝마 즉, 걸레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참으로 슬픔도 많고 외로움도 많고 고독함도 많고 허망한 일도 많은데, 그 모두가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모른다면, 어디로 가 도는지 그걸 모른다면 우리가 인간으로서 어디 인간을 인간으로 보겠습니까? 삼계 오온이 한 점의 마음이거늘 그 근원으로 돌아서 우리가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한 점의 마음이 모든 것을, 만법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리고 믿고 배신하지 말고, 자기가 자기를 배신해서 무엇이 이득이 있으며, 자기가 자기를 못 믿어서 무슨 이득이 있으며, 자기가 자기를, 은혜를 몰라서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2008-06-16 오후 2: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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