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者制心止 所謂隨心所起 卽便制之 不令馳散 故經云 此五根者 心爲其主 是故汝等當好止心 此二種皆是事相 不須分別
두 번째는 마음을 제어하는 ‘지’ 수행인데, 마음을 놓아버림으로써 제어하는 공부이다. 이것은 망념을 조복받기 때문에 앞에서 말했던 마음을 한 경계에 묶어놓는 공부와는 동일하지 않다.
마음을 제어하는 공부는 자기 마음을 은미하게 관조하여 마음이 일어나는 곳을 따라서 관찰하는 것으로, 그 일어난 곳을 살피는 것을 말한다.
가령 탐욕이 일어날 경우에는 바로 탐욕을 놓아버리고, 진심이 일어나면 진심을 놓아버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날 때도 역시 놓아버려야 한다. 어떤 생각이든 일어났다 하면 그 일어난 마음을 놓아버림으로써 망상을 조복받아 마음이 밖으로 치구하고 흩어지지 않게 하는 공부이다.
의근은 육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작용을 하는데, 이는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분명하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탐진치를 일으키고 도적질과 음행을 하는 모든 일들이 육식을 따라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다.
대체로 마음이 움직이면 경계도 따라서 움직인다. 따라서 여러분이 도를 닦으려 한다면 반드시 망상을 정지하여 산란한 마음이 외부경계로 치구함이 없도록 해야만 한다.
이상의 두 가지 ‘지’ 수행은 모두가 겉으로 드러난 사상(事相)공부이기 때문에 가장 쉽고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겠다.
三者體眞止 所謂隨心所念一切諸法 悉知從因緣生 無有自性 則心不取 若心不取 則妄念心息 故名爲止 如經中說云
一切諸法中 因緣空無主 息心達本源 故號爲沙門
여기에서는 본성 이치의 측면에서 이야기를 하였기 때문에 그 의미가 점점 깊고 은미하여 앞에서 나왔던 사상공부처럼 드러나게 알 수는 없다. 따라서 근본이치 자체에서 관찰하여야만 한다. 즉 마음이 생각하는 일체 모든 법은 인연을 따라서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법은 크게 요약하면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의보라는 것은 산하대지와 초목 총림이고, 정보는 오음색신을 말한다.
의보와 정보, 이 두 가지 법은 인연화합을 따라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 두 가지 법이 인연을 따라서 일어났다면 다시 인연을 따라서 소멸하는데,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소멸하는 허깨비 망상을 제법이라고 칭한다.
그렇다면 인연으로 일어난 것은 있다 해도 실체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생멸거래를 구하려 해도 끝내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은 본래 생멸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심성에서 인연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허망한 모습이 없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일어남이 있으면 소멸함이 있고, 흘러옴이 있으면 떠나감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허망한 인연이 화합해서 일어났다면 허망한 인연이 분리되면 소멸한다는 점이다.
인연을 의지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일어난 것은 진실로 일어난 것이 아니며, 인연을 의지해서 소멸하였기 때문에 소멸 역시 참다운 소멸이 아니기 때문에 제법 그 당체가 자체라고는 없는 것이다.
제법이 일어남이 없다면 진실이 아닌 공이라는 것을 명료하게 통달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존재해있는 모든 것은 중생의 허망한 분별의 모습이다. 이미 허망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마음에 집착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만일 마음에서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허망한 망상심이 쉬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쉬게 된다. 이를 두고 ‘체진지(體眞止)’라고 한다. 이는 일체 모든 법은 진실이 아닌 공이라는 것을 체득하게 되면 허망한 분별심이 스스로 쉬게 된다는 뜻이다.
이 문제를 기신론에서는 “일체 모든 경계가 망상 분별로서 차별이 있다. 망상 분별이 없다면 일체 경계의 차별상을 떠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여래의 평등법신인데, 이 법신을 의지해서 중생이 본래 각(本覺)이라고 설명한다”고 말하였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망념을 쉬는 일이야말로 가장 요긴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이 망념을 쉴 수 있기 때문에 ‘체진지’라고 말한다.
또 경전에서는 “일체 모든 법은 허망한 인연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 자성은 공적하여 주재자가 없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일체’라고 하는 것은 세간과 출세간법을 모두 포괄한 것이다. 그 의미를 말해보면 일체 제법가운데서 그 실체를 구하려고 하나 끝내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허망한 인연을 따라서 일어났기 때문에 당체가 자성이 없고, 상대적인 타성도 없으며, 자성과 타성이 공동으로 화합한 성질도 없으며, 아무런 원인 없이 일어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법은 진여성공으로서 그 자체를 삼아 주재자라고는 없다는 것이다.
行者於初坐禪時 隨心所念一切諸法 念念不住 雖用如上體眞止 而妄念不息 當反觀所起之心
사문(沙門)이라는 두 글자는 불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번역하면 근식(勤息) 이라고 하는데, 뭇 선법을 부지런히 닦고 모든 악업을 쉰다는 의미이다. 계정혜 삼학을 부지런히 닦고 탐진치 삼독을 소멸시킨다는 뜻도 있으며, 또는 마음을 쉬고 제법의 근원을 통달하기 때문에 사문이라고 호칭한다.
제법이 진실한 공이라는 것을 체득하고 분별심을 쉰다면 제법의 본원인 우리의 마음을 통달할 수 있다.
수행자가 앞에서 언급한 삼종지(三種止) 수행을 해도 이익을 얻지 못하고 마음에서 일으킨 망념을 따라서 찰라찰라 천류하면서 전념과 후념이 단절하지 않고 상속하기를 마치 거대한 바다에 파도와 흡사하게 쉬지 않는다면 반드시 일어나는 마음을 돌이켜 관찰해야만 한다. 이것을 두고 ‘관’ 수행이라고 한다.
일체 제법은 모두가 마음을 따라서 일어나 마음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만일 분별하는 마음이 없다면 일체법이 무엇을 따라서 일어나겠는가.
경계는 본래 일어남이 없고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경계도 따라서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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