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계시는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하게 된 것을 더욱 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나 제 마음이나 역대 부처님의 마음이나 어디 둘이겠습니까? 그 간절한 마음과 체가 없어 광대무변한 마음이 말입니다. 조그마한 것부터 큰 것까지 여러분은 마음 떠나서는 살지 못합니다. 육신이 없으면 무효고 마음내는 게 없으면 목석이죠.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은 마음으로 이 세상 온갖 법을 다 들이고 내고 하십니다. 그러니 부처님이 따로 있고, 부처님 법이 따로 있고, 부처님 마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원하시는 대로 부처님은 법신 응신 화신으로서 응해 주십니다. 모습은 다 각각이지만 마음이 한마음으로 집결돼서 음파가 모두에게 나가는 거와 같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마음이야 어찌 둘이겠습니까. 전력이 같듯이 말입니다. 전력은 똑같습니다. 가설을 해 놓고 자기 가정의 용도에 따라서 많게든 적게든 끌어 쓰게 돼 있습니다. 그처럼 마음의 법도 역시 크든 작든 자기네 용도에 따라서 끌어 쓰게 돼 있습니다.
부처님 법에 법계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법계! 우리 몸뚱이의 세포 하나하나에도 가설이 돼 있고 지구에도 가설이 돼 있습니다. 지구에도, 바로 우리 세포에 가설이 돼 있듯이 그렇게 돼 있단 얘깁니다. 그러니까 무전통신기처럼 전파를 통해서 자연법칙으로서 전체를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갈 수 있는 것이 법계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무변하고 묘해서 마음이 한번 생각을 하면 꽃나무하고도 상통할 수 있고 달나라하고도 상통할 수 있고, 즉 말하자면 은하계하고도 그 근본이 통할 수 있고 태양계하고도 통할 수 있다 이겁니다. 즉 우주 천체의 근본이 인간 마음의 근본에 있다는 얘깁니다. 직결돼 있죠.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세상만사 살림살이가 전부 우리 마음에 가설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 하고 돌아가는 끊임없는 진리지요.
그런데 부처님 법이 따로 있다고 하신다면 너무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네 살림살이, 생활을 빼놓고 부처님 법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우리의 생활을 떠나서 무슨 부처님 법이 있겠습니까? 입산해서 수도하는 승려들이 참선을 한다면서 틀고 앉아 있는데 그렇게 해야만 참선을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는 신도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와선이나 입선이나 좌선이나 행선이나 즉, 누우나 일어서나 앉으나 일을 하나 그 자체가 전부 참선이란 말입니다. 일하고 앉고 서고 눕고 하는 그 자체가 전부 참선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참선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진짜 참선이 될 수 있는가?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면 나로부터 일체가 벌어졌다 하는 걸 인식해야 합니다. 잘못되고 잘되는 것도 나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대 성인들이 전부 말씀하시기를 ‘너부터 알라. 너부터 깨달아라. 너를 끌고 다니는 너부터 믿어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바깥으로 ‘하나님이시여! 주여! 부처님이시여! 칠성이시여! 독성님이시여!’ 하고 아무리 찾아 봤던들 허공에 헛손질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끌고 다니는 내 마음의 주인이 있으니, 몸뚱이는 그 주인의 시자요 집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몸뚱이도 여래의 집이 될 수 있고 도량도 여래의 집이 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참선을 하려면 반드시 자기 마음의 주인에게 맡겨 놓고 지켜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주인으로부터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고 들이고 내면서 살림을 하는 것은 아시죠? 살림을 누가 합니까? 모두 여러분이, 각자 여러분이 하고 계시죠? 여러분이 하고 계신 그 자체의 마음이 마음을 내면, 마음을 내게 하는 것도 바로 그 주인입니다. 나쁜 일도 하게 하고 좋은 일도 하게 하고, 거룩한 일도 하게 하고 배신도 하게 하고, 불덩어리가 올라오게도 하고 답답하게도 하고, 애고도 생기게 하고 병고도 생기게 하고 여러 가지죠. 그런 걸 어떻게 말로 다 하리까. 그렇게 하는 그 자체가 바로 몸속에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이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정자 난자를 받아서 내 영혼과 더불어 삼합이 합쳐져서 내가 탄생이 됐는데,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이 거기에 집결이 되는 거죠. 인연에 따라서 같이 합쳐집니다. 한 몸 태어나는 데 그것이 전부 들어 있게 되는 거죠. 들어 있되, 작용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자기의 업식대로 부서를 맡아서, 즉 공장이라면 공장을 맡아서, 다 자기 일할 것들을 맡아서 몸속에 들어앉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몸뚱이 속에 들어 있는 의식들은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모릅니다. 이 중생들은 전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주어진 대로 입력이 돼 가지고 그냥 현실로 나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좋은 것도 알고 나쁜 것도 알아서 모두를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항상 ‘너와 나와 둘이 아닌 한마음인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럼으로써 속에 있는 의식들도 다 ‘아! 둘이 아니로구나.’ 이렇게 알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아, 네가 죽으면 바로 나도 죽는 것이지.’ 이렇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네가 잘못되면 내가 잘못되는 것이지.’ 그런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의 모든 중생들은 다 이 공부를 함으로써 상태가 바꿔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면 “상구보리 하화중생, 위로는 네 자성을 섬기고 아래로는 몸뚱이 속의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라.” 하신 겁니다. 그래서 제도를 하게 되면, 그 마음으로 다스리면 보살로 화합니다. 즉 남한테 누가 될 일이라면 ‘모든 것을 그렇게 안 하게 당신만이 할 수 있지 않아.’ 하고 돌려서 놓는 데에 묘미가 있는 겁니다. 그 마음의 의식, 업보 인과응보 유전성 세균성 영계성까지도 마음으로써 한마음으로 다뤄 주는 데서 그게 커버가 되고, 앞서 입력돼서 나오던 게 다 무너지고 없어지게 되기 때문에 묘미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수많은 의식들이 모두 천백억화신으로 다 화한다 이 소립니다. 모든 의식들이 몰랐던 거를 알게 되고 모두가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 도리를 알게 됐기 때문에 화해서 나투게 되죠. 모든 중생들이 보살로 화해서 털구멍을 통하고 눈구멍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고 들면서 가고 옴이 없이 제도를 한다는 얘깁니다.
여기 대구에 와서, 여러분이 생활 속에서 참선을 하는 법과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법과 자유자재할 수 있는 법을 어떻게 하면 알 수가 있을까 하는 그 의심, 의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꼭 ‘주인공!’ 하고 불러야만 참선이 되는 게 아닙니다. 내면세계의 모든 것이 한마음이고, 들어오는 대로 외부의 모든 것이 한마음이며, 꽃과 날아다니는 것도 모두 함께 통해서 작용을 하고 한마음으로 돌아갑니다. 하여튼 전부 통합니다. 그래서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동시에 ‘한마음’이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것이어서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 하고 돌아가는 한마음인 것입니다. 이 한마음을 딱 한마음으로 세운다면 중심, 주인공이 되는 거죠.
주인공이란 뭘 뜻하느냐? 우리가 살림을 하면서 돌아가는 것이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보는 것도 만나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먹는 것도 일하는 것도 똥 누는 것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고정된 것을 하나라도 꼬집어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냥 놓고 돌아가시죠? 걸어오면 발자취를 짊어지고 오는 게 아니라 그냥 놓고 오시죠? 그리고 만났다가 헤어졌으면 놓고 가시죠? 봤으면 본 대로 다른 걸 볼 때는 앞서 본 거는 놓고 가시죠? 일거일동 놓고 가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마음으로 ‘아이구, 내가….’ 이러시면서 놓고 가는 걸 모릅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붙들고 그냥 매달리고 온통 야단들을 하니 그 고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지구도 시공을 초월해서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돌아가는 이상 모든 게, 천체가 다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도 돌아가고 있습니다. 조금 아까 말한 것도 벌써 과거입니다. (법상을 짚으시며) 이것도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체 살림살이가 어찌 고정되게 머물러 있다고 보겠습니까. 머물지 않는 도리로 살고 계시니까, 그렇게 돌아가니까 용도에 따라서 다가오는 대로 돌아가는 불바퀴에다 그냥 넣는 것입니다. 놓는 것입니다. 정신계의 이치를 모르시니까 다시 재차 놓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래는 놓을 것도 없고 안 놓을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놓고 관찰하고 지켜본다면 하나하나 실험이 되고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주여! 하나님이시여!’ 하면서 이름을 부르고 바깥으로 찾는다고 해서 참선이 되는 게 아닙니다. 틀림없는 실천궁행을 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자기가 자기한테다 하나를 딱 맡겼으면 관찰하는 것입니다. 지켜보는 것입니다. 믿는 것입니다. 바로 그게 실험이지 다른 게 실험이 아닙니다. 그럼으로써 ‘아하, 이런 거로구나!’ 하고선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게 진짜 참선입니다. 잘되려고 떡이나 밥이나 해다 놓고 시주를 억만금을 가져다주어도 내 마음 깨닫는 거하고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그거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공부 하시는 분은 손가락 처맬 거 하나를 갖다가 시주를 한다 하더라도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집 한 채를 팔아서 다 갖다 바쳐도, 만약에 기복으로 하신다면 그건 이익이 하나도 없고 공덕이 없고 전부 무효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뿌리와 나뭇가지와 잎새와 모든 게 한데 어울린 한마음으로 시주를 한다면, 자기 한 것만큼 이자에 이자가 붙어서 돌아올 겁니다. 그게 공덕이 된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의 주인을 떠나서 무슨 불법이 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 각자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고 여러분이 없다면 무효입니다. 무효예요! 아무것도, 뭐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어요. 이 세상에 생겨났으니까 애고나 병고나 그 어려운 고통이 뒤따르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뭐 때문에 뒤따르겠습니까. 뭐가 있다고요. 참선을 진짜로 하실 수 있다면 정말이지 불가사의한 법이 이 세상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대로 우리들의 법이라 이 소립니다. 불가사의한 게 불가사의한 게 아니다 이 소립니다. 그대로 우리들의 법입니다.
몇 년 전 얘깁니다만, 어떤 사람이 뼈가 툭 튀어나왔어요. 그랬는데 이 공부를 하니까 차츰차츰 그 뼈가 들어가더라는 겁니다. 인체도 개선시킬 수가 있고 마음도 바꿀 수가 있고…, 이 도리는 너무 엄청난, 참 광대무변한 도리다 이겁니다. 여러분도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을 충만히 가지고 계십니다. 가지고 계신데 그거를 어떻게 쓰느냐를 모르시는 것뿐이죠. 지수화풍이 바로 광력 통신력 자력, 이 모두를 불러일으키는 것 아닙니까? 지수화풍 아닌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누구나가 원력이 있다는 결론이죠. 원력이 있는데도 자기를 중생이라고 낮추고, 자기는 할 수 없다라고 낮추고, 또 때로는 ‘내가 나다’ 하고 올리고 이러니까 쓰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자유자재권을 가지고, 어떠한 문제가 생겨도 걱정 하나도 없이 싱긋이 웃으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자유스럽게 살 수 있게끔 길을 인도하는 겁니다.
내 한마음 주인공에, 자기 마음을 끌고 가는 자기 운전수한테 믿고 맡기라는데 세금을 내라니 걱정입니까, 돈을 내라니 걱정입니까? 왜 못합니까? 왜 못 믿습니까? 고깃덩어리인 스님을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 형상을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허공을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이름을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믿으라는데 왜 못 믿습니까?
이 세상 모든 생명, 만물만생이 다 서로 돕고 삽니다. 나무는 공기를 저장했다가 인간에게 보급하고 사람들은 이산화탄소를 내놓아서 그 나무들에게 공급해 주어 먹고 살게 하죠. 그렇듯이 사장은 직원을 위해서 직원은 사장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면 회사를 위해서 양면이 다 뛰는 거죠. 그러니 모든 게 평등하다 이 소립니다. 서로 주고받고 사니까요. 여러분이 한 달 내내 일을 안 하셨다면 한 달 월급이 안 나올 겁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내지 않고 이 공부를 게을리 하신다면 게을리 한 것만큼 월급은 적을 겁니다. 그와 같은 겁니다. 누구를 위해서 이 길을 걸어야 합니까. 누구를 위해서 꼭 해야 합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자식이든 누구든 한 식구가 아무리 속을 썩이더라도 강압적으로 “네가 이렇게 해서는 깡통밖에 못 찬다” 하며 욕을 하거나 또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볼 적마다 야단을 하거나 이런다면 빗나가기 십중팔구입니다. 보금자리가 겨울에는 따뜻해야 되고 여름에는 시원해야 되겠죠? 그와 같이 마음이 포근하고 따뜻해야 됩니다. 첫째는 그거지만 둘째, 셋째는…, 이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마음과 마음에 불이 들어와야 육신이 움죽거리는 거지, 마음이 통하지 않고 마음이 엇나가는데 어떻게 그게 잠잠해지겠습니까? 그러니까 말로 아무리 닦달을 해도 아니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얘기하기를 마음과 마음이 통하면 인간은 물론이고 개미하고도 통하고 바퀴벌레하고도 통하고, 꽃하고도 통하고 날아다니는 새하고도 통하고, 지렁이 하나 곤충 하나도 통하지 않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내 식구하고 통하지 않겠습니까? 자식이라는 거 부모라는 거 남편이라는 거 아내라는 거, 이게 가설이 다 돼 있으니까 내 스위치 하나 누르면 식구들에게 다 불이 들어올 수 있다는 그런 믿음과 폭넓은 지혜를 가지고 우리가 불을 켜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식구가 그렇게 속을 썩이고 그런다 해도 그 사람이 잘못하는 게 아닙니다. 과거에 산 그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못 알아들으신다면 저 시장바닥에 나가 보거나 이 세상 돌아가는 자체를 잘 보십시오. 모두 끼리끼리 모여서 삽니다.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끼리끼리, 기사는 기사대로 끼리끼리, 공원들은 공원들대로 끼리끼리 모여서 삽니다. 또 시장에 가 보면 사과는 사과대로 배는 배대로 식물은 식물대로 동물은 동물대로 모두가 모아져 있습니다.
그렇듯이 모두가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한 가족이 전부 가설이 돼 있다 이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의 스위치를 누를 생각은 안 하고 거죽으로 만날 그냥 야단법석을 하는 겁니다. 죽느니 사느니 하고 “이놈아!” “이놈의 자식아!” 이러면서 그냥 속으로는 죽이고 싶은 거를 참아 가면서 입으로는 거품을 물고 야단법석이죠. 이렇게 해서 해결이 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불난 데 부채질하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거는 자기 주인공에 맡겨 놓고 ‘모두가 둘 아니잖아. 아빠의 주인공, 그 마음도 둘이 아니니까 저 마음과 내 마음에 다 같이 불이 들어와서 광명세계를 찾을 수 있는데 괜히 이렇게 야단법석을 했구나. 이 모습을 가지고 살면 얼마나 산다고 한 철 나기 위해서 이렇게 서로 싸워야 하나?’ 하면서 ‘그저 둘이 아니니까 서로 마음이 통해서 해결을 할 수 있는 것은 주인공밖에 없다’ 하고 거기다 놓고 부드러운 말을 해 주고 부드러운 행을 해 주세요. 그럼으로써 잘못 나가던 자식들도 생각을 잘하게 되죠. 그러고는 ‘아유, 바깥에서는 춥고 배고파도 집에만 들어가면 따뜻해!’ 하는 생각에서 고만 다 팽개치고 집으로 들어오는 거죠.
마음과 마음은 천 리 밖에서도 통하니까요. 정말입니다. 거짓말이 아니니 실험을 해 보세요. 급한 일이 생겼을 때 나가 있는 사람에게 주인공에다가 놓고 한번 전화를 돌려 보세요. (가슴을 짚으시며) 이게 전화통이죠. 내 집에 전화도 놓지 않고 남의 집에 전화를 어떻게 할 수 있으며 또 남의 집에서 오는 전화를 어떻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네? 내 집부터 전화를 놔야죠. 당연한 일이죠? 그래서 전화가 놓여 있으니까 급한 일이 생기면 전화를 돌리라는 거죠. 그러니까 남편이 나갔다가 집에 전화를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 전화를 하거든요. 이게 통하는 겁니다. 자연의 법칙입니다. 이게 불가사의한 법인데도 불가사의한 법이 아니다 이거예요. 인간의 마음은 그래서 이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고 세상하고도 가설이 돼 있단 얘깁니다. 그런데도 자기를 무시하고 그렇게 사시겠습니까?
얕은 마음은 좀 올리고 높은 마음은 조금 가라앉히고 하면서 중심에다 놓고 중용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 멋진 살림살이죠. 이 세상에 아마 그런 꽃은 없을 겁니다. 엊그저께 천안에 있는 소년원에 갔는데 요만한 어린애들이 있는데요, 하여튼 열세 살에서부터 스물세 살까지 몇천 명 됩디다. 그런데 거기 들어가니까 상징으로 무궁화꽃 가운데다 횃불을 세워 놓고 비둘기가 양쪽에서 입을 대고 있습디다. 그러니 어느 거 하나를 봐도 한마음으로 돌아가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인연에 따라서 돌아가지 않는 게 없고요. 그게 인연의 법칙이죠. 만남이 있어야 자동적으로 발전도 할 수 있고, 창조력도 기를 수 있고 창조도 해낼 수 있는 거지 만남이 없는데 독불장군으로서 어떻게 발전을 합니까. 그래서 만남의 광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을 상징으로 해 놨는데 모두 그 뜻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를 않아요. 연꽃에다 해 놨으면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이요, 무궁화꽃에다 해 놓았으면 나라의 법칙이요, 나라를 상징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 꽃들이 모두 마음의 꽃을 상징한다면 마음을 일으키는 거를 불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불이고 마음의 지혜죠. 전부 둘 아니게 돌아가는 것을 상징해서 입을 마주 대 놨습니다.
모두가 모습은 다를지언정 생명도 둘이 아니요, 마음 또한 둘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높은 산 낮은 산이 있으면, 우리가 부를 적에는 낮은 산 높은 산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내막적으로 본다면, 뒷면을 본다면 낮은 산이 있음으로써 높은 산이라고 불리는 거지 낮은 산이 없는데 어떻게 높은 산이라고 불리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두가 평등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세계를 서천골이라고 해도 됩니다, 보이지 않는 서천골. ‘서천골의 샘물은 바로, 젖지도 않는다’ 하는 것은 한마음으로 돌아가고 연결 연결 해서 돌아가니까, 비행기 프로펠러 돌아가듯 하니까요. 지구가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돌아가듯이 인간의 삶 자체도 태어나고 죽고 물질도 부서지고 변하면서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이것을 무상이라고 하죠. 이렇게 무상하게 돌아가는데 거기에 무엇이 걸릴 게 있겠습니까.
몇천 년 몇만 년이나 보물을, 재산을 지니고 삽니까? 그게 아닙니다. 부모가 재산을 아무리 많이 자식들한테 물려주어도 하루아침의 벗밖에 되지 않는 수도 있습니다. 그런 재산을 주기보다도 마음공부를 하는 데에 그 뿌리를 성성하게 해 주는 것이 제일이며 재산보다 더 좋은 겁니다. 여러분이 사시다가 몸뚱이를 벗는다면, 재물이 아무리 많이 있다 하더라도 방문 안에서 인사를 하고 바깥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재물이란 언제나 감춰 두게 마련이니까 나와서 인사나 할 수 있나요? 하하하…. 또 집이 아무리 좋다 한들, 땅을 아무리 많이 사 놨던들 죽어서 갈 때는 대문 안에서 고하고 말죠. 아무리 친한 친구나 자식, 부부가 있다 하더라도 동구 바깥에, 즉 말하자면 묘지나 화장터밖에 안 와 줍니다. 거기서 인사를 고하면 그만이죠. 그런데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른 그 악업 선업들은 그림자처럼 쫓아다니게 됩니다. 악한 짓을 했다면 악한 업이, 선한 일을 했다면 선한 업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요다음 생에 나와도 역시 또 몸속에 침투해 가지고 또 그렇게 평생 고생을 시켜서, 아주 뭐 그 빚을 톡톡히 갚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거짓이 아닙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기 마련입니다. 조금도 에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몸을 벗기 전에 이 도리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몸이 떨어지면 말 잘하던 것도 다 떨어지고 생각하던 것도 다 없어지지만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근본, 그 자체의 앎은 변하는 게 아닙니다. 요다음에 또 나와도 대통령으로 나와서 일을 아주 밝고 정확하게 해서 국민들을 살릴 수도 있고, 큰 회사를 해서 직원들을 다 잘 먹여 살릴 수도 있죠. 모든 게 자기가 산 대로 나오는 겁니다. 이제 얼마 안 가면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는 게 나옵니다. 모두가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니고 현실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