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한 사람이 죽는다면…
마음을 닦는다고는 하는데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생이 다하기 전에 제 마음을 다 닦아서 근본을 밝힌다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죽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이 마음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과 마음을 닦는 공부를 하다가 간 사람과 나를 밝히고 간 사람의 차이점을 설해 주십시오.
다른 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얘기해 드릴까요? 우리가 꼭 이 공부는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진실하게 이렇게 내 안으로, 낱낱이 안으로 굴려서 안으로 돌리는 것, 이 생활하는 모든 것, 죽고 사는 것 생사윤회를, 모든 것을 이 내 마음 안으로 돌리는 데 그 묘미가 있는 거죠. 공부를 한 사람에 한해서 말입니다. 지금도 돌려놓으라고, 놓으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가는 사람이 죽을 때는 죽기 전에 자기 갈 자리를 자기가 다 마련해 놓고 가요. 이건 죽는 게 아니거든요. 이 공부를 하게 되면 죽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거기에 요점이 있어요. 공부를 그렇게 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몸을 벗을 때도 몸을 벗기 전에 자기가 자기를 벌써, 정자와 난자를 좇아서 자기가 어디를 선택해요. 자기가 선택해서 자기가 열 달 내내 길러요. 그래서 여기서 생명이 딱 끊어지면요, 사람으로뿐만 아니라 다른 무슨 큰 생명이 된다든가 이런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꼭 사람으로만 비유하지 마세요. 사람 이외의 정말 벗어난 선인들이 된다 하더라도, 그걸 정망해서 다 해 놓습니다. 또 사람이 된다 하면 만 아홉 달이 걸려야 되지만 만 아홉 달이라는 것은 우리 지구에서 쓰는 거지 딴 데서는 만 아홉 달이라는 게 똑같이 쓰여지질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단 순간에 우리가 생각할 때, 이 목숨이 떨어지기 전에 벌써 그쪽으로 가고 이 옷은 벗어요. 사람으로 내가 화한다 할 때는 내가 목숨이 한 찰나에 딱 떨어질 때, 벌써 그리로 가는 겁니다. 이건 벌써 미리 가 있어요. 벌써 거기 뱃속에 들어가서 아홉 달 내내 길러 가지고 나오는 거죠. 여기는 사는 그 습만 있다 뿐이지 자기가 길을 알기 때문에 자기가 선처해서 그리로 가서 자기가 벌써 자기를 기르고 있어요. 그러니 길잡이는 자기죠. 자기 이외에 길잡이가 없어요. 그걸 아셔야 돼요.
또, 공부를 안 한 사람에 한해서는 자기가 자기 개척을 못하고 자기가 길을 모르고 컴컴하고 그러니까 자기가 죽어도 누가 인도할 사람이 없단 말이에요. 그렇게 살던 자기의 그 습이 있어서 눈이 캄캄하니까요. 그래서 살던 습에 의해서 자기가 착을 두고 있는 데에 그냥 머물러 버리죠. 그래 거기서 머물러 버리니까 때에 따라서는 영계는 집에서 산 사람한테 뱅뱅뱅뱅 돌게 되고, 자식이고 부모고 뭐 누구를 막론하고 얘기예요. 죽기 전에 자기가 집안의 친척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다른 길은 몰라도 그 길은 알거든요. 그러니까 그 습에 의해서 뱅뱅뱅뱅 돌아다니죠. 자기에게 더 잘해 준 사람 앞에, 또는 자기 친구한테. 그래서 그 친구로 인해서 남 논등에 주저앉는 법도 있죠. 저희 집 식구들이 시원치 않고 그러면 친구한테로 가거든요. 이게 문제가 참, 여기에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안 하고 바깥으로만 만날 돌고 다니던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길을 자기가 인도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타의에 의해서 내가 길을 인도 받아야 할 텐데 그 은사도 똑바른 사람을 못 뒀다면 그마저도 또 없는 겁니다. 그러니 캄캄하고 그래서 결국은 이제 무슨 개집이나 새집이나 족제비 소굴이나 돼지 소굴이나 뭐 이런 데로, 소 외양간 뭐 이런 데로 그냥, 그냥 떠지는 거죠. 또 요행히, 자기가 마음이 착해서 참 요행히 걸린다면 사람이 어떤 차원을 가진 줄도 모르게 그냥 그런 데로 가는 거죠. 그러니까 그건 십중팔구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 도리를 공부하지 못한 사람이 열 사람이라면, 컴컴한 그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이 열 명 중에 두 명 되기가 어렵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이 공부를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인간에게도 이득이 없고 사회에도 이득이 없고 국가적으로도 이익이 없고 세계적으로도 이익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예전보다도 너무 잘 알아요, 세계를. 예전엔 그렇게 알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안방에 앉아서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 알고 있는 자기가 벌써 계발이 된 겁니다, 본래. 예를 들어서 평상시에 ‘아이구! 난 저게 좋다, 저게 좋다.’ 이러는 건 그냥 우리가 보고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잠재의식 속으로 가서 컴퓨터에, 자연 컴퓨터에 가서 저장돼 있거든요.
그러니 왜 이득이 없느냐 하면 자기가 이 도리를 모르면 그렇게 박혀 있기 때문에 자기 그 박혀 있는 대로 길이 갈 것이고, 자기가 자유권을 갖고 자유자재한다면 그대로 자기 가고 싶은 대로 미리미리 그렇게 다 해서 한 찰나에 딸칵 하면, 자기가 옷만 딸칵 벗는 거뿐이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옷을 벗으려면 훌훌 그냥 벗죠. 그 순간뿐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옮겨 놓는 거뿐이다 이겁니다. 그러면 공부를 못한 사람에게는 ‘길다, 짧다’ 이런 것이 있는데, 이런 공부를 한다면 ‘한 찰나다’ 이럴 때 이쪽에서의 한 찰나는, 한 찰나는 한 찰난데 이 집으로 들어가느냐 저 집으로 들어가느냐의 문제죠!
그러면 열 달이 걸리고도 한 찰나다, 일 초가 걸리고 열흘이 걸렸다 또는 아홉 달이 걸렸다 이래도, 만약에 아는 사람이 이렇게 믿고 다니던 길잡이가 있다면 벌써 그것을 알게 돼 있어요. 왜?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믿고 다녔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즉시 그것을 막아 줄 수 있는 겁니다, 즉시! 그런데 막아 줄 수도 있는가 하면 그것이 아홉 달이 됐다 하더라도 일 초로 축소한단 말입니다. 이건 체가 없는 거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눈뜬 사람 하나 만나기가 극히 어렵다 하는 거죠. 이런 사람을 하나 만나면 이익이,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이 있는 것이죠. 그래 사람 하나 만나기가 그렇게 쉽습니까, 어디? 그리고 또,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못난 사람 하나 만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이 공부는 꼭 해야 한다는 점이 바로 이런 점이 있을 뿐 아니라 타의에서 구하면 절대로 그것은 세세생생에 해로운 것이 닥쳐온다는 얘깁니다. 왜냐? 그것이 습의 인과가 돼서 그게 유전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부모들 한번 잘못하는 까닭에,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하는 바람에 그만 자기가 씨를 뿌려 놓은 거까지도 그냥 몇 대조까지 내려가는 거죠, 뭐. 그러니 글쎄 얼마나 그게 중요합니까? 우리가 지금 보통 그냥 그저 기도나 하러 다니고 이런 게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식구가 다 금이 되느냐 마느냐, 지금 아주 심각한 문제죠.
모두들 보면 ‘아이, 우린 장사를 하기 때문에 못 오고, 바빠서 못 오고….’ 이러시는데 아니, 어떤 사람은 뭐 그냥 가게 문 잠가 놓고도 왔다가 가는데 그렇게 가도 하루 종일 열어 놓고 파는 것보다 더 많이 팔았다고 합디다. 마음먹기에 달린 겁니다. 지금 제일 급한 게 뭐냐 하면 이 공부 하는 게 제일 인간으로선 급하죠. 먹고사는 문제도 그건 이차죠. 그렇다고 해서 굶고 벌지 말고 다니라는 건 아니거든요. 버는 거 벌면서도 조금만 부지런하면 할 수 있다는 거죠. 그게 일상생활의 참선이니까요.
남편을 믿지 못하겠어요
스님 법문을 들으면서 실천을 해 보려고 무진 애를 쓰고 노력을 하지만 저희 부부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남편과 결혼한 지가 26년이 됐는데 얼마 전에 남편이 다른 사람을 좋아해서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부터는 남편이 혹여 밖에서 또다시 그 여자와 같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자꾸 들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대문 밖을 나가면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가는 것 같고 직장에 나가도 걱정이 되고…. 남편이 너무 미워 죽겠어요. 어떻게 하면 남편에 대한 마음을 쉴 수가 있겠는지요?
아주 간단해요. 지금 그런 데서 행복하다 못해 지겹죠? 사랑은 주는 게 사랑이지 끌어 잡아당기는 게 사랑이 아닙니다. 모든 거를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모든 거를 자기 탓으로 돌리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가 없었다면 남편도 없고 다 없어요! 그런데 자기가 있기 때문에 있는 거죠. 그러니 잘하든 못하든 자기 탓으로 돌리세요. 그리고 사람이나 짐승이나 묶어 놔 보세요. 더 끊고 나가려고 애를 쓰죠. 그냥 확 풀어 놓으면 아주 자동적으로, 나갈 때 나가고 들어올 때 들어오죠. 그러니까 그렇게 집착하고 상상하고 그러지 말고 따뜻하게 그냥 다 내놓으라는 말입니다. 서로 똑같이 그러란 말이에요.
똑같이, 부인이 잘못하는 거는 남편이 ‘이것도 다 내 탓이야. 주인공, 너만이 저 사람 그렇지 않게 해!’ 하고 자유를 주고, 또 댁은 남편에게 그렇게 하면서 자유를 주세요. 주인공은 둘이 아닌 까닭에 어디를 가서 뭘 행해도 그냥 주인공에서 알아지고 주인공에서 자동적으로 다뤄 줍니다. 다스려 준단 말입니다. 그걸 모르고 자기가 말로 행동으로 온통 붙잡으려고 하니 붙잡아지나요, 그게?
그리고 우연히는 없어요. 이 세상에 금은 금방에 모이고 넝마는 넝마전에 모이고 무쇠는 무쇠전에 모입니다. 그렇게 끼리끼리 모이는 거를 어떻게 말로 다 하리까. 그래서 끼리끼리 모인 거예요. 끼리끼리 모였는데 누구에게 죄가 있고, 누구의 죄는 더하고 덜하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아하, 이것도 내 탓이고 저것도 내 탓이로구나! 내가 이 세상에 나지 않았다면 무엇이 걸림이 있고 무엇이 상대가 있으랴!’ 하곤 그냥 다 거기다 놓으라고 지금 공부시키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자기 마음 거기다 놓고 미워도 밉다는 소리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밉다고, 아주 보기 싫다고, 또 그냥 아주 죽이고 싶도록 밉다고 하면 당신이 외려 마구니가 됩니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부터 ‘미운 것도 이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밉지 않게 하는 것도 너야.’ 하고 뒤집어서 돌려서 입력을 해야 그 입력 들어간 대로 나오지 않겠어요? 알았지요?
물욕을 다 놔야 깨닫는지
좋은 차도 타고 싶고 또 좋은 집에서도 살고 싶고 직업도 좀 편하고 남들이 우러러보는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고, 부모님도 남들 부모님보다 좀 더 잘 모시고 싶은 이런 속된 마음에 휘둘려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를 깨닫는 입장에서는 물욕이라든가 이런 모든 걸 놔 버리고 살 수 있어야만 참도(眞道)를 깨닫는 것인지요? 이런 속된 욕심에 끄달려 다니면서도 어떻게 공부를 하면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인지요?
내가 이렇게 보면, 누구든지 거기에 걸려 가지고 사람들이 공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는 거 잡지 않고 오는 거 막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물 흘러가는 대로 구덩이가 있으면 거기를 메워 가면서 넘어갈 것이고 앞산이 있으면 물은 돌아갈 것이고, 그건 자연의 법칙 아니겠습니까? 자연의 법칙이면서도 그건 ‘우연히’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면서도 불교를 참되게 믿을 수 있으며 참선을 할 수 있으며 참나를 찾을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즉 말하자면 손 하나 움죽거리는 거 또는 생각 한 번 하는 거, 자고 깨는 거, 먹고 일하는 거, 하나하나 모든 것이, 나쁜 거 좋은 거를 떠나서 우리한테 주어진 대로 지극하게 사는 그 자체가 공했다는 얘깁니다. 불법이 따로 있고 생활이 따로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물감을 삼십 가지를 갖다 놨는데 우린 지금 그 물감 삼십 가지를 놓고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 흰 거 쓸 때도 있고 노란 거 쓸 때도 있고,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쓰고 있습니다, 지금 이게 생활이라고 한다면. 그런데 노란색이 따로 있고 흰색이 따로 있고 이렇게 본단 말입니다. 우리 생활이 이게 전부 불법이지 생활 떠나서 뭐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삼십 가지의 물감을 쓰되, 우리 생활입니다. 삼십 가지의 물감을 쓰되 바로 내가 고정되게 하나만 쓰지 않으니 그 삼십 가지의 물감 속에 나까지 공했다는 얘깁니다. 쓰여지는 것도 공했고, 쓰는 나도 공했단 얘깁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이 물감 자체도 진짜 물감이 어떤 건지 이름 지어서 말할 수도 없고 또 삼십 가지의 물감을 쓴 나도 어떤 거 쓸 때 나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공했고, 그러니 이 전체가 한데 합쳐서 모두가 공했다는 얘깁니다. 우리 생활입니다, 그게 전부.
‘어떤 거를 해야만이 내가 불법을 준수하고 믿고 숭상할 수 있고 연구할 수 있다.'''' 이런 게 아닙니다. 그대로 참선입니다. 그대로 찰나찰나 나투어서 화해서 돌아가는 게 그대로 참선이며 행선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난 게 그대로 화두입니다. 공했으면서 그대로 화두고 그대로 색이면서 그대로 공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떠나고 무엇을 안 떠나고가 있습니까? 도대체 부처님이 어디 고정되게 형상으로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이라고 이름이 돼 있는 것이 부처님입니까? 그러면 허공이 부처님입니까?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바로 부처님은 계신 겁니다. 여러분이 화장실에 들어가면 화장실에 계신 거고 법당에 올라가면 법당에 계신 겁니다. 여기 와 앉아 계시니까 여기 계신 겁니다.
우리가 한생각을 이렇게 탁 부딪힐 때는 대뇌로 해서 통신이 전체로 돌아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습도력이나 원자도력이나 통신력이나 또는 무전력이라든가 이런 것이 다 같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여러 가지가 사람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이 도리를 모르고서 그대로 생각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나기 이전과 더불어 이전도 없고 지금도 없고 미래도 없고 이렇게 같이 들어서 돌아갈 수 있어야 우주와 더불어 같이 돌아갈 수 있는 거죠.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한생각이 법이 돼서 그대로 이 세상에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의 머리에 그렇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지금 과학적으로도 물질과학 또는 유전자도 거기까지도 알게 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인간이 그렇게 많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서 진화돼서 나타난다는 그런 거까지는 알 수 있으나, 무전자로서 그렇게 없앨 수도 있고 있게 할 수도 있는 그런 자유성은 우리가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고 있다는 얘깁니다. 부처님의 도리를 알라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의 이 진리의 도리를 우리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 참나를 알아 가지고, 세상 도리를 알아 가지고 우주의 도리를 안다면 ‘전체 둘이 아니라'''' 이랬을 때, 우리는 우주도 발전함으로써 우리 지구도 발전할 수 있고 내 몸도 발전할 수 있고 내 가정도 발전할 수 있고 내 국가도 발전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면 물질로만 생각을 하시고 ‘아, 그건 그렇게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여러분이 생각할 때 남이 하나도 모르고 있어도 모두 장본인들은 알고 있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하나 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딴 사람은 하나도 모르거든요.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설계가 나와야 이제 몇 사람 알게 되죠. 그게 완전히 이루어져야만 딴 사람들은 다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무루에서 유루로, 유루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둘이겠습니까?
그러니 불교가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겉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합쳐서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이게 불교입니다. 죽은 불교가 아니에요, 우리는! 이름이나 찾고 죽으면 천당에 가자고 믿는 게 아닙니다. 우린 지금 이때,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는 것에 의해서 하는 겁니다. 지금 없는 게 후일에 천당에 어디 있겠습니까? 한 달 내내 일을 안 해 놨는데 새 달에 월급 탈 게 있을까요? 에누리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사랑을 하지 말랬나요, 돈을 갖지 말랬나요? 살림을 하지 말랬나요, 고관직에 있질 말랬나요? 자기 분수를 지켜서 너무 과도하게 가지 말아라. 그러면 빠진다. 분수를 지켜라. 분수를 지키면서 너무 욕심 차리지 말고, 너무 욕심에 착을 두지 말고 나라는 데 착을 두지 말고 모두가 나 아님이 없다고 그렇게 둥글게 살아라. 그런데 억지로 가는 거를 붙잡아서 내가 권리를 가지려고 한다면 그 자긴 죽는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분수를 지키면서 둥글게 삶으로써 우리는 가는 거 잡지도 않고 오는 거 막지도 않고 스스로 둥글게 지혜롭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도구를 삼아서 그 한마디 한 행이 그대로 법이 되고 그대로 생활이 되고 그렇게 생동력 있는 삶의 보람을 느낄 거다 이겁니다.
영원토록 마음의 등을 켜고 싶어
지난주에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서 절에 가서 불을 밝히고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루만을 정해서 불을 밝힐 것이 아니라 일 년 내내 내 마음의 불을 밝혀야 진짜 부처님의 제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참 기특한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스님, 영원토록 마음의 등을 켜고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할는지요?
그렇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영원한 인등을 항상 켜고 있는 겁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영원한 오늘, 오늘조차도 내세울 수 없는 내 마음의 등불, 이 등불로 앞장을 설 수 있고 밝혀 줄 수 있지만 이 등불이 없다면 컴컴한 암흑 속에서 우리는 헤매고 돌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로 억겁을 거쳐 온 그 습을 하나도 떼지 못할 겁니다.
종 문서는 내려놓고 다니나요? 짊어지고 다니지. 작년 콩씨를 심었을 때 그 콩나무로 다시 화(化)한 것뿐이지. 그리고 콩나무는 콩씨를 또 짊어지고, 보이지 않는 콩을 짊어지고 가기 때문에 여러분이 종 문서를 짊어지고 다니는 거지 과거의 업이 있어서 짊어지고 다니는 게 아니다 이겁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를, 나 나기 이전을 나 있는 데서 찾으라는 겁니다. 모든 화두도, 자기가 나왔기에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지 자기가 그대로 그릇이 빈 그 자체가 바로 화두며 자기가 거기에서 한 점의 불씨를 얻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딴 데서 오는 것같이, 딴 데서 주는 것같이 생각을 하는데 물론 자기 불씨가 밝아져야 그 불씨를 보고서 부처님께서도 같이 한마음이 돼 주시겠지만 암흑세계에서 그대로 돌고 부처님의 불빛을 보려고 안 하는데 어찌 부처님이 자꾸 도망가는 놈을 붙잡아다가 ‘이 불빛을 봐라, 불빛을 봐라.’ 하겠습니까?
여러분도 자식을 기르고 계시지만 자식을 기르는 데도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이 여간 많지 않습니다. 말로 하고 모습으로 야단을 치고 그래서 되는 게 아닙니다. 내 한마음 주인공이라는, 이름해서 그 한 점의 마음에다 전화통 돌리듯이 거기다 맡겨 놓고 ‘아, 내 한마음이 바로 애의 한마음이니 내 한마음이 이러한데 애의 한마음도 자기 육신을 끌고 길잡이가 돼서 잘 갈 수 있을 거다.’라는 걸 진짜로 믿으면, 그대로 나와 같이, 내 맘과 같이 생각한다면 잘 갈 것을, 괜히 말로 욕하고 때리고 온통 야단을 벌이니까 집안만 혼란해지고 일은 일대로 제대로 안되고 가정은 파괴가 되고 언제나 상을 찌푸려야 하고, 그러니 복은 들어오지 않고 공덕도 될 수 없고 이러니 어떻게 할 겁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저 만날 이 몸뚱이를 가지고 내가 줬지, 내가 받았지, 내가 살지, 내가 아프지, 내가…, 만날 ‘나, 나, 나, 나’ 하니까 이놈의 잠재의식 카세트에 그냥 얽히고설켜서 감겨 가지고 각본대로 나오죠! 영화배우들처럼 도깨비장난처럼 그냥 각본대로, 나오는 대로 나오니까 여러분이 한탄을 하기를 ‘아휴, 내 팔자야! 나는 이 세상에 나와서 그렇게 나쁜 짓을 안 했건만 어찌 팔자 운명이 이렇게 가혹한가.’ 하고선 한탄하는 분들이 너무도 많지 않습니까? 그건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죠.
그런데 과거도 없는 것입니다. 왜? 오늘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작년 콩씨를 올봄에 심었더니만 콩나무로 화하고 콩나무에서 콩이 열렸습니다. 그랬으니 그 작년 콩씨가 작년 콩씨대로 따로 있고 올 콩씨대로 따로 있고 올 콩나무가 따로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 인생이 태어나면 그대로 화두요, 내 몸 나온 것이 화두요, 생활이 그대로 참선이에요. 생활이 그냥 참선이니까 숨 들이쉬고 내쉬는 게 그대로 참선이요, 그대로 한 치도 일분일초도 끊어지지 않는 것이 시공이 없는 이 진리란 말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밝음! 그래서 마음의 등이라는 것은 아무리 소낙비가 쏟아지지 않아 천하없어도, 바람이 불어서 온통 나무가 쓰러지고 불이 다 꺼져도 마음의 불이라는 것은 꺼지질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여러분의 마음이거든요. 마음의 태양! 마음의 등불! 그 등불은 끊어짐이 없이 지금 켜져 있는 것입니다. 죽으나 사나 지금 그 등불은 꺼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등을 항상 켜셔야 합니다. 이러한 등을 켜시는 것이 우리에게 공덕이 될 뿐만 아니라 삶의 보람을 갖게 되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게 되고, 세세생생에 이 고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